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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언어 1~3강 요점

윤여경| 2021.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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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요점 복습


1) 기계론과 전체론

철학사에서는 큰 틀의 사상 흐름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 데카르트의 '기계론' 그리고 최근의 생태유기체 '전체론'으로 구분합니다. 이를 '사고관'이란 이름을 붙여 목적론적 사고관, 기계론적 사고관, 전체론적 사고관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 셋중 하나를 고르고 나머지를 포기할 것을 강요하죠. 기계론적 사고관을 갖고 있는 사람은 목적론이나 전체론적 사고관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모두를 함께 갖고 싶어도, 그런 상황은 상상조차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3개의 사고관이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느 하나를 취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는 모두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찾은 방법이 사고관의 변화를 선형적인 전환으로 보지 않고 축적 과정으로 여겼습니다. 축척은 아래로 쌓여갑니다. 목적론이 가장 위에 있고, 기계론이 중간층에, 전체론에 가장 아래에 있습니다. 그렇게 전체가 하나로 공존공생하는 상황을 상상합니다.
목적론은 말 그래도 무엇을 위함입니다. 그래서 높이를 지향합니다. 기계론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목적은 하나인데, 방법은 여럿일 수 있죠. 마지막으로 전체는 규칙입니다. 그 목적과 방법에는 최소한의 규칙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전체인 규칙은 가장 밑바닥, 바로 바탕에 해당됩니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을 통해 기계론적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그 방법이 바로 분해와 조립입니다. 지금까지 계속 강조한 예술과 디자인의 '해체+콜라주'입니다. 그는 이 방법으로 디자인 되어 왔던 자신을 디자인 하는 사람으로 바꾸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나는 디자인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바꿔도 이젠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런 방법을 제안할 수 있었던 것은 방법으로 추구할 목적이 분명했고, 다양한 방법을 고안할 바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바탕은 바로 '언어'입니다. 데카르트는 라틴어와 프랑스어를 모두 잘 알고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그는 당시 보편적인 학문 언어로 여겨지는 라틴어가 아니라 프랑스어로 <방법서설>을 씁니다. 학자들은 카톨릭 교회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말하지만, 저는 데카르트가 자신의 언어에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었기에 그렇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르네상스 시기는 그랬습니다. 단테와 마키아 밸리 등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국어로 생각을 전개했습니다. 현재 우리로 치면 영어가 아니라 한국말로 생각하고 글을 쓴 것이죠. 이 또한 새롭게 주목할만한 방법론입니다.
데카르트 방법의 바탕은 바로 언어였습니다. 그는 모국어로 생각했고 이것이 자신의 존재하는 이유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기존 가톨릭=라틴어로 되어 있는 모든 것을 의심했죠. 의심을 갖고 모든 것을 분리=해체하고 새롭게 조립=콜라주했습니다. 저는 데카르트의 자신감은 바로 언어적 바탕에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거꾸로하면 언어적 바탕이 있어야 의심이 생기고, 그 의심을 통해 방법을 찾고, 이 방법을 갖고 분리+조립이라는 놀이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역사에서 장기지속적 환경을 바탕으로 중기지속적 구조변화가 일어나고, 이 변화의 길목에 단기지속적 사건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에 말의 뜻을 연결시켜, 말의 바탕뜻을 기반으로 말의 짜임뜻이 있고, 이 짜음뜻을 통해 쓰임뜻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이를 예술과 디자인로 가져오면 바탕뜻은 규칙이고, 짜임뜻은 방법, 쓰임뜻은 놀이입니다. 즉 예술과 디자인 놀이를 하려면 짜임을 이루는 방법을 알아야 하고, 그 방법의 기반인 바탕규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럼 다시 물어보죠. 과연 우리는 그 규칙을 알고, 예술과 디자인을 감상하고 있는 것일까요?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은 이 바탕규칙을 기반으로 자신들만의 방법을 찾아, 요소들을 갖고 놀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이 전체를 인식한 예술가와 디자이너는 아주 드물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주 뛰어난 예술가일지라도 자신의 행위가 언어놀이이고 그 방법이 분해-조립 정도만 이해할 뿐 자신의 놀이 바탕에 규칙이 있음을 인식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그럼 언어놀이와 해체+콜라주의 방법에 있어 가장 밑바탕은 무엇일까요? 모국어? 모국어는 그 말을 공유하는 시공간에 어느정도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모국어에는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의 오래된 집단지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국어를 공유하지 못하면 전혀 소통할 수 없죠. 그래서 모국어는 가장 밑바탕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술과 디자인의 놀이와 방법에 있어 가장 밑바탕은 바로 '신체경험'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서 있고, 팔과 다리가 두개입니다. 눈과 귀, 코와 입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유사한 신체를 가진 사람들이 하는 기본적인 경험이 바로 언어적 소통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전제입니다. 데카르트가 중요시여긴 '생각=언어'거 아니라 사람의 기본적인 경험이 바로 예술과 디자인의 바탕입니다. 우리는 여기서부터 시작해야만 합니다.

