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클

교황령의 탄생과 전개 과정

노인영| 2022.06.20
프란체스카,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부부의 초상>


우르비노의 궁정화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1416?~1492)는 1430년대 피렌체에서 활동했다. 그는 브루넬레스키의 원근법, 마사초의 부피감, 도나텔로의 사실주의 등을 배우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유일한 ‘딥틱’(diptych, 둘로 접을 수 있는 목판 聖像畵)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부부의 초상> 속 인물의 생김새가 모두 특이하다. 군주 페데리코는 못생긴 매부리코이고, 아내 바티스타 스포르차의 얼굴은 지나치게 창백하다. 여기엔 깊은 사연이 숨어 있다.


서자로 태어난 페데리코는 22세에 우르비노 백작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우르비노는 빚더미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따르는 300명의 기사와 함께 비싼 몸값을 받고, 명분 불문한 채 무차별적으로 전투를 벌였다. 당시는 용병의 시대였다. 몸값 중 일부는 싸우다 죽은 부하들의 가족을 돌보는 데 썼다. 따라서 전우애로 하나가 된 그의 부대는 단 한 번도 패배를 몰랐다.
1472년 그는 피렌체의 로렌초 편이 되어 볼테라 반란을 평정하였다.1474년 그의 나이 52세가 되든 해 교황 식스토(식스투스) 4세는 그간의 공로를 치하하며 로마교회 군대 수장과 함께 공작의 작위를 내렸다. 당연히 우르비노는 공작령으로 격상되었고, 강력한 군사 외교 강국으로 부상했다. 딸을 교황의 조카와 결혼시켰으며, 1478년 벌어진 피렌체와 전쟁 때는 교황의 편이 되어 로렌초의 군대와 싸웠다.


우르비노, 피렌체 오른편에 위치하며 지금도 아름다운 중세풍의 고도(古都)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페데리코는 스물여덟 살 때 마상 대회에서 오른쪽 눈이 으깨지고 안면부에 큰 흉터를 남기는 상처를 입었다. 후에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코의 윗부분을 절단하는 수술을 했는데, 전투를 위해 스스로 그랬다는 설도 있다. 화가 프란체스카는 이 훌륭한 군주의 애꾸눈을 숨겨 주기 위해 성한 눈만 보이는 측면 초상을 그렸다. 그는 첫 번째 부인과 사별 후 바티스타와 재혼했다. 바티스타는 당시 13살로, 24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한 결혼이었다. 그녀는 스포르차 가문의 전통에 따라 외국어를 비롯해 인문학적 교육을 받은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남편이 자리를 비운 우르비노 공국을 현명하게 다스렸다. 그러나 딸 6명을 낳고 1472년 뒤늦게 아들을 얻은 기쁨도 잠시, 6개월 후 스물다섯의 나이에 그 후유증(폐렴)으로 세상을 먼저 떠났다. 페데리코는 사랑하는 아내의 데스마스크를 떠서 초상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그림 속 그녀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다.

라파엘로,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초상화(1515)>

페데리코는 이후 10년을 재혼하지 않고 내정에 전념했다. 명상과 사색을 하면서 우르비노를 문화 강국으로 이끌었다. 그의 통치 시기에 우르비노에서는 건축가 브라만테가 활동했고, 페데리코가 죽고 1년 후 라파엘로가 태어났다. 라파엘로가 그린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의 초상화]는 1911년 루브르에서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도난당하자 그 공간을 대신했던 작품이다.
카스틸리오네는 훗날 베스트 셀러 [궁정인]에서 ‘이탈리아의 빛’으로 불린 페데리코의 면모를 싣는다. 만토바 출생인 그는 우르비노에서 페데리코의 아들 구이도발도 다 몬테펠트로를 보필한 경험이 있다. 궁정인은 르네상스 시대 이상적인 귀족상을 제시하는 글로, 피렌체나 베네치아보다 상대적으로 작은 우르비노 공국이 무대 배경이 된 데에는 페데리코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페데리코의 스투디올로 (Studiolo, 작은 서재) 벽에는 그가 추구했던 인생관이 쓰여 있다.


