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을 5년 다니다가 회사에 오니, 공부가 하고 싶어서 대학원에 가고 싶다는 디자이너들을 자주 만난다.
그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두 가지다.
너무 여러 번 말하다 보니 입이 아파 한 번 글로 그간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느낀 점, 그리고 그만둔 이유까지 풀어보고자 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임을 앞서 밝혀둔다. HCI, 그중에서도 개선이 아닌 선행 연구를 하는 디자인 리서처로서의 관점을 담았다.
정확히는, 대학원을 그만둔 것(자퇴, 혹은 퇴학)이 아니라 박사과정 3년 차부터 무기한 휴학을 하고 있다. 그만둔 이유를 이야기하려면, 역시나 처음까지 되짚어봐야 할 것이다. 나만의 이력도 역사처럼 과거와 미래가 있으니 말이다.
석사 연구를 시작한 첫 해, 나의 지도교수님은 그 당시에 한국에 출시도 되지 않은 아마존의 알렉사, 구글의 구글 어시스턴트를 구해다 주시면서, ‘이걸로 디자인 연구를 해봐라.’ 하고 IoT 제품 두 개를 숙제처럼 던져주셨다.
지금이야 도처에 널린 것이 인공지능 스피커지만, 당시에는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었고, 당연히 관련된 디자인 연구도 거의 없었다. (지금은 포화 상태라고 생각한다.) 나와 연구실 동료는 스피커를 써보기도 하고, 뉴스도 찾아보고 하면서 인공지능 스피커의 ‘사람스러움'에 주목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빅스비든, 알렉사든, 클로바든 인공지능 스피커는 사람의 목소리로 말하게 되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진짜 기계이든 아니든 그 목소리에서 ‘사람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Clifford Nass, Wired for Speech)
나는 인공지능의 사람스러움을 ‘성격'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하고자 했다. 종종 사람들은 성격을 ‘인간의 고유한 성질’을 설명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성격은 개인의 행동을 설명하는 도구지만 인간성과 (인간의 유일성 어쩌고..) 같은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오늘날 말하는 성격의 개념은 주어진 상황에서 특정 대상이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하는 도구다. 단순화하면, 인과관계가 두 가지 행동이나 말을 연결 지어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지인끼리 모였을 때(특정 상황), 항상 구석에 앉는 사람(특징 1)은 말 수가 적을(특징 2) 확률이 높다. 이렇게 연관성이 높은 행동을 모아 ‘내향적인 성격'이라는 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성격 이론이 Big5(OCEAN), 그리고 널리 알려진 MBTI이론이다.
같은 원리로, 비슷한 행동을 하는 동물의 행동을 모아 성격 체계를 만들 수 있다. 물론 사람처럼 내향적이다, 외향적이다, 창조적이다, 같은 특성으로 나누지 않는다. 예를 들면 고릴라의 경우에는 공격성을 기준으로 나눌 수 있다. 나의 석사 연구는 인공지능 스피커의 행동 방식에 인간의 성격이라는 체계를 적용하고, 그리고 출시된 스피커들을 이 개념을 토대로 분류하고 평가하는 작업이었다.
석사 연구의 졸업논문 심사에 참가했던 교수님은, 심사 마지막에 이런 코멘트를 하셨다. “네가 한 연구는 흥미롭다. 특히 인공지능이 단순한 대답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개인화되어 다양한 성격을 표현해야 할 텐데, 이 방법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도 생각해보면 좋겠다. 인공지능이 왜 ‘사람 같음’이라는 성질을 가져야 하는지? 그것이 꼭 필요한지 말이다. 나도 정답을 모르지만, 박사에서도 같은 주제로 쭉 끌고 간다면 이 부분에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처음에는 그냥 재밌는 관점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박사과정 내내 이 문제는 나를 괴롭혔다. 디자인 논문은 result만큼이나 논문의 필요성과 이 지식이 등장해야 되는 개연성을 설명하는 역량이 강하게 요구된다. 나는 연구에서 다양한 성격을 사용하고 싶은 사람들의 니즈와 스펙트럼이 좁은 인공지능의 현주소(무조건 친절하고, 여자 목소리에, 노잼 성격)를 지적했고, 이를 풀어내기 위한 기술적 방법도 중요하지만 디자인적 프레임워크와 방법론 또한 필요함을 어필하고자 했다.
그러나, 왜 ‘사람 같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 필요한지’는 적지 않았다. 아니 적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원해서'는 답이 아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경험이 좋은 경험은 아니니까. 기숙사 옆 방 사람이 궁금하다고 해서 페이스북을 만들어 전 세계를 연결해야 했냐는 질문에 나는 글쎄..라고 대답하고 싶다.
말 그대로 정답이 없는 문제였다. 관련해서 나온 논문들도 대부분 이미 있는 스피커를 어떻게 더 사람같이 만들지, 혹은 어떻게 활발한 혹은 우울한 성격으로 만드는지, 유쾌한 성격을 부여했을 때 사용자는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한 연구였다. ‘사람 같은 스피커는 필요 없을지도 모르니 없애자’는 과격한 주장까진 아니더라도 필요성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연구는 거의 없었다.
