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클

시각언어 3강-3

윤여경| 2021.05.19

이전 글 : 시각언어 3강-2 바로가기

2) 그래픽디자인 + 타이포그래피 = 시각언어

이번에는 전문적인 현대 디자인 분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죠. 앞선 그림에서 짐작하셨겠지만 감각모방의 고전미술은 사진, 지각재현된 인상파 그림은 아이콘, 생각이 편집되는 추상파들은 추상적인 심벌, 바우하우스와 오토 노이라트는 문자에 각각 대응됩니다. 서로 비슷한 측면이 있죠. 이는 결국 사람든 비슷한 유형의 시각기호에서 어떤 감흥을 느낀다는 점을 시사하죠.
바야흐로 표현의 시대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고흐, 사람의 본능을 표현한 고갱, 해체와 콜라주라는 방식을 발명한 세잔, 그리고 마티스와 피카소, 데스틸과 구성주의 등 20세기 초 많은 미술가들은 대상을 극단적인 형태와 색으로 해체해 자신이 원하는대로 맘껏 표현했습니다. 크게 보아 모두 표현주의자들이죠. 바우하우스는 일부 표현주의자들이 모여 만든 학교였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시대를 대표하는 보편적 생활양식을 추구합니다. 주전자와 식기구, 조명, 주방, 글꼴, 가구 등등 이들은 추상적 요소들을 조합해 생활도구의 원형=프로토타입을 만들어냅니다. 이 시도는 현대 디자인 개념을 낳았고 산업과 융합되어 '산업디자인' 분야가 형성되었습니다. 대량생산을 추구하는 산업자본주의는 물건을 잘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팔아야만 생존하니까요. 그래서 산업디자이너의 역할을 점점 중요해졌고, 많은 사람들이 산업디자이너가 되었죠. 디자인이 주요한 경쟁수단이 되면서 디자인을 하기 위한 많은 그래픽 툴이 등장합니다. 디지털화된 그래픽 툴을 다루면 누구나 쉽게 디자인을 할 수 있게 되었죠. 이제는 굳이 디자인 전문교육을 받지 않더라도 누구나 쉽게 디자인을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현업에는 전문 디자인교육을 받지 않은 디자이너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이미 1970년대 빅터파파넥은 '모든 인간은 디자이너다'라고 선언합니다. 파파넥은 '의도를 갖고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가 디자인이라 생각했습니다. 질서를 원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디자이너란 의미죠.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이 쉽게 디자인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약간의 그래픽도구만 익히면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디자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래픽도구도 필요없습니다. 정교한 소묘 기량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컴퓨터가 없어도 그림을 잘그리지 못해도 아이디어(생각)와 펜 그리고 종이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바우하우스 이후 디자인교육에서 소묘기량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기본 커리큘럼에서도 중요한 과목으로 다루지 않죠. 이젠 대상을 모방하고 싶으면 사진을 찍으면 됩니다. 움직임을 표현하고 싶으면 영상을 찍으면 되고요. 생각하고 찍고 편집하면 뚝딱! 만들어지죠. 기술이 점점 발전해 요즘은 클릭 몇번으로 브랜딩 로고를 만드는 서비스가 등장했습니다. 디자인에서 중요한 것은 그래픽툴을 다루는 기량이 아니라 생각입니다. 디자인은 근본적으로 de+sign 기호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 쉽게말해 생각과 편집으로 의도를 표현하는 과정입니다. 데카르트, 빅터파파넥처럼 의지와 질서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디자인을 할 수 있죠. 그래서 저는 이 시대 디자인은 전문적 기량이 아니라 보편적인 소양 혹은 교양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디자인이 보편적 소양이 되려면 미술의 회화나 조각처럼 디자인에 어떤 분야가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구분이 어떤 근거를 갖고 있는지 아울러 현대 디자인의 전체적인 흐름이 어떤 상황인지 알면 좋겠죠.

