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클

국부 코시모와 피렌체 공의회

노인영| 2022.05.26

회화에서 선 원근법은 단순한 작도법이 아니다. 비례라는 과학적 관찰법과 함께 관점이 신에서 인간으로 옮겨왔다는 의미가 있다. 특히 피렌체에서 시작한 ‘1점 원근법’은 보는 이가 이동하지 않고 고정된 위치에서 바라본 하나의 시선으로 접근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문교육에 포함할 학문과 손을 가지고 하는 일을 구별했다. 이어 ‘손을 써서’ 하는 미술(조형예술이라 바꾸어 부를 수 있으며 회화, 조각, 건축, 공예 등이 포함되어 있다)을 비천하게 여겼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풍조는 후세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중세(Middle Age, 1700년대 역사학자들이 붙인 명칭) 때 ‘예술’이란 기술과 학문을 포함한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미술은 여기에 끼지 못했다. ‘장인’의 것으로 천대받았다.

사람들의 이런 생각을 바꾸어 놓은 곳이 피렌체이며, 르네상스 시대였다. 당시 원근법이 철학적 기반을 갖춘 기하학과 연결되면서 미술이 예술로서, 학문으로 인정받았다. 원근법은 이때를 기점으로 500년간 서양 회화를 지배했다. 그리고 후기 인상주의 화가 고갱은 원근법을 의도적으로 무시함으로써, 세잔은 본질적인 기하학적 이미지, 즉 구형과 원추형 그리고 원통형의 구성을 통하여 자연을 재해석했다. 마지막으로 피카소는 다점 원근법을 사용하여 입체주의를 출범시켰다. 결국, 미술에 있어서 원근법은 사용하거나, 사용하지 않거나 모든 작가가 가장 많이 의식했던 미술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원근법이 사용됨으로써 미술이 예술과 학문으로, 장인이 비로소 예술가로 대접받게 되었다는 점은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14세기까지 화가나 조각가도 길드에 속하지 않고서 일할 수 없었다. 길드의 허락이 있어야 도제 생활이 가능했고, 표준화된 수준에 기량을 맞춰야 했으며, 가격도 따라야 했다. 양모 기술자, 금세공인, 그리고 가구 제조업자와 다를 게 없었다. 이런 상황은 원근법을 사용하여 월등하게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는 장인들이 나타나면서 바뀌었다. 그들은 계약에 있어서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그리고 변화의 중심에 선 원근법이 기하학과 철학에 연동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으니 이들은 더 이상 장인이 아니었다. 구매자들도 편견을 벗고 이 혁신적인 장인들을 예술가로 대접해야만 했다. 더불어 작품 가격이 상승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이 오늘날처럼 완벽하진 않았다. 좀 더 세월이 흘러 미켈란젤로나 티치아노의 시대에도 교황이나 황제들에 의해 금전적으로 휘둘렸다. 반면 부르주아는 한 푼이라도 깎으려는 귀족과 성직자들과는 달리 능력에 맞는 대가를 지불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 점이 메디치 가문이 예술의 메세나(Mecenat)로서 역할을 믿음직스럽게 수행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이런 배경을 먼저 이해한 후 앞으로 펼쳐지는 미술사와 관련한 선행 학습으로서 원근법을 공부했으면 좋겠다.



피타고라스의 수(數)

레오나르도 다 빈치, [비트루비우스 인간(1492)]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명한 [비트루비우스 인간]이다. 레오나르도가 완전한 인체의 수학적 비례(황금비율)에 천착했을 때의 드로잉이다. 그가 인용한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 폴리오는 BC 1세기경에 활약한 고대 로마의 건축가이다. 그의 생애에 관하여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1414년 피렌체에서 발견된 그의 를 통해 유추해낸 것들이며, 사실 이름도 확실치 않다. 그러나 그의 저술은 로마 건축을 집대성한 것으로 건축 구조의 본질을 세 가지, 견고함과 유용성, 그리고 아름다움에 두었다. 그리스 건축 양식을 도리스, 이오니아, 코린토 식으로 분류한 인물도 바로 비트루비우스이다. 레오나르도는 그중 기하학적 인체 비율과 관련된 그의 해부도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단순히 경험적 수작업이 아니라 관찰과 측정을 동원했다. 이렇게 하여 도달한 인체의 이상적 비례를 나타낸 작품이 바로 ‘비트루비우스의 인간’이다.


