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클

23. 오랑주리 미술관, 앙리 루소

김나훔| 2022.08.23

둘째 날엔 파리의 여러 미술관을 다녔다. 이 날은 L 누나와 함께였다.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오래 남은 미술관은 오랑주리 미술관이었다. 전시에 대한 내 감상을 적기 전에 간단하게나마 내 당시 상황을 적어본다.

비전공자로 컴퓨터를 사용해 그림을 시작한 나는 매번 전통 미술에 대한 거부감 혹은 성역시 되는 그 세계에 다가가는 일을 부담스럽게 여겼다. 그건 규율, 전통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일 수도 있고 과거 몇 번의 경험으로부터 축적된 트라우마 탓도 있을 것이다. 난 20대 시절 대부분을 회사생활을 하면서(돈을 벌면서) 그림을 그렸다. 다시 말해 성인이 되고서도 전문적인 교육을 받을만한 시간적 비용적 여유가 없었다는 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설프게 전통의 방식을 쫓기보단 원시적으로 나만의 길을 홀로 파는 것이 창작가로서 현상황을 타파하는 올바른 자세라고 믿어왔다. 지금도 그 생각을 완전히 놓았느냐고 하면 그렇지 않지만 그 전까지의 나는 양옆의 시야를 눈가리개로 가린 말처럼 극단적 무지와 고집으로 내 길만을 응시하면서 창작을 해왔다. 그렇게 좁은 시야로만 내달리다 보니 당연히 불안도 친구처럼 내 안에 함께했다. 그렇게 수년간을 살다가 서른이 넘어서야 전통미술의 도시 파리에 오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는 내가 파리에 온 이상 당연히 파리의 미술관들을 필수코스로 정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자연스럽게 뮤지엄 패스나 추천 미술관들을 내게 소개했다. 하지만 그 시기의 난 진로를 바꿀 생각까지 할 정도로 예술에 대한 마음이 닫혀가던 상태였고 파리에 온 목적은 그저 타국에서 살고 있는 내 사람들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내내 먹고 자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빈 시간을 채울 뮤지엄 패스를 구입했던 것이다. '뻔할 거야, 그래도 그냥 한 번 가보지 뭐...' 처음엔 그렇게 생각하며 뜨뜻미지근한 태도로 미술관을 향했다. 하지만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다.

첫날 오르세 미술관에서 압도될만한 유럽 미술의 전통과 규모의 힘을 느꼈다면 둘째 날 오랑주리 미술관에서는 근대 미술이 주는 편안함과 여유의 힘을 느꼈다. 다른 미술관에 비해 과하게 작품수가 많지 않았고 관람의 균형이랄까... 흐름과 호흡이 좋았다. 1층 벽 전체를 두른 모네의 대작 수련은 미술을 감상한다는 느낌보다는 자연 속 정원에 들어와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천장에서 내려오는 자연광과 가운데 앉아 쉴 수 있는 벤치는 그 착각에 힘을 실어줬다. 사람의 마음을 편안히 감싸안는 것. 좋은 미술이란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클로드 모네의 대작 '수련'


지하층에는 여러 인상주의, 근대 화가들의 그림을 만날 수 있었다. 적당한 규모와 공간, 그에 알맞게 전시된 그림들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그림을 천천히 감상하고 있는데 L누나가 갑자기 그림 하나를 가리키며 내게 말했다.

"루소를 나훔이가 좋아할 것 같아."

그렇게 말하고는 누나는 다른 그림 쪽으로 이동했다.


앙리 루소의 '쥐니에 신부의 마차' (1908)


다가가 보니 독특한 채색 방식과 구도, 인체 비율이 눈에 띄는 앙리 루소의 그림이 있었다. 이전에도 이름은 들어보았지만 그의 작품을 유심히 보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 마주친 그림은 빨간 원피스를 입은 아이가 등장하는 '인형을 가진 아이'였다. 커다란 얼굴에 비해 자그마한 손, 어정쩡한 포즈의 다리, 묘한 표정... 어디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지만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림이었다. 흥미를 느낀 나는 서둘러 들고 있던 오디오가이드를 재생시켰고 천천히 그의 세계에 매료되었다.