2) 공통경험이라는 바탕=규칙

디자인은 de+sign, 즉 언어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 언어는 사람들의 공통경험에 근거합니다. 이것이 언어의 바탕규칙입니다. 이 바탕규칙 위에서 언어를 구성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습니다. 이 방법을 아는 사람들은 언어놀이를 합니다. 즉 언어놀이는 가장 밑바탕의 경험과 방법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하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 놀이는 소통이 가능하고 재미도 있습니다. 즉 언어의 바탕과 방법을 이해해야만 디자인을 즐길 수 있습니다. 마치 야구 규칙과 방법을 알아야 야구놀이를 할 수 있듯이요. 기량은 그 다음 문제죠.
스콧 맥클라우드는 예술과 디자이너가 참고할 만한 경험적 바탕 도식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감각과 지각, 생각이라는 존재로 구분하고 지각적 세계를 하나의 삼각형으로 구성했습니다. 좌측 삼각형은 그림으로 그려진 시각이미지, 우측 삼각형은 글로 쓰여진 청각이미지 공간입니다. 지각삼각형은 감각과 생각이 상호적으로 작용해 만들어진 '의미'의 영역입니다. 의미는 다시 둘로 쪼개집니다. 시각이미지에 가까운 의미는 감각적 느낌이 우세하고, 청각이미지에 가까운 의미는 개념적인 뜻이 우세합니다. 지각을 감각과 생각으로 구성된 이미지를 담는 그릇에 비유한다면, 그림은 시각적 이미지를, 글은 청각이미지를 담는 그릇이죠.
지각삼각형은 위아래로도 구분됩니다. 상단꼭지점으로 가는 시각경로는 의미가 제거되어 추상적 요소로 해체됩니다. 하단의 언어경로는 의미요소를 유지됩니다. 좌측에서 우측으로 갈수록 의미요소가 빈약해집니다. 하지만 눈과 입이라는 최소한의 요소는 유지되죠. 그러다 우측 문자삼각형으로 넘어가면서 의미요소가 완전히 사라지고 결국 상당의 추상적 요소들과 유사한 상태가 됩니다. 사람들은 이를 활용해 문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추상적으로 해체된 요소들은 그림과 문자 중 어느것도 될 가능성을 내포한 형태로 여겨졌죠. 사람들은 'O'를 '동그라미' 혹은 '원'이라 말하기도 하고 '이응' 혹은 '오'라고 발음하기도 합니다.
사진과 아이콘, 문자들은 추상적인 심벌요소의 바탕입니다. 추상적이 요소들을 가지고 자유롭게 놀 수 있는 것은 바로 언어적 요소라는 바탕이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추상적 요소들은 언어적 요소들을 해체하고 다시 콜라주하는 방법을 갖고 놀이를 즐깁니다. 이때 해체하는 방법과 콜라주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림도 될 수 있고, 문자도 될 수 있죠.
시각경로의 추상적 요소가 놀이요소이고, 해체+콜라주가 놀이방법이라면 언어적 요소는 놀이규칙입니다. 추상적 요소들을 갖고 놀이를 즐기고 소통을 하려면 반드시 언어적 요소의 놀이규칙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규칙을 이해해야만 어떤 요소들을 갖고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신체를 예로 들면, 신체를 구성하는 요소 중 머리나 손톱, 옷 등은 자유롭게 놀 수 있습니다. 얼굴 등 신체 일부를 성형하는 것도 가능하죠. 하지만 심장과 간, 폐를 떼어내면 그 사람은 죽습니다. 생명을 유지하는 신체기관들은 마음대로 갖고 놀수가 없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머리모양을 바꾸는 것은 가능하지만, 심장과 간을 해체하면 죽게 되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니까요. 하지만 바탕규칙을 모르면 심장과 간을 해체해 모든 것이 죽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예술과 디자인에 있어 죽는다는 것은 소통이 전혀 안된다는 의미죠. 이렇듯 놀이를 하려면 반드시 바탕이 되는 규칙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규칙을 모르면 이해도 안되고 재미도 없고 즐길 수도 없죠.