사람이 누워 키의 1/14만큼 짧아질 때까지 다리를 벌린다. 그리고 팔과 손가락을 반듯이 펴서 머리의 정수리만큼 들어 올리면, 인체의 중심은 배꼽이 된다. 배꼽과 벌린 두 다리 사이에는 정삼각형을 그려 놓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손끝에 맞춘 원과 수평으로 활짝 벌린 팔을 기준으로 삼은 정사각형이 보인다. (정사각형 밑변 모서리에서 배꼽을 지나는 사선 2개를 긋고, 사선과 원과의 교점을 잡는다) 그럼, 정사각형과 원의 넓이의 비는 1:1.000373이 된다. 같다고 해도 무방한 비율이다.
이게 대단한 것이다. 자와 컴퍼스만으로 그리스 수학에서 못 풀었던 3가지 수학 문제 중 하나를 해결했다. ‘원의 면적과 같은 정사각형을 작도하라’는 문제의 해답이다. 수학자가 못 푼 문제를 미술가가 해결했다. 아니 레오나르도가 수학자이자 오늘날 과학자인 셈이다. 그리고 인체의 황금비율은 인간을 ‘소우주’로서 바라보는 시선을 담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중세 1,000년간 신에 가려져 있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탐구가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들면서 다시 관심을 두게 되었다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하루는 피타고라스가 대장간 근처를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대장간에서 들려오는 두 개의 망치 소리가 어쩐지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망치 무게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리듬, 즉 소리의 규칙적인 고저 간격 때문이었다. 망치 무게의 비율이 1:2일 땐 1옥타브, 2:3일 땐 5도 음정, 3:4일 땐 4도 음정이 그것이다. 현의 길이에도 같은 물리적인 규칙이 적용되었다. 피타고라스는 눈에 보이는 자연의 이면에 수를 질서로 하는 규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로써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인 기원전 6세기, 지중해 사모아 섬에서 태어난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을 ‘수’로 정의했다. 스승 탈레스를 비롯하여 모두 물, 불, 흙 등 눈에 보이는 것에서 근원을 찾을 때 그는 추상적인 수로서 우주의 질서가 이루어진다고 본 것이다. 매우 독특한 관점이며, “우주라는 거대한 책은 수학적인 언어로 쓰여 있다”고 말한 갈릴레이와 훗날 근대 과학을 일으킨 뉴턴하고 맥이 닿는다. 그는 자신의 철학 체계를 수학적 바탕 위에 세웠고, 이로써 절대 진리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피타고라스학파에서 말하는 ‘우주를 통제하는 수’란 발생과 더불어 동시에 존재했다고 여겨지는 가장 소박한 1, 2, 3과 같은 ‘양의 정수’(整數, 혹은 자연수)이다. ‘1’이 점이라면, ‘2’는 선이다. 그러나 점과 선은 눈으로 볼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실제 볼 수 있는 면(面)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3’이 최초의 수의 시작이 된다. 이 점, 선, 면은 기하학으로 연결되며, 여기서 만물(우주)이 음악적 운율과 기하학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논거를 찾을 수 있다. 피타고라스는 수가 단순히 계산을 위한 도구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고유의 기능을 발휘한다는 위대한 발견을 한 것이다.
수에 대해 속성을 부여하자 수비학(數祕學, 숫자와 사람, 장소, 사물, 문화 등의 사이에 숨겨진 의미와 연관성을 공부하는 학문)이 파생했다. 행운의 수 7, 요한계시록의 666, 죽을 4(死) 등이 그 예이며, 오늘날 타로도 형식에서 수비학에 기반을 둔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을 통해 신이 하루 아침에 세상을 창조할 수도 있었으나 일부러 6일을 끌었다고 말한다. 신이 자의로 6일에 걸쳐 공을 기울인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6일이 소요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인정하고 그에 맞추었다는 뜻이다. 피타고라스의 '6'도 역시 '완전수'다.
그러나 오늘날 수학자들의 관점, 즉 증명되기 전에는 진리가 될 수 없다는 합의와 배치된다. 더욱이 이탈리아 크로톤(당시 그리스령)에서 창설한 '피타고라스학회'가 ‘오르페우스교’라는 종교 집단으로 발전하자 극단적인 폐쇄성이 나타났다. 그 정점에서 제자 히파소스가 정수로 설명되지 않는 수를 발견했다. 직삼각형 변의 길이가 1일 때 빗변의 길이가 그것으로, √2(루트 2)가 그 답이다. 간단히 분수로 고칠 수 없는 수로, 소수점 아래의 수가 반복되지 않고 무한히 계속되는 소수, 오늘날 무리수(無理數, irrational number)라 부른다. 그러나 스승 피타고라스가 '이치에 맞지 않는 미친 수('알로고스', 곧 '침묵'이란 뜻)’라고 결론지었음에도, 끈질기게 수의 비밀을 파헤치던 히파소스가 어느 날 우물에 빠진 시체로 발견되었다.