누나가 찍어준 나


루소는 세계 미술사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이력을 자랑하는데 그 부분이 내가 가장 그를 사랑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그는 통행료를 징수하는 일을 하면서 동시에 그림을 그렸다. 하루 일과가 가만히 앉아 세금을 걷는 일이었던 이 말단 공무원은 묵묵히 자신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는 41세가 되던 해 공식적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49세가 되어서야 세관 일을 그만두고 전업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시기 많은 사람들은 그를 아마추어 화가, 일요(주말) 화가, 세관원이라며 비아냥댔다. 그럼에도 독학으로 미술을 하던 루소는 "자연보다 나은 스승은 없다"라고 말하며 자신만의 길을 걸어갔다. 놀라운 사실은 그의 그림 요소 대부분이 상상에서 끌어온 것이며 이국의 식물들은 프랑스 밖을 한 번도 나가지 못했던 그가 주변 식물원이나 책을 참고하여 그렸다는 것이다. 처음 전문가들은 루소의 그림은 비율이 맞지 않고, 구도도 엉터리라고 하며 그를 흠집 냈다. 그는 어떤 예술운동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았다. 실제로 내 앞에 있던 그림 속 인물들과 풍경은 어딘지 그 비율이 제각각으로 보였고 그 전경이 내겐 몹시 개성 있게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방식을 굽히지 않았고 끝내 기다려온 성공을 살아생전에 맛볼 수 있었다.


앙리 루소의 '알 프로빌의 의자공장' (1897)


그의 삶에서 커다란 위로와 동시에 전율을 느꼈다. 돌이켜보면 그 순간. 닫혀가던 예술에 대한 내 마음이 다시금 열리기 시작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니, 사실 루소의 삶에서 발견한 것은 단순히 예술가가 가져야 할 태도라기보단 인간이 태어나서 죽음으로 가는 여정에 반드시 가져야 할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한히 팽창 해나가는 발전 속에서 사람들은 원시적인 것이 나쁘다고 하지만 우릴 웃게 하는 행복의 근원은 결국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그 원시적인 흥미, 재미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미술이나 문학이나 그 모든 인간의 창작과 실험활동은 살면서 맞닦뜨리는 외적인 환경과 시선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발버둥 같은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루소는 자신이 추구하는 근원적인 삶을 위해 평생을 내달린 예술가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지금 난 루소의 이름을 들으면 노인의 모습이 떠오르기보단 겁 없이 내달리는 순수한 아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리고 이내 마음이 두근거린다. L누나는 이런 나의 반응을 예상했을까? 그렇든 그렇지 않든 그녀는 나에겐 은인이다.

피카소는 루소의 원초적이고 신비한 작품들을 보고 때 묻지 않은 순수한 그림이라고 했다. 이는 당시 피카소가 원시 민족을 다룬 그림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새로운 예술을 찾기 위해 잊으려고 노력했던 지식이 없는 그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는 루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미술가는 더 이상 전통 안에 살지 않고, 각자 자신의 표현 방법을 창조해야 한다. 모든 근대 미술가는 자신만의 어휘를 A부터 Z까지 창조할 권리를 가진다."



그렇게 미술관을 나와 근방을 L누나와 함께 걸었다. 미술관 앞에는 커다란 관람차가 있었다. 하늘을 나는 비둘기들이 보였고 덕분에 파란 하늘도 넓게 둘러보았다. 한 동안 전시의 여운이 마음에 남았다. 내 주위를 감싸는 이국적인 풍경과, 그 속에서 표류하고 있는 듯한 내 삶이 초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난 무엇을 그렇게 눈치 보며 살아왔나. 진짜 나다운 삶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답이 없는 질문을 계속해 되뇌며 파리 시내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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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훔

[뭐]저자
사진과 글, 그림을 그리는 김나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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