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클

잘하려고 하지 마

윤기솔(돈까솔)| 2023.01.09

2018년 여름, 갓 전역을 하고 복학 전까지 반년이 넘게 시간이 붕 떠버렸다. 눈치도 없고 실력도 없는 복학생 포지션이 되는 게 싫어 경험을 쌓기 위해 인턴 지원을 하기로 했다. 꼴에 눈은 높아서 대기업만 골라 이력서를 넣으며 연속으로 낙방하던 중, 운 좋게 대기업 종합광고대행사에 아트디렉터로 덜컥 취업하게 되었다. 사람도 좋고 복지도 좋았다. 근데 제일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나였다.


광고를 좋아했지만 아트디렉터나 카피라이터와 같은 기본 개념도 없었으며, 디자인 또한 개차반으로 하는 준비 안 된 1학년 휴학생이었기에 늘 다른 인턴들과 비교당하며 애물단지 포지션으로 완벽하게 전락하고 말았다. 사수님은 친절하고 좋은 분이었지만 나의 많은 실수에 한숨이 늘어 가기 시작했다. 파티션 너머에서 사수님의 무거운 한숨이 담장을 넘어와 내 고개를 눌러 하늘보다 땅을 보는 날이 많아졌다. 출근하며 출입증을 찍을 때마다 나는 삑- 소리는 ‘대역죄인 등장!’과 같이 들렸으며 누군가가 나에게 일을 주면 연한 사약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럴 때마다 서서히 그리고 천천히 몸과 마음이 병들어갔다. 다른 인턴들처럼 잘하고 싶었고 도움이 되는 쓸모 있는 인간이고 싶었다.

냉정한 현실에 자존감이 바닥을 찍을 무렵, 언젠가부터 마음속 한구석에 ‘내일은 때려치워야지.’라며 상상의 사직서를 품고 다녔다. 누군가는 ‘고작 인턴 하면서 이 정도 스트레스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 집단에서 쓸모없는 존재라는 망상과 자괴감에 빠진 당시에는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남몰래 1시간 일찍 출근해서 먼저 업무를 시작하는 것, 가능한 늦게 퇴근하고 집에서 밤을 새우며 다음 날 일을 미리 시작하는 것. 열등생으로 살아남기 위해 조금 더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발악이었다. 인턴이라는 업계의 맛보기 시스템은 아이스크림 가게의 맛보기 스푼을 경험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이제 그만 해야지’라는 생각에 진짜 퇴사를 마음먹었을 때 경쟁 PT가 들어왔다. 아이디어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세 달 가까이 일하며 아이디어를 내는 자리가 없었는데 “돈까솔 씨도 한번 내보세요.”라며 팀장님께서 처음으로 아이디어를 짜는 일을 주셨다. 나는 이게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영화 속 배우처럼 속삭였다. ‘이건 기회야… 형님들에게 잘 보일 수 있는 기회!’


영화 '해바라기'의 장면. 형님들에게 잘 보이겠다는 의지가 넘쳐 보인다.


우선 마음을 고쳐먹었다. 잘하려고 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해결 못하는 건 저기 석박사 경력자들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다만 저들이 생각하지 못할 것 같은 부분을 찾아 나만의 방식으로 풀어 보기로 했다. 부담을 내려놓으니 홀가분해졌으며 야근도 밤샘도 크게 힘들지 않게 느껴졌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회의가 열렸고 준비한 아이디어를 쭈뼛쭈뼛 꺼내 들었다. 마치 골목식당에서 백종원 아저씨의 시식 평을 기다리는 기분. 그리고 긴 침묵 후 돌아온 대답.


‘이거 좋은데?’
‘이거 재밌네요.’


그토록 듣고 싶던 한마디. 이 짧은 한마디에 심장이 빠르게 뛰고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드디어 이 회사에서 작은 부품으로써 당당히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아이디어가 채택되었고 준비 끝에 결국 PT에서 승리했다. 그 뒤로 나름대로 인정받으며 계약을 연장하게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히 잠시 머물다 스쳐 가는 수많은 인턴의 재계약 이야기지만 그 계약서는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해주는 증명서였다. 그렇게 반년을 일하고 복학을 위해 퇴사를 했다. 그리고 아직도 퇴사 날을 잊지 못한다. 내가 떠남으로써 아쉬워하고 응원해주는 사람들. 그때 든 생각. ‘아, 나는 나름 괜찮은 부품이었구나.’ 단순히 6개월짜리 인턴 체험일지 모르지만 내 존재 이유를 찾는, 내가 이 일을 계속해도 괜찮고 여기에 어울리는 사람이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 뒤로 여러 회사에서 일하며 이때의 두근거림을 기억하며 용기를 얻곤 했다.

돌이켜 내 문제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본다면 업무의 미숙함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잘하고 싶어 하는 간절하고 어설픈 마음이라 생각한다. 지나치게 분주한 마음은 부담감이 되었고 부담감은 실수를 일으켜 열등감이 되었다. 큰 성과를 내면 정말 좋겠지만 모두가 좋은 성과를 낼 수 없다. 특히 인턴은. 오히려 나만의 무기가 무엇이며 그것으로 어떻게 저들의 허를 참신하게 찌를 것인지, 제법 괜찮은 사이드 킥이 되려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고민을 해보는 것.

‘잘하는 것’이 아닌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아는 것’. 여러 차례 인턴을 하며 느꼈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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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솔(돈까솔)

광고를 하고 돈까스를 좋아합니다.
시각디자인 영역에서 크리에이티브라는 건강한 조미료 한 스푼을 더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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