“모든 이탈리안의 위대한 지도자 페데리코, 밖에서는 전쟁하고 안에서는 학문에 정진한다.”


당시 우르비노가 교황령이었다. 따라서 교회령이라고도 하며 로마 교황의 세속적인 지배권이 미치는 영토이다. 영적 구원자 역할과 더불어 적어도 교황령 내에서는 지주 혹은 영주의 임무를 수행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관한 명확한 인식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 이탈리아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대립과 종교 개혁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서기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유럽은 게르만족 계열의 부족들이 300년 이상 지배했다. 그들은 기독교를 신봉했으나 당시에는 교회령이라 부를 만한 별개의 영토가 없었다. 기부에 의해 형성된 사유지가 전부였다. 그리고 이때는 클로비스가 창건한 메로빙거 왕조(481~751)가 있었으나 공식적으로 독자적인 왕국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동로마(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지역 내 게르만족 분파의 실권자를 로마 공국의 총독으로 승인해주는 형식을 취했다. 서로마를 멸망시킨 오도아케르는 물론, 그를 물리치고 동고트 왕국의 초대 국왕 테오도리쿠스가 모두 그랬다. 다른 한편으로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나르세스로 하여금 로마를 되찾고 라벤나 총독으로 임명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런 직할 체제는 로마 공국이 콘스탄티노플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세월이 흐를수록 실효성을 상실했다. 따라서 궁여지책은 계속 유지되었다.

이런 면에서는 로마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황제 예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관리 감독하에서 로마 교회가 운영되었다. 그러나 황제의 영향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기독교로 하나가 된 대륙에서 로마 주교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로마 공국에 대한 실질적인 영향력도 로마 주교가 행사하게 되었다. 568년 알보인이 이탈리아반도 북부에 랑고바르드(Langobards, 롬바르드(Lombards) 혹은 롱고바르드(Longobards)라고도 불린다) 왕국을 세웠다. 그리고 751년 라벤나 총독부를 점령하고, 공국의 또 다른 주요 도시 로마에 압력을 가했다.
반복하건대 형식상 실권자가 바뀌었을 뿐이지 여전히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다. 그러나 같은 해 로마 주교 자카리아는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국왕 힐데리히 3세의 수도원 유폐를 방관한 채 카롤링거 왕조(751~987)를 출범시킨 피핀 3세의 정권을 승인했다. 자카리아는 그리스인으로 황제의 승인을 받은 마지막 교황이었다. 그런 그가 쿠데타로 이룬 왕조의 교체를 승인한 것은 명확한 월권이었다.
당시 로마 교회는 725년 동로마 황제 레오 3세의 성상 파괴령으로 인해 갈등 중이었으며, 새로운 후원 세력이 필요했다. 당시 프랑크 왕국은 오늘날 독일 서부와 프랑스 동부를 포괄하는 나라였다. 교황은 피핀을 새로운 후원자로 받아들여 황제의 울타리를 벗어나려는 용단이었다. 피핀으로서도 영적 지도자인 교황으로부터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했으니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한 일이었다.
752년 3월 26일 새로 선출된 교황 스테파노 2세가 파리까지 찾아가 프랑크 왕국의 피핀을 은밀하게 만났다. 그에게 ‘로마 총독’ 지위를 내리면서 랑고바르도족의 위협과 관련 도움을 요청했다. 피핀은 754년과 756년 기꺼이 알프스를 넘었다. 그리고 랑고바르드족을 격파하고, 옛 라벤나 총독부 영토를 교황령으로 증여하였다. 이 사건을 가리켜 ‘피핀의 기증’이라고 부른다. 이로써 교황수위권(교황이 기독교의 모든 주교 가운데에서 로마의 주교인 교황이 첫 번째이며, 주교들의 수장이라는 가톨릭의 교리)과 함께 군주, 즉 세속적인 영토 주권을 확보하였다. 그럼, 교황령은 과연 행운으로만 작동되었을까?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Charlamagne, 카롤루스 대제, 재위 768~814)는 평생 자신을 교황의 수호자로 생각한 사람이었다. 독일어 못지않게 라틴어도 잘했고 그리스어도 이해했다. 고대의 학문과 예술을 익혔으며 웅변술과 천문학도 배웠다. 그는 독일 동부 지역까지 통일하여 이교도들에게 기독교를 강제했다. 이런 그가 토스카나와 롬바르디아에 있는 여러 도시와 코르시카섬이 포함된 영토의 범위를 성문화하여 다시 한번 교황령을 확인해 주었다. 800년에는 반대파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던 교황 레오 3세를 향해 “교황은 결백하다”고 선언했다.