학문에 있어서 경직성이 발견되면, 더 발전적인 토론이 불가능하다. 결국, 수로써 자연을 설명하려는 그들의 첫 번째 시도는 조용히 막을 내렸다. 이후 피타고라스의 제자들이 새로 자리 잡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한 기하학으로 그 자리를 대신했다. ‘기하학(geometry)’이란 낱말은 ‘토지의 측량’을 뜻했다. 그러니 헤로도토스의 말처럼 기하학은 나일강이 선물했을 지 모를 일이다. 따라서 수학자들이 기하학을 공부하기에는 알렉산드리아 이상의 장소가 없을 법하다. 그들은 이곳에서 수학의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었으며, 이곳에서 강의를 최고의 영예로 생각했다. 그 선두 주자가 바로 유클리드이다. 우리를 피렌체의 ‘플라톤 아카데미’와 연결해줄 인물이다. 유클리드는 아테네의 플라톤 아카데미아에서 기하학을 배웠다.



플라톤의 원근법과 기하학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장화 중 [요나(1512)]

1512년 미켈란젤로는 4년 만에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완성했다. 가운데 아홉 폭은 첫날 빛의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술 취한 노아로 끝냈다. 그 주위 열두 폭에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을 그렸는데, 그중 한 명이 요나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로, 고래가 삼켰다가 사흘 만에 뱉은 그는 부활한 예수를 암시하는 인물이다. 20년 후 미켈란젤로가 그리게 되는 [최후의 심판] 바로 위, 두 개의 삼각 궁륭에 접한 공간이자 한쪽 끝이 잘린 약간 둥그스름한 세모꼴의 오목한 표면에 [요나]를 담았다. 한 마디로 굴곡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와 관련해서 1553년에 미켈란젤로의 전기를 쓴 제자 콘디비는 이렇게 놀라움을 표현했다.


“안쪽으로 향한 상체가 보는 사람 눈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고, 바깥쪽으로 뻗은 두 다리가 눈에서 가장 먼 곳에 있다. 단축법과 원근법으로 선을 그리는 능력과 지식이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굉장한 작품이다.” (아서 단토, [무엇이 예술인가])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을 쓴 미술사가(史家) 바사리도 요나의 그림이 위대한 시스티나 천장화의 ‘정점이자 축소판’이라고 말했다. 착시 효과, 즉 ‘원근법’과 단축법에 관한 찬탄이다.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원근법의 대표 인물로 우첼로, 프라 안젤리코, 필립포 리피를 꼽는다. 그러나 완성자는 미켈란젤로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는 말년에 도시계획에 전념했는데, 원근법을 사용하여 로마 캄피돌리오 광장과 유피테르 신전으로 가는 계단을 가깝게 느끼고 넓게 보이도록 설계했다.


