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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메디치 전선의 형성

노인영| 2022.06.27

피렌체에서 남서쪽 50km 떨어진 토스카나 지방의 부속 도시 볼테라(Volterra, 제목 사진)에서 명반 광산이 발견되었다. 광산 개발에는 1462년 먼저 교황청이 참여하였고, 1년이 지나지 않아 메디치 은행이 광산 운영사업에 뛰어들었다. 명반은 유리와 가죽 그리고 직물 산업의 중요한 원자재로, 오스만 제국에서 주로 생산되었다. 그러나 제국의 수출 통제와 제노바의 독점권이기 때문에 이탈리아반도 내 공급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교황청도 명반 사업의 이해 당사자였다. 이교도 오스만 제국의 명반 수입 금지 조치를 하면서 제노바의 독점권을 보장해주는 대가로 일정액의 수수료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볼테라 시민들은 광산 개발에 따른 이익을 독점하길 원했다. 조합과 볼테라 자치정부 간 갈등이 조장되었고, 중재자로 나섰던 로렌초는 조합에 광산 통제권이 있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사태는 폭력과 폭동으로 번졌으며, 1472년 6월경 볼테라는 차제에 피렌체에서 분리 독립코자 하였다. 반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자칫 다른 소도시로 확대될 것을 염려한 스물세 살 로렌초는 볼테라 주교와 피렌체 공화국 정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진압을 결정했다. 우르비노 백작이 된 페데리코가 이끄는 용병이 한 달간 포위 끝에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군대가 입성하는 과정에서 우발적인 충돌이 발생했고, 용병들이 약탈과 함께 수백 명의 볼테라 시민들이 죽거나 다치게 했다.


로렌초의 리더십이 시험대에 오르던 1478년 4월 26일 일요일, 파치가(家)의 음모 사건이 발생했다. 교황 식스토 4세의 묵인하에 저질러진 이 사건으로 인해 메디치 가문과 피렌체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급속히 휘말린다. 음모는 파치 가문이 주도하였고, 교황의 조카인 리아리오 가문과 피사 대주교 프란체스코 살비아티가 동참했다. 로렌초와 공동 통치자인 동생 줄리아노를 대성당 일요 미사를 틈타 죽이려 하였다. 교황의 용병 몬테세코가 “살인에 신성 모독을 더 할 수 없다”며 동참을 거부하자 두 사제 안토니오 마페이와 스테파노 다 바뇨네로 대체되었다.

스물다섯 살 줄리아노가 살해됐다. 로렌초도 칼에 찔렸으나 죽음을 모면했고, 성구실로 피신한 후 주위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귀가했다. 이로써 암살과 동시에 페루자에서 데려온 용병들이 정부청사 시뇨리아 궁을 장악하려던 그들의 음모는 물거품이 되었다. 쿠데타 실패 소식이 피렌체 전역으로 퍼졌다. 외국군까지 동원했다는 사실에 시민들이 분노했다. 피사 대주교와 주동자들을 샅샅이 색출하여 처형했다. 시의 경비 부담으로 바르젤로 담장에 반란을 일으킨 자들의 교수형 장면을 묘사했다. 그러나 교황 식스토 4세(재위 1471~84)는 오히려 피사 대주교의 죽음에 분노했다. 메디치 가문과 피렌체 공화국에 대해 파문과 성무 금지령(침례식과 고해성사를 제외한 모든 예배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메디치 은행의 로마지점을 비롯한 메디치 가문의 모든 재산을 몰수한 후 피렌체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이렇게 시작된 피렌체 전쟁은 1478년에서 1480년까지 2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로마와 나폴리 뿐 아니라 시에나와 루카, 그리고 우르비노 등이 교황의 부름에 응했다. 피렌체 공화국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다. 로렌초로서는 외교전 외 다른 대안이 없었다. 프랑스와 베네치아, 밀라노 등 이탈리아반도 내 여론을 교황에게 불리하게 흐르도록 애썼다. 특히 1479년 12월 18일 단신으로 교황 편에 섰던 적국 나폴리에 들어가 국왕 페르디난도 1세와 담판 지었다. 이때 로렌초의 기지와 뛰어난 외교력으로 3개월 만에 국왕은 피렌체를 가치 있는 우방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나폴리와 강화조약을 맺고 돌아온 로렌초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외톨이가 된 교황은 어쩔 수 없이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이 성사된 외부 배경에는 오스만 제국이 (장화 모양의 이탈리아반도 뒤축 끝부분에 해당하는) 오트란토를 점령한 점이 작용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오스만 메흐메트 2세가 세르비아, 보스니아, 알바니아, 그리스를 차례로 굴복시킨 후 이탈리아반도로 정복의 방향을 돌리자 교황은 기겁했다. 피렌체는 오스만 제국의 군대를 반도에서 몰아낼 때까지 15척의 갤리선으로 구성한 함대를 유지하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이유를 막론하고 이때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막강해진 메디치 가문에 대한 정치적 도전 행위가 분명했다.