3) 언어의 공공성 확대

표의문자와 표음문자는 스콧 맥클라우드의 지각삼각형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놀이요소입니다. 표의문자는 그림이 가장 최소화된 형태입니다. 그래서 그림들의 다양한 합성이 가능합니다. 가장 오래된 한자는 대표적인 표의문자입니다. 한자는 무척 추상적인 형태지만 여전히 그림에 더 가깝습니다. 표의문자가 대상의 꼴을 본따 그린 문자라면 표음문자는 청각이미지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새롭게 고안된 매체입니다. 알파벳은 표의문자가 의미를 상실하고 소리만 남은 형태이고, 한글은 추상적 요소들을 활용한 문자입니다.
한자는 너무 추상화되어 중국문명권의 고유 문자 되어버렸습니다. 이를 대체한 보편적인 표의문자는 화장실 앞에 붙은 아이콘이나 공항과 올림픽에서 보는 픽토그램입니다. SNS의 이모티콘도 표의문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표의문자들은 소통에 있어 보편성이 가장 높습니다. 반면 도서관과 서점에 있는 책들은 표음문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책은 의미적 보편성이 가장 높은 매체입니다.
디자인은 크게 그래픽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로 구분됩니다. 그래픽디자인은 지각삼각형에서 그림영역, 즉 사진과 아이콘, 표의문자를 다룹니다. 타이포그래피는 문자영역의 표음문자를 다룹니다. 타이포그래피는 작은 글자를 다루는 마이크로-타이포그래피와 큰 글자를 다루는 매크로-타이포그래피로 구분되는데, 마이크로-타이포그래피는 책을 만드는 분야입니다. 의미 보편성을 최대한 고려하기에 그림보다는 문자의 특징에 집중하죠. 반면 매크로-타이포그래피는 간판 등 즉각적으로 눈에 띄는 문자이기에 소통 보편성을 고려해 그림처럼 여겨집니다.
전문적인 디자인 분야는 시각이미지와 청각이미지가 동시에 연상될 수 있는 기본층위 범주를 확대하는데 기여합니다. 기본층위 범주란 바로 언어의 공공성을 의미합니다. 디자이너들은 이 언어의 공공성을 높혀 소통을 확대하는 목적을 공유합니다. 사실적인 요소와 추상적인 요소, 표의문자와 표의문자를 오가며 소통을 위한 지각삼각형을 최대한 확대하고, 이를 통해 언어의 기본층위 범주를 넓혀갑니다. 그럼으로써 집단성을 강화하죠. 그래서 디자인은 태초의 인류부터 지금까지 이어오는 분야라 할 수 있습니다. 경험과 말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디자인이 있으니까요.
철학자는 개념을 만들어냅니다. 의미의 보편성이 높은 단어를 어떤 맥락으로 가져와 설명하죠. 가령 '발명이란 무엇인가?' 물어보면 "발명은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라며 있다-없다는 맥락에서 '발명'의 개념을 설명합니다. 철학의 목적이 원리를 밝히는 것이라 말하는데 이는 그 단어가 쓰이는 가장 적절한 맥락을 찾아내는 과정입니다.
시인도 개념을 만들어냅니다. 시인은 의미의 보편성이 높은 단어를 독창적인 맥락으로 설명합니다. "사랑은 전쟁"처럼 '사랑'을 이야기할때 사랑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전쟁'을 사랑에 빗댐으로서 독자로 하여금 사랑을 새롭게 상상하도록 이끕니다. 시인들은 늘 새로운 은유를 찾습니다. 이 은유는 되도록 신체적 경험을 연상시키면 좋죠. 시인을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경험을 좋아합니다. 특별한 경험은 새로운 은유를 찾을 가능성을 높여주니까요. 좋은 은유를 통해 사물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상상력을 길러줍니다.
