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본 적 있다. 서울 사람들은 서울 밖으로 나가면 큰일 나는 줄 안다고.
나는 서울 사람은 아니었지만 위 지도처럼 지방으로 내려가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역시나 지인들도 내가 지방에서 사업을 시작한다 했을 때 남극에라도 가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며 어디로 가는지 무슨 일을 해서 어떻게 먹고살 건지 질문을 했다.
이런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친구의 권유로 내려가기는 하나 내가 나고 자란 도시도 아니었고 디자인이라는 업무 자체가 해당 지역에 필요하긴 한지 걱정이 되었다.
올해는 수많은 걱정들을 뒤로하고 지방에 내려간 지 3년 차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방에서도 디자인 에이전시를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몇 가지 고려해볼 점들이 있는데 지방에서 에이전시를 운영하며 경험했던 일들을 공유해보고자 한다.
1. 왜 지방이어야만 할까?
당시 우리는 그 의미를 정확히 정의할 수 없었지만 이제와 돌이켜보면 지역문화가 담긴 <로컬 브랜드>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일단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지방으로 내려가기만 해도 절반은 성공한 셈이었으니 일터를 지방으로 옮긴다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로컬 브랜드를 만들기 앞서 '돈'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를 위해 1,2년 동안은 조금 더 잘할 수 있는 디자인 에이전시로서의 역할에 몰두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 지방 관급기관들은 업무계약을 해당 지역 업체와만 해야 하는 방침이 있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디자인 에이전시가 적은 지역에 사업장 주소를 두기만 하면 계약을 많이 따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몇 안 되는 업체들끼리 제한적인 클라이언트를 가지고 경쟁하기란 쉽지 않았다. 심지어 금액이 큰 프로젝트들은 수도권 업체까지 포함해서 경쟁해야 하는 상황도 종종 있었다.
간혹 나에게 지방에서 혹은 자신이 살던 고향에서 사업을 시작하고 싶다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 이유는 이미 포화상태인 수도권보다 조금 더 수월할 것 같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한번 더 생각해야 할 것은 '왜 지방에는 에이전시가 많이 없을까?'이다. 그만큼 많은 에이전시가 필요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 지방이라 해서 경쟁이 없는 것도 아니며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지방도 꽤 치열하다.
2. 지방 에이전시도 수도권만큼 바쁘다.
대부분 '지방'이라 하면 시골을 떠올리지만 우리 회사가 정착한 곳은 지방이라 하기에도 애매한 도심이다. 근처에 논밭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관광지도 없다. 대기업 생산공장들이 밀집해있어 수도권 사람들이 많이 내려왔고 더불어 신도시도 많이 생겼다. 새로 유입되는 인구가 늘어나다 보니 지역 내 문화기관에서 축제나 전시 프로그램 등을 많이 기획하는 편이며 프로그램들이 탄탄하고 다양하게 운영되고 있어 찾는 사람들 또한 많다.
이 외에도 지역문화를 살리는 콘텐츠, 관광상품 디자인 등 여러 방면의 수요들이 있고 우리와 같은 스타트업, 예술가, 뮤지션 등에게 지원해주는 제도뿐만 아니라 공공디자인, 공공미술 등 문화예술 분야의 공모사업도 많다. 요즘에는 한창 도시재생 키워드에 맞추어 관련된 다양한 사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이 일을 따오기 위해 일부러 지방으로 내려와 일을 하시는 분들도 보았다. 나 역시 공공디자인 공모사업으로 회사를 시작하게 된 케이스인데, 평소 공공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꽤나 이 일들이 마음에 들었고 더 많은 공공분야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싶었다. 지방에서 자리 잡게 된 계기도 이 때문이었다.
3. 그러나 돈을 '많이' 벌기는 힘들다. 그리고 매우 좁다!
지방으로 내려와 돈을 벌 수는 있었다. 하지만 '많이' 벌지는 못했다. 물론 '많다'라는 기준은 회사마다 또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이전에 일했던 에이전시와 비교해 보았을 때 기본 프로젝트의 예산 규모 자체가 달랐다. 여러 이유들이야 있겠지만 두 가지를 주로 꼽아보자면 1. 대기업 클라이언트의 수 2. 지역 내 비용에 관한 전반적인 분위기 때문이다.
이전 직장에서는 주로 굵직한 기업들과 협업한 프로젝트가 주이다 보니 규모와 금액이 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방에 위치한 에이전시도 대기업 프로젝트 수행할 수 있고 실력 또한 가능하다 생각되지만 지방 에이전시에게 수도권에 위치한 기업들이 특별한 이유가 아니고서는 프로젝트를 주지 않는다.
두 번째 지방 에이전시들은 해당 지역의 기관 및 기업들과 일을 하다 보니 지역 내 존재하는 비용에 관한 '분위기'라는 것이 존재했다. 물론 어느 산업이야 마찬가지로 통상적으로 받아야 하는 비용의 기준이 있기 마련이지만 해당 내용은 조금 특별했다.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수도권과 지역 내 기관에서 비슷한 성격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받아 수행한 적이 있었다. 각 기관이 원하는 과업 항목이 비슷했고 당연히 견적금액과 내용도 비슷하게 전달됐다. 하지만 두 기관에서 받은 답변은 매우 달랐다.