이 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나를 너무 고통스럽게 했다. 이 연구가 필요한지 알 수 없으니 글을 적어 내려 갈 수도, 연구가 진척이 되지도 않았다. 결국 인공지능이나, 디자인보다는 약간 철학적인 물음에 빠져 살게 되었다. ‘사람 같음이란 뭘까’, 그리고 ‘사람 같은 비-인간과 인간은 어떻게 어울려지내야 할까?’, ‘잘 어울려 지낸다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을 더 많이 했고 이를 매체로 다룬 책(주로 철학), 영화, 글을 탐닉했다.다행히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을 한창 하고 있을 무렵, ‘인공지능의 ‘사람 같음'이 느껴지는 것은 맞지만, 그들과 사람의 관계는 사람-사람 관계와는 다른 고유한 것으로 재정의되어야 한다.’는 주장의 논문이 나왔다.(What Makes a Good Conversation?) 나는 이 논지의 주장에 동의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재정의할 것인가?’에 집중하면 될 터였다. 그렇게 박사 연구의 주제를 사람의 목소리를 빌린 ‘말하는 인공지능'의 한계를 지적하고 음성 인터페이스 고유의 성격 프레임을 재정의하는 방향으로 잡아가고 있었다.
대학원을 나온 이유는 그다음 문제 때문이었다. 이 무렵 나는 디자인 논문에서 만들어내는 하는 더 좋은 경험의 사용자를 위한 지식이 실제로 사용자에게 전달되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이 시기에 알게 되었다. 이렇게 치열한 고민을 끝에 만들어낸 지식은 결국 논문이라는 형태로 가공되어 ‘학회’를 통해 전달되는데, 바쁜 현업의 사람들은 디자인 학회에 대부분 참석하지 않는다. 유수 대기업의 총책임자도 디자인 학회의 존재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업계 관계자 열에 아홉은 논문을 보지 않는다.
디자인 리서치가 액션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어떠한 경험을 제안하더라도 그것이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나는 디자인 리서처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졌다. 답은 ‘아니’였다. 그렇게 난 대학원을 나와 회사로 왔다.
결국 대학원을 그만둔 이유는 연구가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연구는 내 적성에 아주 잘 맞았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디자인 프로세스를 통해 정답을 찾아가는 행위. 그리고 그 결과물을 글로 정리하는 것. 나는 글쓰기도 좋아하고, 내 생각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행위 자체도 즐긴다. 게다가 디자이너로서 내 능력도 손 끝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감각보다는 문제를 이해하고 본질을 파악하는 분석 능력이 더 뛰어나기 때문에, 그래픽으로 결과물을 꼭 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무척 매력적이었다. 결정적인 증거로, 지금도 회사에서 돈을 받으면서 디자인 연구를 하는, UX 리서처로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박사과정은 디자이너로서 ‘나만의 관점’을 가지게 해 준다. 세상에 있는 지식이 아니라 내가 치열하게 고민해서 만든 나만의 관점을 만드는 시간이다. 이것은 어느 연구 분야의 대가가 되냐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특정 분야를 잘 알게 되거나 잘 ‘하게' 되지만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일 뿐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대학원을 올 필요는 없다.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고 싶다면 그냥 시간을 들여서 필요한 논문 몇 개를 읽어보거나 좋은 강의(요즘은 양질의 강의가 너무 많다.), 책을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연구라는 과정은 본질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헤매는 것에 중점을 둔다. 중요하지 않는 논문, 전혀 상관없는 지식, 앞으로 나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일련의 행동, 이른바 ‘뻘짓’을 하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경험은 적은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과 같아서 처음 지식을 습득하면서 어린이가 되어가는 것부터 무언가 깨달음을 얻는 노년까지의 과정이 압축되어있다. 이 과정을 통해 온전히 나만의 경험을 가지게 된다.
네이처지가 아니라 그런 것인지, 현업에서 아무도 읽지 않는 디자인 논문들의 처참한 조회수를 보면서 학과의 교수님들에게 논문을 왜 쓰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투덜댄 적이 많다. 석사 지도 교수님인 이건표 교수님은 박사에 들어가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요새는 사람들이 박사과정의 결과물인 논문만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경우가 많은데, 박사과정의 진짜 결과물은 논문이 아니다. 그가 정답을 찾기 위해 헤매고 고생한 그 경험, 그 자체다. 말 그대로 박사’ 과정'인 것이다.
철수와 영희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은 이름이나 성, 직업이나 주소 같은 ‘꼬리표'로 단순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이 겪어온 경험과 그 역사 자체다. 이는 한 두 마디 말로 쉽게 설명할 수도 없고, 쉽게 어필될 수도 없다. 그러니 대부분의 (나를 포함한) 박사과정은 종이 몇 장으로 끝나는 논문에 몸을 매달면서 무한한 우울감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직장에 오니, 공부가 하고 싶어서 대학원에 가고 싶다는 디자이너들에게 나는 그들이 말하는 공부가 지식의 습득이라면, 대학원은, 특히 박사과정은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고 조언을 해준다. 하지만 너만의 관점을 가지고 싶고, 누군가가 말하는 정답이 아니라 나만의 주장을 가지고 싶고, 이를 위해 기꺼이 헤매는 고통의 과정을 겪고 싶다면 기꺼이 가라고 말한다.
대학원을 거쳐 회사로 온 것은 나만의, 개인적인 선택이다. 디자이너가 서 있는 곳이 어디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본질은 주어진 무기가 디자인 연구든, 피그마든 사용자를 ‘사람'으로서 이해하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다. 회사에 있다면, 팀의 비즈니즈 목표를 떠나 ‘좋은 사용자 경험을 위한 나만의 관점(특히 접근성 이슈가 그렇다)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좋다. 학계에 있다면, 자신의 연구가 어디에서 가장 빛을 발할지 고민하고, 계속해서 학계 내외로 자신이 만든 지식의 가치를 알리고 그 가치가 누군가의 경험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내가 존경하는 선배님들은 이 길을 걷고 계시다. 리스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