디자인도 미술과 마찬가지로 사실적 경험에서 시작합니다. 디자인에서 사실적 이미지를 다루는 분야가 사진과 영상입니다. 사진과 영상도 섬세한 소묘처럼 경험을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좋은 사람과 즐거운 추억을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은 그 장소나 상황의 맥락을 담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편집이 일어납니다. 어떤 장소에서 어떤 모습으로 찍을까 고민하죠. 과거에는 찍은 사진을 인화하면 그걸로 끝이었는데 요즘은 대부분 디지털 사진입니다. 포토샵 툴을 사용해 다양하게 편집할 수 있죠.
사진과 영상 편집은 그림을 그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일종의 아이콘을 만드는 과정이죠. 편집과정에서 사진만이 아니라 실제 그림이 추가되기도 합니다. 요즘만들어지는 포스터를 보면 여러 이미지 요소가 동원되죠. 고양이와 함께 찍은 사진 가운데 '하트' 모양을 그려넣습니다. 이를 시각디자인 분야에서 '그래픽디자인'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디자인 행위를 그래픽디자인이라 말해도 무방합니다. 제품이나 의상디자인을 할때도 먼저 종이에 아이디어를 그리거나 사진을 찍어 디지털 툴로 편집합니다. 이 또한 그래픽디자인이죠. 그래서 그래픽디자인은 모든 디자인의 기본 혹은 기초로 여겨집니다.

그래픽디자인 전문가들은 이미지를 추상화시킵니다. 기존 이미지의 형태와 색을 완전히 해체함으로서 기존 이미지가 갖고 있던 의미가 사라지게 합니다. 수차례 말씀드렸지만 이미지가 추상화되면 의미를 부여하기 수월해집니다. 곧이말(S)와 지님말( V), 맞이말(O)가 자유롭게 연결되죠. 그래서 편집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추상화된 요소들을 다양하게 조합해 새로운 의도에 부합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죠. 이미지가 조합되면서 추상적 이미지는 아이콘으로 역류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기존과 다른 의미가 부여된 이미지로 재탄생합니다. 그래서 '모더니즘 디자인'이라 말하면 장식이 없고, 단순하고 추상적인 형태를 많이 떠올립니다.
추상적 심벌에는 다른 경로가 존재합니다. 추상적 요소들이 문자가 되어 소리를 표현하죠. 문자는 말만이 아니라 각종 소리를 표현합니다. '으르렁' '슈웅~' '삐뽀삐뽀' 등 다양한 소리를 표현할 수 있죠. 이 소리들은 청각이미지를 형성합니다. 스콧 맥클라우드는 문자삼각형에 소리의 특징을 강조하기 위해 문자를 그림처럼 그렸습니다. 만화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글자그림이죠.

디자인에서 이런 식으로 문자를 다루는 분야를 '타이포그래피'라고 말합니다. 만화같은 그림글자는 거리에서 흔히 보는 간판, 포스터, 광고 등에 자주 등장합니다. 19세기 산업혁명으로 상품이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하자 이를 판매하기 위한 광고산업이 성장합니다. 광고를 하기 위해서는 메세지가 눈에 띄어야 합니다. 메세지는 주로 글자로 표현되는데 아무래도 글자는 읽어야 하기에 즉각적으로 정보를 전달하기 어렵죠. 그래서 글자를 그림처럼 그려 눈에 띄게 만들었습니다. 되도록 글자의 의미에 가깝게 그렸죠. 이 그림글자는 주로 간판이나 포스터 등에 크게 표현됩니다. 이런 타이포그래피는 글자가 크다는 의미로 '매크로 타이포그래피'라고 말합니다.