플라톤은 수와 자연과의 관계에 관한 피타고라스의 관심을 물려받았다. 그는 신들이 우리에게 말을 건넬 때 사용하는 언어가 수학이라고 했다. 공간, 즉 우주를 이해하는 도구이다. 오늘날 수학자들도 만약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면, 그 신은 수학자라는 데 동의한다. 그만큼 우주에는 정교한 수학적 규칙이 숨어 있다는 이야기다. 이 공간의 점, 선, 면, 도형 등에서 비례관계를 찾아내는 학문이 기하학이다. 비례관계란 화음이자 조화이며, 바로 미(美)의 세계이다. 물체가 아니라 비물질이며, 불변·필연의 ‘이데아’이다.
이데아의 문제는 가상과 실재라는 두 개념의 대립을 상징한다. 그러나 플라톤이 즐겨 사용했던 원근법은 르네상스 시대의 그것과 개념이 조금 다르다. 그리스어 ‘스키아그래피아(skiagraphia)로, 입체감을 강하게 나타내기 위해서 그늘진 부분을 일부러 어두운 색깔로 칠하는 기법이다. 따라서 플라톤이 대화편에서 환영 또는 착각 등을 보기로 들면서 자주 사용하던 원근화은 엄밀히 말해서 음영화를 의미한다.
반면 르네상스 시대에 성립하였던 원근법, 즉 기하학에 충실한 선 원근법의 개념은 유클리드가 사용했다. (김용운, [수학대사전] 199~200쪽) 유클리드는 성경 다음의 베스트셀러 [원론]을 저술했다. 그는 ‘기하학의 10가지의 공리(公理, 증명 없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진리)와 공준(公準, 공리 가운데 기하학적인 내용을 갖는 공리)이 수학의 시작’이라 선언하며, [원론] 13권 중 피타고라스 학회의 업적을 기록하는 데만 두 권을 할애했다. 그리고 17세기 프랑스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데카르트는 수학적 지식이야말로 ‘학문’이라고 불린 유일한 지식이라고 단언(윗글 258쪽)하기에 이른다.


인간이 눈을 통해 바라보는 세계는 부피를 가진 삼차원의 삼라만상이다. 그러나 마치 TV 화면처럼 평면으로 인식한다. 여기에 선 원근법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있다. 부피를 가진 삼차원 세계를 평면으로 옮기는 작법이 원근법이라면, 거꾸로 수학적 비례에 따른 평면 드로잉으로 건축가가 똑같은 삼차원 구조물을 환원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원근법은 ‘공간의 학문’ 기하학과 연결된다.
기하학의 증명은 아주 명백하고 질서 정연하다. 오류가 기하학의 추론에 끼어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클리드의 공리와 공준으로 시작한 기하학의 추론은 잘 배열되고, 바르게 순서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하학에서 쓰이는 정신은 오류에 빠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 편리한 방법을 통하여 기하학을 익히는 자는 지성을 획득한다. 즉 기하학이 지성을 계발하고, 인간의 정신을 바르게 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윗글 146~147쪽)
이것이 기원전 389년쯤 플라톤이 아테네 숲에 세운 ‘아카데미아’(Academia) 현관에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 문을 들어서지 말라”고 써 붙인 이유이다. ‘아카데미아’라는 말은 곧 아테네 문화를 가리킨다. 그는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교수와 저작에 전념하면서 아테네학파의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에 와서 플라톤 아카데미의 문을 걸어 잠금으로써 학문은 ‘암흑기’로 접어들었다. 1,000년의 세월이 흘러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했을 때 코시모가 플라톤 아카데미를 설립함으로써 문화는 오랜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켤 수 있었다.


(제목 사진은 브루넬레스키가가 설계한 [산 로렌초 성당] 본당 중심부이다. 사진의 소실점이 그가 건축에서 원근법을 사용하여 설계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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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영

미술과 과학사를 중심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인문학 지식을 버무려 이 다음에 아이들이 읽을 내 일기처럼 글을 올립니다. 여러분의 영혼에도 작은 울림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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