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 지안이는 벌써 6살이다. 어수선한 시국에도 어김없이 아이들에겐 크리스마스가 찾아왔다. 지안이네 가족은 이동 중에 자동차 안에서 25일 밤을 맞이하게 될 예정이었다. 누나는 지안이가 '밤중에 차 안에서 산타할아버지를 보겠다'며 무척 설레 해 하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나와 아내는 그 말을 전해 듣고 지안이의 순수함과 귀여움에 감탄하며 웃음지었다. 그리고 내가 말했다.
“산타가 있다고 믿는 건 올해가 끝이지 않을까?”
아내가 말했다.
“그래도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믿지 않나?”
이런저런 내 어린시절을 떠올리며 산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아내가 다시 물었다.
“나훔이가 만약 선생님이라면, 애들이 산타가 진짜 있냐고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할 거야?”
몇 초 정도 고민하다가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음- 믿는 사람한테는 있고 믿지 않는 사람한테는 없다고,
그 다음에 '선생님은 믿고 있어요'라고 말할 거 같아"
그런 말을 하고 나서 나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왜냐면 그 말이 내가 믿고 있는 삶의 방식에 대한 솔직한 답변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엉뚱한 곳에서 깨달음을 얻은 기분이었다. 물론 난 산타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신이라던가 삶의 바깥에 어떤 우리 상식 밖의 놀라운 세계가 있다고는 늘 믿고 있기에 그렇게 말했다.
예전 최혜진 님의 저서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에서 한 작가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영국인이었고 어머니는 스웨덴인이었는데 두 나라 모두 마법사랄지 엘프, 트롤, 정령 같은 환상 세계를 존중하는 문화의 나라였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작가는 영국에 가서 “에이, 요정이나 엘프가 어딨어. 다 지어낸 거지”라고 말하면 아마 죽음의 위협을 느낄 만큼 강렬하게 쏘아보는 눈빛들을 만나게 될 거라고 말했다. 심지어 그녀의 아버지는 식사할 때 음식을 싹싹 긁어먹지 말고 집에 사는 요정들을 위해 조금 남겨두라고 했다는 부분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우리 부모, 선생님들은 농민의 피땀이라고 한 톨도 남김없이 긁어먹으라고 했다.) 유연한 사고, 우리가 사는 세상 저 너머에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을지 모른다는 상상. 누군가에겐 멍청한 소리일지 모르지만 그 여지는 얼마나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가. 실제로 그녀는 현재 수많은 그림책을 만들어 전 세계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고 그녀의 자녀(사춘기의 10대 남자아이)와도 몹시 수평적이고 완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책을 덮고 가만히 생각해봤다. 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조언들 사이에 둘러싸여 사는 동안 얼마나 행복했나. 어릴 때부터 안정적이고 현실적인 진로에 목을 매는 어른들과 아이들… 나도 20대 후반까지는 지극히 현실적인 꿈을 꾸면서 살았다. 특히 시간을 쪼개 목표를 정하고 자기 계발을 하며 사는 사람들만을 옳은 삶이라 여기고 반복되는 패턴으로 직장생활을 하거나 퇴근 후 로또를 사는 사람들을 한심한 사람 취급했다. “어차피 당첨되지도 않을 거, 저런 무의미한 일에 매주 돈과 시간을 쓰다니…” 그야말로 어느 순간 젊은 꼰대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2017년 내 꿈, 진로,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게 그리고 위태롭게 고민하던 그 시기에 타인의 삶에 대해서도 입장을 바꿔 생각하게 되었다. 그림이 팔릴 거라는 기대, 주식이 오를 거라는 기대, 집을 살 거라는 기대. 결국은 각자가 오늘과 다른 내일에 대해 꿈을 꾸며 살아가고 있었다. 설령 그 확률과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더라도... 그 시기 로또를 호기심으로 한 번 사본 적이 있는데 그때 느꼈다. 로또를 산 사람들은 당첨 발표날이 아니라 그 전 날까지의 두근거림으로 일주일을 사는 거라고… 난 그 본질이 산타를 믿는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혹은 타인에게 성공 확률에 대해 묻는다. 나같이 아무도 기대하지 않을 그림을 그리며 몇 년을 사는 사람에겐 이제 그런 질문조차도 물어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현실성과 확률에 대해 물어오는 사람이 있다면 난 “믿는 사람에겐 존재하고 믿지 않는 사람에겐 존재하지 않아’라고 말하지 않을까 싶다. 삶의 끝에 다다러 죽음의 순간 ‘우리 인생 자체가 꿈이고 판타지였구나-’ 생각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