샤를마뉴의 영토 확장


그해 12월 24일 성 베드로 성당에서 개최된 성탄절 미사가 끝난 후 교황은 뜻밖에 샤를마뉴에게 왕관을 씌워주었다. 동시에 샤를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로마인의 황제’라 칭했다. 그러고 나서 교황은 다른 모든 사람과 함께 샤를마뉴 앞에 무릎을 꿇었으며, 제국의 평화를 위해 신이 임명한 새로운 황제 앞에 충성을 맹세했다. 이것은 서로마제국을 재건하고, 교황이 교회를 보호해주는 군인을 황제로 임명할 권리를 확보하는 일석이조의 조치였다. (에른스트 H. 곰브리치, [곰브리치 세계사]와 앙드레 모루아, [프랑스사])
실질적인 의미에서 초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동로마 비잔틴 제국의 황제에게 공식적으로 등을 돌린 로마 교회의 독립 선언이었다. 샤를마뉴로서는 자신의 힘으로 일군 제국이었다. 순순히 교황으로부터 황제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그로서는 서로마 말기에 살았던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에서 “정의가 없다면, 왕국은 강도 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는 외침을 이해하는 듯했다. (존 허스트, [세상에서 가장 짧은 세계사]) 그러나 어느 역사학자가 샤를마뉴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등극한 사실을 두고 이렇게 평가했다.

“옛날 로마 제국의 시체에서 갈빗대를 빼내 서유럽의 등뼈를 만들었다.”

매우 적절한 비유다. 신성로마제국은 962년에 오토 1세 세의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대가로 교황 요한 12세는 다시 한번 교황령의 독립을 보장받았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프란츠 2세가 제위(帝位)를 물러난 1806년 8월까지 유지되었다. 이렇게 오늘날 선진국들로 이루어진 서유럽은 야만 속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황제와 교황, 그리고 교황령과 제국 사이의 관계가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았다. 따라서 황제와 그의 관여로부터 자유롭게 교회 통치권을 행사하려는 교황 간에 갈등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덧붙여 황제가 자신이 임명하는 주교들에게 봉토를 나누어 줌으로써 상황은 더욱 복잡하게 꼬였다. 작게는 피렌체에서 황제파와 교황파가 권력 투쟁을 벌이고, 크게는 ‘카노사의 굴욕’이라 불리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마찰 원인으로 작동했다.
어찌되었던 르네상스 시대 교황 알렉산데로 6세와 율리오 2세가 영주들과 전쟁을 불사하면서 교황령을 최대로 확장하였다. 그러나 교황 클레멘스 7세에 이르러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교황령을 침공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교황이 신의를 저버린 외교정책으로 인해 젊은 황제 카를 5세가 분통을 터트렸다. ‘로마의 대약탈’이 저질러졌고, 결과적으로 르네상스의 종식을 가져왔다.

19세기에 접어들어 나폴레옹 군에 프랑스에 한때 교황령이 병합되기도 하였으나 그 경계선은 대체로 유지되었다. 하지만 통일을 지향하는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에게 교황령은 장애물로 여겨졌다. 교황의 지배에 반대하여 여러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마침내 1870년 9월 20일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되면서 천 년 넘게 반도의 주요 도시국가 가운데 하나였던 교황령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1929년 교황 비오 11세와 이탈리아 무솔리니 정권 간에 체결된 라테라노 조약에 따라 새롭게 바티칸 시국이 건설되었다. 인구 1,404명(2019년 통계), 0.44km2,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바티칸시국. 교황은 파시스트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까지 제한적인 영토의 주권 회복에 과연 만족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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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영

미술과 과학사를 중심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인문학 지식을 버무려 이 다음에 아이들이 읽을 내 일기처럼 글을 올립니다. 여러분의 영혼에도 작은 울림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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