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후 줄곧 콘텐츠부터 UXUI까지, 디자인 분야를 이리저리 헤엄쳐 다녔다. 초반엔 해보고 싶은 일을 한다고 마냥 재미있게만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 늘 하던 대로 하는 것 같고, 이게 최선의 방법인지, 잘 하고는 있는 건지 모르겠고. 부쩍 성장하지 못하고 정체된 기분이 들었다. 어디서 도움을 받을 수 없을까 이것저것 찾아보던 와중에 책 제목부터 표지 디자인까지 도저히 읽어보지 않고는 못 배길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조수 둘에 비서하나로 시작한 F/F/G(플레처/포브스/길)는 오늘날 런던, 취리히, 뉴욕 등지에 지사를 두고 범세계적으로 그래픽, 인테리어, 산업 디자인, 건축 분야에서 활동하는 회사 펜타그램(Pentagram)이 됐다.- 168p, 저자 소개
[이제껏 배운 그래픽 디자인 규칙은 다 잊어라. 이 책에 실린 것까지]의 저자는 밥 길.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저자가 디자이너라면 익숙한 ‘펜타그램'을 설립한 사람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펜타그램의 설립자가 누군지까지는 몰랐다. 줄곧 하는 옳은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묘하게 느껴지는 괴짜 같은 면모 때문에 가볍게 생각했는데 말이다 하하
‘의사소통'이라는, 소프트웨어 매뉴얼이나 구글에서는 좀처럼 찾기 어려운, 디자인의 고갱이를 다룬다는 점에서 출간된 지 40년 가까이 된 책이 설파하는 교훈은 여전히 곱씹어 볼 만 하다. 제목이 제안하듯 책에 실린 규칙을 따르지 않는 성실한 독자뿐 아니라, 그 제안 마저도 또 다른 규칙으로 거부해 규칙을 하나하나 따라 보기로 마음먹은 영리한 독자에게도.
- 174p, 옮긴이의 말
책을 읽고 와닿은 점이 많아 바로 업무에 적용해보는 ‘영리한 독자'가 되자는 마음으로 사무실 책상에 앉았지만 역시 쉽진 않았다. 어떻게 첫 술에 배부를 수 있겠는가. 일단 ‘레이아웃이 아니라 아이디어로 시작하는 디자인' 이라는 문장을 포스트 잇에 적어 모니터 앞에 붙였다. 더불어 저자가 소개한 8가지 규칙을 몇 가지 문장과 작업물을 함께 이곳에 정리해두고 자주 들여다 보기로 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나는 다른 그래픽 디자이너들과 마찬가지로 예쁜 것과 유행에만 매달렸다. 의사소통에는 솔직히 관심이 없었다. 디자인을 할 때는 작업 목적이 뭔지 따지지도 않고 결과물이 어때 보여야 하는지부터 대뜸 아는 체했다.
디자인은 의사소통에서 생기는 문제를 푸는 과정이 됐다. 동시에 흥미롭게 문제만 풀어준다면, 결과물이야 어떻든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디자인을 운운하는 대신 아이디어와 해결책을 말했다. - 7p
재미없는 (독특하지 않은) 문제를 다시 규정해 내 그래픽 디자인이 다룰만 한 문제로 바꾸는 것. 이렇게 문제 자체에서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게 바로 내 방법이다. - 11p
세상에는 사람 눈을 끌려고 당신 디자인과 경쟁하는 이미지가 널렸다. 마침내 누군가 당신 디자인을 봤을 때, 그 안에는 서로 경쟁하는 요소가 없어야 한다. - 13p
이제부터 그림을 그릴 때는 연필을 들기 전에 잠깐 기다리자. 일단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지 (또는 느끼는지) 알아내야 (또는 문제에 따라 정의해야) 비로소 거기에 맞는 선이나 색조, 질감, 무늬, 구성 등을 가늠할 수 있다. - 21p
디자이너가 어떤 이미지를 하나 찾았는데, 그게 자신이 원래 말하려던 바를 완벽히 전한다면, 굳이 이미지를 새로 만들어야 할까? 디자이너의 작업을 개성적이고 독창적으로 만드는 건 그가 의사소통과 문제 해결에 이미지를 쓰는 방식이다. 이미지 자체가 아니라 아이디어다. - 41p
가장 중요한 건 말과 그래픽이 서로 경쟁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 57p
뭐든지 적당히만 해서는 절대 안 된다. 해결책에 색이 필요하다면, 누가 보더라도 잔뜩 써야 한다. 글자가 커야 한다면 정말 커야 한다. 뭐든지 극단적인 건 자연스럽지 않다. 그래서 해 보자는 거다. - 109p
의뢰인이 좋은 작품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도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문제다. 의뢰인이 멍청하다고 투덜대는 디자이너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자기가 미대에서 배운 세련된 취향이 의뢰인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의뢰인과 디자이너 사이에 생기는 갈등은 건강하다.
디자이너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해왔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획일적인 환경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하철 역과 신문, 잡지, 광고판이 따분하고 부정적인 이미지로 뒤덮인다면, 그건 결국 우리 잘못이다. 의뢰인이 아니라. 의뢰인은 이미지에 돈을 낼 뿐이다. 그들이 이미지를 만들 수는 없다. - 115p
길은 주어진 일감을 '풀어야 할 문제'로, 디자인을 '문제를 푸는 과정'으로 여겼다. '제대로' 편집한다면 답은, 다시 말해 디자인은 자연스레 나온다고 믿었다.173p, 옮긴이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