본래 전통적인 타이포그래피는 인쇄산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5세기까지 필경사들은 글자를 가지런하게 베껴서 책을 만들었습니다. 15세기 구텐베르크가 금속활판인쇄를 도입하면서 베껴쓰던 책을 대량으로 인쇄하기 시작합니다. 활판인쇄를 하려면 '활자'가 필요합니다. '활자'란 낱개로 만들어진 금속글자입니다. 긴 금속 끝에 작은 글자를 새겨넣고, 이 글자들을 가지런하게 조합해 단어와 문장, 페이지를 조판합니다. 초기 인쇄업자들은 활자를 만들때 되도록 필경사들이 가지런하게 쓰던 필체를 반영했습니다. 인쇄가 점차 늘어나자 사람들은 인쇄용 활자에 익숙해집니다. 인쇄업자들은 더이상 필경사들의 글자를 따라하지 않고, 나름대로 인쇄에 가장 적합한 글자를 만듭니다. 더불어 글줄의 간격, 단어의 간격 등 인쇄 조판에 필요한 조건들을 확립해나갑니다. 인쇄된 면이 균질하고 읽기 편하도록 조판이 진행됩니다. 이런 조판이 아름답다고 여겼죠. 이를 현대에서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마이크로'는 작은 글자를 의미합니다.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는 간판이나 포스터의 큰 글씨가 아니라 책이나 잡지는 본문의 배열, 전체적인 그리드와 배치 등을 고려하는 디자인분야입니다. 마지막으로 글꼴을 만드는 분야를 타입페이스 디자인이라고 말합니다. 글자의 얼굴을 만드는 것이죠. 이 또한 타이포그래피에 해당됩니다.
타이포그래피는 사진과 아이콘, 추상적 심벌을 다루는 그래픽디자인과 함께 시각디자인의 거대한 양축을 형성합니다. 그림과 글에서 그래픽디자인은 그림을, 타이포그래피는 글을 다룬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두 분야는 디자인의 바탕입니다. 이 바탕이 탄탄하면 자동차, 웹, 의상, 브랜드 등등 다른 매체 디자인도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싶어하는 분들에게 늘 타이포그래피을 검색하거나 책을 사거 읽어보시라고 추천합니다.

1980년대 이후 디자인 분야에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단어가 등장했습니다. 생각=편집 중심의 기존 모더니즘 디자인에 대한 반발이 시작되었습니다. 모더니즘을 추구하던 디자이너들을 자유로운 편집을 강조하다보니 추상적 형태를 신봉했습니다. 추상적 형태가 하나의 양식으로 고착된 것이죠. 새로운 디자이너들은 이 추상적 형태에서 자유가 아닌 갑갑함을 느낍니다. 추상적 형태를 갖고 마음대로 놀아야 하는데 그걸 못하게 하니까요. 그래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디자이너들은 감각-경험을 중시합니다. 경험을 중요성을 강조하면 감각의 극대화를 추구하죠. 덕분에 강렬한 자극을 주는 형태와 색이 등장합니다. 자본주의 시장은 이 흐름을 포착해 감각을 부풀리는 상품을 기획합니다. 그래서 현대는 다양한 감각-경험들이 상품화되었습니다. 감각을 극대화한 상품들이 등장하자 사람들이 더 강한 자극을 찾아 소비하게 됩니다. 증강현실, 가상현실 기술이 발전하고 이 기술이 게임 등 오락산업을 부풀렸습니다. 이 또한 긍정적인 흐름은 아닙니다. 생각의 기반을 탄탄하게 하자는 주장이 오히려 강한 감각 자극에 빠져 생각을 외면하게 된 상황이랄까요. 마치 올리버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처럼요.