예술가와 디자이너도 은유를 합니다. 이들은 시인처럼 의미적 보편성이 높은 단어나 내용을 경험적인 맥락으로 가져와 은유합니다. 즉 감각가능한 상태로 환원시키죠. 개별적인 경험 또한 너무 구체적이라 소통이 어렵습니다. 그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하고만 소통할 수 있죠. 그래서 특히 보편적 소통을 중시하는 디자이너는 되도록 공통경험이 높고 자율성이 높은 이미지를 선호하죠. 때문이 디자인은 다소 단순화된 형태로 구현됩니다. 추상성인 동시에 보편성을 갖죠. 그래야 기존의 의미를 해체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수 있는 자유로움을 가질 수 있고, 대량소통의 가능성도 높혀주니까요.
철학자와 시인은 말에 말을 빗대어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철학자는 의미 보편성이 가장 높은 개념들을 다룹니다. 연상되는 이미지가 별로 없기에 기본층위 범주가 낮죠. 그래서 철학이 어렵습니다. 그나마 시인은 의미 보편성이 높은 개념을 경험을 연상하는 단어에 은유함으로서 어려움을 덜어줍니다. 기본층위 범주가 높죠. 그래서 철학보다 소통의 보편성이 높습니다.
미술가와 디자이너는 말을 직접적인 경험에 빗댑니다. 아예 경험 그 자체로 끌어들이죠. 특히 디자인은 대중적인 소통을 추구하기에 기본층의 범주도 가장 넓습니다. 다소 전위적인 현대 미술은 기존의 경험적 의미와 형태를 해체함으로서 기본층의 범주의 크기를 넓혀주는 역할을 합니다. 대중적인 디자인은 기존 기본층의 범주를 적극활용해 더 넓은 소통을 지향합니다. 미술과 디자인은 의미 보편성이 높은 개념이나 개별적이 경험을 소통 보편성이 높은 상태로 직접 경험하게 함으로써 기존 기본층위 범주를 더욱 넓히는 역할을 합니다. 이 기존층위 범주가 바로 공통경험입니다. 즉 예술과 디자인은 공통경험 그 자체를 키우는 활동이죠.

복잡하고 어려워 보이지만 딱 하나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공통경험를 통해 소통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공통경험은 일상의 언어에 녹아있습니다. 그리고 예술과 디자인은 기존 공통경험을 기반으로 새로운 공통경험을 만들고 소통하는 활동입니다. 이를 위해 예술가와 디자이너는 공통경험을 기반으로 기존 언어의 의미와 형태를 해체하고 콜라주 하는 등 자신만의 놀이 방법을 찾아 언어놀이를 합니다. 이를통해 집단지성인 기본층위 범주가 커지고 알차게 됩니다. 복습은 이 정도로 하고 시각언어의 새로운 느낌 요소, 색 이야기로 넘어가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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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경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디자인 저술가, 이론가, 교육자다. 저서로는 『런던에서 온 윌리엄 모리스』(지콜론북, 2014), 『역사는 디자인된다』(민음사, 2017), 『아빠 디자인이 뭐예요』(이숲, 2020)가 있으며 『디자인평론』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국민대학교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하고 그린디자인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경향신문 정보 그래픽 디자이너, 국민대학교 디자인 대학원 겸임 교수로 재직한다. 2017년부터 디자인대안학교 디학(designerschool.net)을 운영하며, 한국말 공부 모임 ‘묻따풀 학당’에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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