1. 수도권
원본 파일 (편집 가능한 ai, psd파일)도 받기 원합니다. 원본 제공항목을 견적에 추가해주세요
2. 지역 내 기관
견적서 잘 받았습니다. 그런데 디자인 기획 비용은 빼주실 수 있나요?
수도권의 기관은 원본 파일 제공도 금액을 인정하겠다는 내용이었고 지역 내 기관은 원본 파일 제공 항목은커녕 디자인 기획비용도 인정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즉 실제로 우리가 비용을 지출하는 인쇄비만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디자인이라는 것은 창작을 하는 사람의 인건비를 사용하는 분야이고 그렇기에 기획비를 책정하는 것이 당연하다 반론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우리는 원래 그렇게 한다였다. 이곳뿐만이겠지 했지만 다른 곳의 입장도 비슷했다
사실 이렇게 까지 디자인 비용에 야박한 이유는 좁은 사회 때문이기도 하다. 몇 개 되지 않는 지역 내 에이전시들끼리 과도한 금액 경쟁을 했고 한 업체가 앞으로 디자인 기획비는 받지 않겠다 선언한 뒤 해당 지역의 모든 업체들이 디자인 비용을 책정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이러한 견적 방식이 지역 내 자리 잡게 되었고 갑자기 나타난 작은 업체가 기획비용을 책정한다 하니 이상해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직장생활을 하며 우리 업계가 꽤나 좁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내려와 보니 그전에 좁은 것은 좁은 것도 아니었다. 수도권은 다양한 업체와 다양한 성격의 프로젝트가 있어 생각보다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분위기가 덜 형성되어 있는데 지방은 이처럼 해당 지역의 '분위기'라는 것이 산업에 꽤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다 보니 애정을 가지고 고향에 내려왔다가 아예 다른 일을 하러 다시 수도권으로 떠나는 분도 보았고 업종을 해당 지역에 유리한 쪽으로 변경하는 분도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에서 시작해야 하는 이유.
이제 것 경험했던 일들은 아주 작은 부분 중 하나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일들을 취합해 한 문장으로 정리해본다면 <다양하고 넓은 것을 배우기 위해는 수도권, 나만의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면 지방>인 듯하다.
누군가 다양하고 큰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싶다 하면 나는 당연히 서울로 가라 한다. 상대적으로 훨씬 많고 다양한 인력들 사이에서 스스로를 시험해 볼 수 있으며 세상을 좀 더 넓게 볼 수 있는 눈이 생기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 내로라하는 전시, 행사, 브랜딩 프로젝트들은 거의 수도권, 특히 서울을 중심으로 많이 이루어진다. 내가 디자이너라면 한 번쯤은 우리나라 수도인 서울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하고 배우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내 아이덴티티가 담긴 무언가를 만들기는 매우 어렵다. 이미 체계화되고 획일화된 회사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만의 무언가를 만들어보고 싶고 조금 더 작은 카테고리 안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 일을 수행하고 싶다면 지방으로 내려오는 것도 괜찮다. 나 역시 전 직장에서는 기업 브랜딩에 관련된 큰 프로젝트를 주로 맡았다면 지방에서는 그동안 내가 하고 싶었던 도시재생과 미술 전시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으며 우리만의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지역 할머니들과 함께 <아트웍> 작업도 진행 중이다. 이처럼 나만의 카테고리를 만들어 나간 다는 것, 이 것이 내가 지방에 내려오게 된 가장 큰 이유이자 가장 매력적인 이유이다.
하지만 사회 초년생이 지방에 내려와 창업하는 것을 추천하지 않는다. 지방에는 창업을 위한 각종 지원 사업들은 많지만 '나도 한번 해볼까?'라는 가벼운 마음에 시작했다가 지원이 끝난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을 거의 못 보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자신만의 기준은 만들어놓고 내려와 차근히 시작하는 것을 추천한다.
해외는 지금도 계속 로컬 브랜드 개발과 지역민이 만들어가는 특별한 문화 등 성공적인 사례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지역 불균형 해결이라는 명목 하에 숫자의 성과에만 집중하고 있어 로컬 브랜드나 로컬 가게, 지역 에이전시들이 건강한 운영을 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다. 또 지역 내 생성되어있는 과도한 경쟁과 분위기라는 것에 아직도 얽매여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않으며 지역 고유의 스토리를 담는 것이 아닌 수도권의 잘된 사례를 따라 하기에만 급급한 현 상황도 안타깝다.
지방에서 일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현재 진행 중이다.
이 글을 작성하게 된 계기는 나에게 하는 질문에 답변하기 위함이었다. 경험 끝에 내린 결론은 '지방에서도 시작할 수 있다!'이다. 지방은 아이덴티티만 있다면 다양한 지원제도를 발판 삼아 여러 기회를 접해보며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신비한 곳이다.
이처럼 신비한 곳에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조금 더 건강하고 다양한 생태계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지방으로 내려왔으면 좋겠다. 우리나라도 지방에서 누릴 수 있는 특별한 문화가 많아졌으면 좋겠고 해당 지역민들이 수도권에 가야만 취직을 할 수 있으며 수준 높은 프로젝트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지역 문화를 담고 있는 건강한 회사에서 일할 수 있는 선택권과 기회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그래서 결국 지방이라 하면 더 이상 남극기지를 떠올리는 것이 아닌 아래와 같은 이미지를 느낄 수 있는 날이 언젠가 오기를 희망한다!
지방에서 시작해도 될까요?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