3) 추상을 활용한 디자인의 소통 방법

디자인은 어떤 느낌과 의미, 쉽게말해 이미지와 뜻을 담는 그릇입니다. 패키지디자인(포장디자인)은 마치 그릇처럼 실체를 담습니다. 위 예시 그림에서 보듯 캐릭터디자인은 펭귄 같은 실제 이미지를 단순화시킨 그림으로 담고, 추상적인 펭귄의 느낌을 '펭귄'이라는 문자로 담습니다. 그러면 보는 사람과 독자는 뽀로로 캐릭터와 '폥귄' 글자에 자신이 경험한 이미지와 뜻을 담음으로서 이해하고 소통하는 것이죠. 이렇듯 디자인은 어느 한쪽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 양쪽 모두에서 일어납니다.
앞서 언어는 개별에서 보편으로 진행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굳이 그림과 글의 보편성을 따지자면 글이 훨씬 큰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바나나는 단순하게 선 몇개로 그릴 수 있지만 '과일'은 불가능하죠. '과일'이란 뜻의 가장 간단한 표현은 역시 문자밖에 없죠. 이렇듯 의도하는 사람의 보편성에 있어서는 그림보다 글이 훨씬 보편적입니다. 하지만 읽는 경우에는 이 보편성이 역전됩니다. 글을 읽으려면 일단 말을 알아야 한다. 말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은 글을 읽을 수 없죠. 인도에 놀러가서 화장실이 급할때 힌디어로 ''라고 써 있으면 화장실을 절대 찾을 수 없습니다. 글자를 안다고 해도 그 지역의 말을 모르면 소용없죠. 하지만 남녀가 그려진 화장실 아이콘을 보면 금방 찾을 수 있죠. 그림은 굳이 말과 글을 몰라도 경험을 공유하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소통에 있어서는 글보다 훨씬 더 보편적이죠. 게다가 즉각적인 이해까지 줄 수 있죠.
그래서 그림과 글을 동시에 사용하면 소통과 의미를 모두 극대화 시킬 수 있습니다. 이를 잘 활용한 매체가 '만화'죠. 덕분에 스콧 맥클라우드가 언어의 본질을 관통할 수 있는 도식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을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술과 디자인하면 알듯 모를듯 추상적인 형태를 떠올립니다. 이는 계속 의미를 해체하며 추상세계에 머물고 있는 현대예술의 속성때문입니다. 또한 현대디자인 역사에서 초기 모더니즘 디자인처럼 추상적인 요소들로 알듯모를듯한 이미지 실험들을 자주 봐왔기 때문이죠. 하지만 진짜 예술과 디자인은 늘 가까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늘상 만들고 사용하는 생활양식이 바로 우리 시대의 예술이자 디자인입니다. 예술과 디자인의 목적인 표현과 소통에 있다면 잘 표현되고 소통되는 예술과 디자인은 이미 무의식중에 우리 경험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저는 예술과 디자인을 먼 곳에서가 아닌 가까운 곳에서 발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로 많은 분들이 고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코로나 바이러스가 있다고 알 수 있을까요. 기술덕분입니다. 전자현미경 기술덕분에 극도로 작은 바이러스조차 사실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죠. 전자현미경으로 사진을 찍어 바이러스에 왕관과 비슷한 장식이 돌기처럼 나 있는 그 꼴을 보고 '코로나=왕관'라는 이름도 붙힐 수 있었습니다. 기술은 아주 작은 것만이 아니라 아주 먼 곳에 있는 별도 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기술은 우리에게 감각을 확장시켜 주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더 풍부한 사실적 경험을 할 수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죠.
감각되지 않으면 존재를 알 수 없기에 계속 '그' 상태에 머무리게 됩니다. 감각이 있어야 '이것' '저것' 최소한 '그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죠. 지난 수세기 인류는 비약적인 기술발전을 함으로써 지금까지 감각할 수 없는 것을 감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덕분에 생존가능성을 높힐 수 있었습니다. 현재 인구가 이토록 많은 것은 기술 덕분이죠.
결국 중요한 것은 감각에 의한 지각입니다. 감각을 해야 대상을 인지하고 이해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어떤 것으로 여기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를 레이코프와 존슨은 '은유'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인생'이나 '시간' 같은 극도로 보편적인 단어들은 감각되지 않기에 반드시 '여행'이나 '마라톤'처럼 경험가능한 단어로 은유되어 이해되고 소통된다고 말합니다. 경험을 통해 얻은 신경패턴이 하나의 개념구조를 형성합니다. 사람들은 경험된 개념구조를 통해 보편적 개념구조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것이죠. 이는 세모와 원 같은 추상적 이미지 요소를 경험적 공감각으로 이해하는 방식과 비슷합니다. 레이코프와 존슨에게 모두 '은유=메타포'라고 할 수 있죠. 이 은유=메타포는 감각적 새김과 생각적 여김에 의해 형성된 지각입니다. 즉 경험구조란 바로 지각적 상태, 스콧 맥클라우드가 그렸던 그 삼각형 내부의 상황이라고 볼 수 있죠.
만약 은유되는 지각적 경험구조가 사람 모두가 공유하는 경험이라면 이해와 소통은 엄청나게 확대될 것입니다. 가령 위아래, 앞뒤, 안밖(겉속)은 두발보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경험입니다. 그래서 "오른다" "내려간다" "지나간다" "들어간다" 같은 단어들을 말과 글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됩니다. 이것들 모두 은유죠.