멜로초 다 포를리 바르톨로메오 플라티나를 바티칸 도서관장에 임명하는 식스토 4세


☞ 교황 앞에 무릎을 꿇은 바르톨로메오 플라티나의 주변에는 모두 교황의 조카들이 서 있다. 서 있는 인물 왼편부터 조반니 델라 로베레, 지롤라모 리아리오이다. 그리고 플라티나의 오른쪽에 서 있는 인물은 추기경으로 서임된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로서, 훗날에 교황 율리오 2세가 된다.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앞에 서 있는 인물은 사도좌 서기관에 임명된 라파엘레 리아리오이다. (출처; 위키백과)


리구리아의 가난한 가문 출신인 식스토 4세는 1471년 교황에 오른 지 몇 달 되지 않아 친인척 조카 6명을 추기경으로 앉혔다. 훗날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그리도록 명령했던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되는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가 그중 한 명이다. 피에트로를 비롯하여 리아리오 가문의 다른 네 명의 조카에게도 추기경으로서 권력과 부를 안겨주었다. 반면 로렌초가 공석이 된 피렌체 대주교에 친동생 줄리아노를 임명해달라고 요청은 거절했다. 대신 1473년 교황은 앞서 추기경이 된 피에트로를 임명했다. 메디치 가문과 피할 수 없는 힘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교황은 가문의 조카 조반니를 성직자가 아님에도 교황령 세니갈리아 군주로 임명한 후 우르비노 공작이던 몬테펠트로 가문과의 딸과 혼인을 주선했다. 또 다른 속세의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에게도 새로운 교황령을 선물할 목적으로, 로마냐의 작은 지역인 이몰라(Imola)를 매입하려 했다. 이번에는 로렌초가 핑계를 대며 자금을 융자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교황은 지롤라모를 밀라노 공작의 사생녀 카테리나 스포르차와 혼인시키는 조건 아래 이몰라 매입에 성공한다. 이때 40,000두카트를 대출해준 곳이 바로 음모를 주도하게 되는 파치 가문의 은행이다. 교황은 융자에 대한 보답으로 메디치 은행을 주거래 은행에서 배제하고 파치 은행에 교황의 수익 관리권을 내주었다.

갈등의 골이 깊어 갔다. 두 사람의 반목은 피렌체 대주교 피에트로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다시 불거진다. 로렌초는 후임자로 처남 리날도 오르시니의 임명을 재차 요청하였으나 교황은 프렌체스코 살비아티를 선택했다. 로렌초는 절차상 하자를 이유로 들면서 신임 대주교의 부임을 막는 것으로 대응했다. 3년간 로마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살비아티는 앙심을 품었다. 파치 가문이 음모를 선동할 때 살비아티 가문을 비롯하여 리아리오 가문과 교황 식스토 4세가 자연스럽게 공모하는 원인으로 작동했다. 이외에도 전쟁으로 치닫기까지는 많은 요인이 작용하였다. 그러나 음모 사건과 전쟁은 결과적으로 파치가가 피렌체에서 쫓겨났고, 로렌초의 정치적 영향력은 대폭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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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영

미술과 과학사를 중심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인문학 지식을 버무려 이 다음에 아이들이 읽을 내 일기처럼 글을 올립니다. 여러분의 영혼에도 작은 울림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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