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나에서 최초로 캔버스에 그려진 작품,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의 [비너스의 탄생]이다. 캔버스 그림은 나무 위에 그리는 패널화보다 비용이 저렴하다. 저택보다는 과시 목적의 사교 모임이 개최되는 별장용으로 적당하여 16세기 중엽부터 [프리마베라(봄)]와 함께 메디치 가문의 시골 별장 ‘빌라 디 카스텔로’를 장식했다. 신화와 신플라톤주의, 비너스의 영적·감각적 속성을 조화롭게 결합한 이상적 인간성을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에인 잭젝, [명화의 재발견]) 한편 이전에는 남성 만을 모델로 하였기에 남성 누드화가 전부였다. 따라서 신화에 기댄 이 작품이 여성 누드화의 전범(典範)이 되었다.
바람의 신 제피로스와 온화한 미풍 아우라가 서로 끌어안고 바람을 불어 비너스를 키테라섬 바닷가로 실려 보낸다. 도착한 비너스는 한쪽 발에 무게를 실은 ‘콘트라 포스트’ 자세와 함께 한 손은 가슴을, 다른 손은 음부를 가리는 ‘정숙한 비너스(베누스 푸디카)’ 동작을 취하고 있다. 비너스의 흰 피부가 마치 조각상처럼 보인다. 특히 검은 선으로 윤곽을 덧그려 인물을 명료케 함으로써 묘한 차가움이 두드러진다. 아니, 벌거벗어 추위를 탄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계절의 여신인 호라이 중 한 명이 몸을 데워줄 붉은 외투를 들고 비너스를 맞이한다. 그 여인은 아무래도 '사랑의 계절' 봄의 여신인 듯하다. 옷을 수놓은 꽃이 모두 봄꽃이다.
그림은 1475년 산 크로체 광장에서 열린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마상대회’라는 제목의 폴리치아노의 시를 형상화했다. 비너스의 모델은 이 대회의 ‘미(美)의 여왕’ 시모네타 베스푸치이다. 제노바 출신인 그녀는 열다섯 살에 피렌체의 유력한 가문인 베스푸치 집안의 마르코와 결혼했다. 베스푸치 집안은 신대륙 아메리카에 이름을 선사한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카르코와 친척 간이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피렌체의 예술가와 인문주의자들이 한목소리로 칭찬했다. 피렌체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미인이라는 뜻이다.
당시 여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던 줄리아노가 보티첼리로 하여금 자기 배너(작은 깃발)에 그녀를 모델로 ‘전쟁의 여신’ 아테나를 그려 넣게 하고 우승 후 공개적으로 시모네타에 대한 애모의 마음을 전했다고 하여 유명하지만, 진위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이듬해 그녀는 스물두 살의 나이로 결핵으로 인해 사망했다. 보티첼리는 이 작품과 함께 [프리마베라]와 [마르스와 비너스]를 줄리아노와 시모네타를 대입함으로써 마상대회를 우의적으로 표현한 연작임을 분명히 했다. 한편 [프리마베라]와 짝을 이뤄 피티 궁전에 소장된 [미네르바와 켄타우로스]는 로렌초가 이룬 나폴리 왕국과의 외교전을 우의적으로 표현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마르스와 비너스(1485?)]와 [미네르바와 켄타우로스(1482?)]
국부 코시모 사후 당시 마흔여덟 살이던 피에로 디 코시모 데 메디치(Piero di Cosimo de' Medici, 1416~1469)가 피렌체 공화국을 통치했다. 소년 시절부터 통풍으로 고생하여 피에로 ‘일 고토소(Il Gottoso, 통풍환자)’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가업은 건강하고 자질 면에서 유능했던 동생 조반니 디 코시모 데 메디치(Giovanni di Cosimo de' Medici, 1421~1463)가 물려받았다.
그러나 사람의 명운은 아무도 알 수 없는 법이다. 건강했던 조반니가 아버지로부터 경영 수업을 받던 중 갑자기 사망하자 병약한 피에로가 은행업까지 떠맡았다. 코시모가 죽기 1년 전 일이고, 조반니의 나이 마흔두 살 때 벌어진 사고였다. 피에로의 경영은 비교적 순조로운 편이었으나 장기간 방치된 불량 대출의 상환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상인들이 파산하고 반대 세력이 늘어났다.
1466년에는 공화국 체제를 복원하려는 루카 피티 일당의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피에르는 주동자들을 모두 용서했다. 사면을 받은 루카 피티는 감동하여 피에로의 평생 친구가 되었다. 한편 디에티살비 네로니와 니콜로 소데리니는 베네치아 공화국을 충동질하여 1467년 전쟁을 불러왔다. 그러나 피렌체는 베네치아 군대를 물리치고 1468년 4월 평화조약을 맺었다. 6년간 짧은 통치 활동을 끝으로 피에로는 1469년에 사망한다. 이어 메디치 가문의 전성기를 일군 장남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가 등장했다. 피렌체 사람들은 그를 ‘일 마그니피코’(Il Magnifico), 즉 '위대한 자'라 칭했다.
로렌초는 1464년 할아버지 코시모 데 메디치 사망 후 플라톤 아카데미의 후원자가 되었다. 회원 대부분은 인문주의자였으며, 예술가로는 학자이기도 했던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와 알베르티 정도가 참석했다. 로렌초의 수양아들인 미켈란젤로는 그의 가족들과 함께 5년을 살면서 피치노가 주도한 논고에도 참여했다. 결과적으로 그에게는 큰 혜택이었다.
토스카나어로 시를 쓰는 예술가이기도 했던 로렌초는 메디치 도서관을 동방의 고전 작품으로 채웠다. 저명한 조반니 라스카리스를 순전히 고대 문헌 발굴과 구매를 위해 동방으로 보냈다. 라스카리스가 두 번째 배를 타고 돌아올 때 200권의 그리스어 서적을 가지고 왔는데, 그중 80권은 당시까지 알려지지도 않은 책이었다. ([메디치 가문]에서 재인용) 그는 공방에서 이 책들을 복사하여 유럽 대륙으로 그 지식을 전파하였다.
그의 후원 아래 마르실리오 피치노, 안젤로 폴리치아노,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 등 인문학자들이 플라톤 이론을 기독교와 접목하려 했다. 그의 궁전에는 15세기 피렌체 르네상스 미술의 시대를 연 예술가로 가득했다. 피에로와 안토니오 델 폴라이올로 형제,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산드로 보티첼리,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코시모 로셀리가 그들이다.
1434년부터 1471년간 메디치 가문이 자선 사업, 건축물, 세금 등으로 663,000 플로린(오늘날 약 4억 6천만 달러)을 사용했다. 로렌초는 가문의 수장이 되면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가문의 재산을 갖다 쓴 막대한 액수를 언급하면서 이렇게 연설했다
"더러는 이런 돈이 있으면, 일부를 때어 지갑에 넣어두는 게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나는 조국 피렌체를 위한 큰 광영이었으며, 그 돈이 잘 쓰였다고 생각해 크게 만족합니다."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