그래픽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는 바로 이런 은유 기법을 사용해 대량유통과 소통을 도모합니다.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펭귄은 아무래도 어색합니다. 사람과 다른 동물로 여겨지죠. 그래서 디자이너는 펭귄을 사람과 유사하게 바꾸고 이미지를 단순화 시킴으로서 사실적인 펭귄보다 더 친숙한 사람+펭귄을 만들어냅니다. 그럼 이 펭귄이 사람처럼 말을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죠.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도 비슷하 고민을 합니다. '펭귄'이란 글을 어떻게 보여줄 것이냐의 문제에 부딪칩니다. 큰 의미없이 잘 읽히도록 담백할 글꼴로 할까, 아니면 특별한 글꼴을 쓰고 펭귄 글자를 변형시켜 어떤 느낌을 줄까. 고민하겠죠.
아니 '펭귄'이란 이름 자체가 어색할 수도 있습니다. '펭귄'은 이미 기본층위 범주가 연상되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디자이너는 고민합니다. 이 이름을 계속 쓸 것인가 바꿀 것인가. 이미지는 분명 펭귄인데 진짜 펭귄은 아닙니다. 게다가 사람처럼 말을 하는 펭귄이죠. 이 펭귄은 이름은 '펭귄'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펭귄'이란 이름을 포기하고 새로운 이미지에 걸맞는 새로운 이름을 짓습니다.
이름은 펭귄을 연상하는 발음인 "펭수"일수도 있고, 아예 아무 의미가 없는 "뽀로로"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디자이너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캐릭터라는 의도에서 "뽀로로"라는 이름을 선택했습니다. 그럼 캐릭터가 등장해 이렇게 말합니다. "안녕! 난 뽀로로야" 처음 이 캐릭터를 접하는 아이들은 펭귄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이 캐릭터와 펭귄을 전혀 연관해서 생각하지 않죠. 오히려 동물원에 가서 펭귄을 보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와~ 뽀로로다"
디자이너는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사실적 이미지를 단순화시킵니다. 중요한 의미요소만을 부각하는 과정에서 여러 정보요소가 생략되기에 추상화가 진행됩니다. 즉 단순화와 추상화는 뗄 수 없는 관계죠. 추상화가 되면 아무래도 의미를 자유롭게 부여할 수 있습니다. 펭귄에게 모자를 씌울수도 있고, 사람처럼 말을 해도 어색하지 않죠. 즉 언어놀이가 가능해집니다. 이 캐릭터의 이름도 자유롭게 정할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캐릭터가 펭귄을 모티브로 탄생했다고 해서 굳이 이름에 '펭귄'을 연상하도록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완전히 새로운 이름을 부여함으로서 더욱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낼 수 있죠.
이 과정에서 소리의 추상화가 진행됩니다. 소리의 추상화는 곧 의미의 추상화입니다. 펭귄은 기본층위 범주의 단어이니 이름으로 부적합합니다. '펭수'의 경우 여전히 '펭'이라는 보편적 의미요소가 남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펭귄'을 연상시키죠. 'ㅍ'이 들어간 단어까지는 '펭귄'이라는 의미요소가 남은 상태일 것입니다. 'ㅍ'이 'ㅃ'으로 가면 의미요소는 거의 사라집니다. '뽀로로'라고 말하면 펭귄의 이미지는 완전히 없어진 상태죠. 의미가 추상화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렇기에 '뽀로로'라는 이름의 캐릭터는 '펭귄'의 선입견에서 벗어나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할 수 있게됩니다.
'뽀로로' 캐릭터가 성공하면 많은 아이들이 이 캐릭터를 접하면서 나름의 기본층위 범주를 형성하게 됩니다. 즉 '뽀로로'가 하나의 기본층위 기호로 작동하죠. 이 범주를 통해 오히려 펭귄을 친숙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은 '뽀로로' 범주에서 펭귄을 경험하고, 거꾸로 '펭귄'이라는 기본층위 범주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죠.

다시 디자이너의 입장으로 와보죠. 디자이너는 '펭귄'의 사실적 경험에서 형성된 펭귄의 의미요소를 활용해 그림을 그렸습니다. 새김 바탕치기를 통해 펭귄의 의미요소를 추출한 것이죠. 이제 이 이미지에 성격을 부여해야 합니다. 기존 펭귄에 비해 추상화 되었으니 다소 자유롭게 성격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가설과 추론을 통해 이미지에 성격이 부여되죠. 이 과정에서 여김 바탕치기가 일어납니다. 이미지 캐릭터가 완성되면 캐릭터 이름이 필요합니다. 앞서 말했듯 '뽀로로'라는 전혀 새로운 이름을 캐릭터에 부여합니다. 일종의 노속치기가 일어난 것이죠. 노속치기는 앞서 언급했듯이 경험바탕이 없는 의미없는 소리입니다. 이 소리가 캐릭터가 있는 이미지와 연결되면서 어떤 의미가 만들어지죠. 물론 거짓 캐릭터이지만 크게 상관없습니다. 모두가 이 캐릭터가 거짓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까요. 사람처럼 말하는 펭귄은 없으니까요.
이렇듯 디자이너는 추상을 활용해 완전히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냅니다. 이 언어는 경험에서 근거하지만 전적으로 경험을 따르지 않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죠. 마치 디즈니월드처럼요. 사람들은 이렇게 만들어진 세계를 믿지 않지만 좋아합니다. 왜냐면 이 세계에서 만큼은 마음껏 놀 수 있으니까요.
디자이너에게 추상화와 노속치기는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추상을 활용해 새로운 언어세계를 만듦으로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도록 만들어줍니다. 만약 이 언어와 세상이 대중적으로 소통되면 사람들은 새로운 언어와 세상을 공유함으로써 일종의 공동체 의식을 갖게 됩니다. 집단성이 강화되죠. 아이들이 '뽀로로'라는 캐릭터를 모두 경험함으로써 어린시절을 추억을 공유하게 되듯이죠.



4) 예술과 디자인의 역할 : 공통 감각 만들기

그림에 나오는 이미지들은 다국적 기업들을 브랜드 로고변화입니다. 왼쪽에 있는 로고들은 사업 초기 로고입니다. 스타벅스 로고에 등장하는 캐릭터 이름은 사이렌입니다. 바다 신화에 등장하는 사이렌(Siren)이라는 인어의 이미지를 심벌로 선택해, 초기 커피 무역상들의 열정과 로맨스를 연상시키죠. 스타벅스 초기 고객이 주로 시애틀 부두노동자들이었기 때문이죠. 스타벅스 초기 로고는 사이렌이 다소 상세하게 그려진 이미지입니다. 스콧 맥클라우드의 도식에서 왼쪽에 치우쳐 있겠죠. 이 로고들은 점차 단순해집지다. 사업이 확장되고 고객이 늘어나면서 언어적으로 보편화 되는 과정을 보여주죠. 앞서 개별적 얼굴이 아이콘화된 보편적 얼굴로 변한 것처럼요. 스타벅스의 사이렌이 이 얼굴 변화를 잘 보여줍니다.
맥도날드의 경우 어떤 지점에서 아예 글을 빼죠. 스타벅스와 AT&T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간의 경우 고객들이 적어도 알파벳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사업이 영미권 문화에 국한되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사업이 아프리카와 중국 등으로 확장되면서 특정 문명과 문화를 연상시키는 글자들을 빼버리고 단순화된 아이콘만을 사용하죠. 소통의 보편성르 극대화시키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대량소통은 결국 집단성 크기와 상관있습니다. 초기 종교에서 추상적인 형태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은 것도 이때문입니다. 집단성을 키우려면 결국 구체적이 경험을 떠올리는 요소를 생략해야만 합니다. 때론 의미요소조차 과감하게 은폐하거나 해체시킬 필요도 있죠. 십자가와 만다라, 태극 처럼요.
그럼 왜 이들은 집단성을 추구했을까요. 경험상 집단이 개인보다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자연의 위험과 다른 부족의 약탈, 전쟁의 위협이 있는 상황에서 개인이나 작은 집단은 생존에 불리했을 것입니다. 때문에 추상적 상징이나 기호로서 집단성을 높여야 한다는 압력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이 진화한 것이죠.
집단화가 이루어지면 개인은 생존에 유리해 집니다. 기업이든, 국가이든 모든 공동체는 개인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형성됩니다. 생존의 가능성은 집단의 규모와도 상관있습니다. 규모가 크면 아무래도 안정감이 더 커지겠죠. 가령 수렵채집시절 밀림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약 15~50명 정도의 규모였습니다. 현재는 도시에 몇백만명에서 몇천만명이 함께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어디서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당연히 수렵채집시절보다 요즘은 도시가 더 안전합니다. 아무래도 규모가 작은만큼 힘도 작아지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더 큰 기업과 더 강력한 국가에서 살아가길 희망합니다.

예술가와 디자이너는 모두 이 집단화에 기여합니다. 그림에서 보듯, 미술가는 그림삼각형의 좌측 하단 꼭지점을 연장하는 역할을 합니다. 과거 미술가들은 사실적 그림을 통해 사람들의 인식세계를 확장시켜 주었습니다. 때론 사람의 등에 새의 날개를 붙힌다던가, 번개를 들고 하늘을 날아다닌다던가 등등 사실적인 이미지를 새롭게 콜라주해서 새로운 사실 세계를 경험하도록 해주죠. 새로운 사실 세계는 사람들에게 여러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합니다. 시인과 철학자들은 글삼각형의 우측 꼭지점을 연장합니다. 의미의 보편성을 극대화시키죠. 이들은 새로운 개념을 만들고, 은유를 통해 개념의 확장을 도모합니다. 의미의 보편성이 확대될수록 사람들의 생각도 확대되죠.
미술가와 시인, 음악, 철학자들은 모두 예술가입니다. 이들은 감각과 생각을 극대화시켜 지각삼각형 전체를 확장하는 노력을 합니다. 소통의 가능성을 확대함으로써 집단규모가 확대될 바탕을 마련하죠. 그 다음은 소통입니다. 디자이너는 확대된 지각삼각형의 세상에서 다양한 소통을 시도합니다. 그림과 글을 조합해 가장 적절한 소통방식을 채택하죠. 단순화와 추상화를 통해 소통의 자유로움을 주고 사람들의 쉽고 재밌게 경험을 공유하도록 도와주죠.
예술가와 디자이너 두 분야는 모두 그림과 글을 다룬다는 점에서 수단 또한 동일합니다. 비록 역할은 다르지만 같은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예술가들의 언어놀이가 집단언어의 외부 크기를 키운다면, 디자이너들은 언어놀이는 집단언어의 내부를 채우는 역할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술과 디자인은 단순한 유희나 오락문화가 아니라 인간의 본능, 삶의 일상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현대예술과 현대디자인은 너무 감각적 유희나 오락에 치우쳐져 있습니다. 예술과 디자인의 본질적 속성을 망각하고 실험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이죠. 물론 전문 예술가나 디자이너를 그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예술이고 디자인이라 생각하면 안됩니다. 태초에 인류는 일상에 예술과 디자인이 있었습니다. 돌도끼와 빗살무늬토끼, 관혼상제 의식 등등 인류의 생활도구와 생활문화는 모두 예술과 디자인 활동이었습니다. 이렇듯 내 삶을 둘러싼 생각과 생활 그 자체가 예술이고 디자인이죠.

디자인을 알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답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은 디자인된 물건과 그림, 말과 글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그래서 내가 사용하는 그 디자인들이 곧 나의 정체성이라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이 디자인들은 자연물이 아니라 복잡한 과정의 de+sign을 거친 인공물입니다. 내가 사용하는 제품과 서비스, 나아가 말과 글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그 바탕을 알면, 자신이 어떤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고 자존감을 갖게 됩니다. 즉 디자인의 바탕을 알고 디자인을 할 줄 안다는 것은 곧 ‘나’의 바탕을 알고, 내 삶을 스스로 디자인 하기 위한 자신감을 갖는 것입니다.

좋아요 0
공유하기

윤여경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디자인 저술가, 이론가, 교육자다. 저서로는 『런던에서 온 윌리엄 모리스』(지콜론북, 2014), 『역사는 디자인된다』(민음사, 2017), 『아빠 디자인이 뭐예요』(이숲, 2020)가 있으며 『디자인평론』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국민대학교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하고 그린디자인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경향신문 정보 그래픽 디자이너, 국민대학교 디자인 대학원 겸임 교수로 재직한다. 2017년부터 디자인대안학교 디학(designerschool.net)을 운영하며, 한국말 공부 모임 ‘묻따풀 학당’에 함께하고 있다.
목록으로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