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클

도나텔라와 마사초, 그리고 원근법

노인영| 2022.05.23
산 로렌초 성당 내부 본당(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피렌체에 있는 산 로렌초 성당 내부 본당 사진이다. 메디치 가문의 주요 인사가 모두 묻혀 있는 가족 성당으로, 조반니 디 비치데 메디치가 브루넬레스키에게 의뢰하여 설계했다. 비록 그가 죽은 후에 완공되었지만, 사진에서 보듯 소실점이 뚜렷하다. 설계가 정확한 수학적 비례에 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성당 돔을 지을 때 사용된 건축 드로잉이 원근법을 기초로 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원근법은 신의 관점이 아니라, 인간인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본다는 철학적 기반 아래 발전했다. 인간의 눈은 3차원의 삼라만상을 평면으로 인식한다. 창문에 모아지는 바깥 풍경과 같다. 따라서 원근법은 삼라만상의 입체적 형상과 위치를 기하학적 비례에 의해 정확히 재현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서는 '선 원근법(수학적 투시화법)'이 필수적이다. 이를 통해 인간은 다시 2차원의 평면을 3차원의 공간으로 확장하여 인식한다. 건축에서는 이미 실용적인 방법이었으나 당시 회화나 조각에서는 새롭고 혁명적인 접근법이었다.


원근법의 이론서 [회화론(1435~1436)]을 써서 브루넬레스키에게 헌정한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가 건축가라는 사실이 우연이 아니다. 선 원근법은 브루넬레스키가 창안하고, 도나텔로와 마사초가 배워 미술에 적용했다. 하지만 최초로 이론을 정립하여 체계화한 인물이 바로 알베르티이다.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원근법을 사용하기 위해 수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는 회화의 기원을 의외로 나르키소스에서 찾는다. 열여섯 살 나르키소스가 자신의 모습을 비춰본 ‘연못의 수면 위에 비친 환영’, 그것은 3차원 육체가 2차원 연못 평면에 옮겨져 있다. 바로 화폭 위에 비례에 의해 사물을 정확히 재현하는 회화와 본질적으로 같다는 의미이다.

그는 미술가가 모든 장르와 모든 과학을 창작하려면, 매우 특출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상으로 여겨진 만능인(L'uomo universale)을 말한다. 비트루비우스를 연구한 뒤 라틴어로 [건축론 10(1452)]을 펴내 르네상스 최초의 건축 이론가가 되었다. 또한, 철학과 법학, 고전학, 수학, 극작, 시학에 정통했고, 회화와 조각에서는 창작과 함께 이론 구축에 기여했다. 음악과 운동에도 뛰어났던 그가 바로 르네상스 시대 최초로 만능인의 전형이었다.


브루넬레스키는 도나텔로(Donatello, 1386~1466)가 완성한 근육질의 [예수상]과 자신이 직접 조각한 고통받는 모습의 [예수상]을 비교토록 하여 자각을 유도했다. 당시 조각은 건축 구조물의 부속 작품이나 장식처럼 취급되었다. 그러나 도나텔로는 여든한 살까지 50년간 활동하면서 조각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예술계 전반에 새로운 혁신을 불러왔다. 조각에 있어 르네상스 양식의 창시자이다.

[성 조르조(1416)]와 [청동 다비드상(1440)] 조각


조토의 회화와 비교되는 도나텔로는 벽감용으로 제작된 [성 조르조]로 인해 당대 최고의 조각가로서 지위를 인정받았다. 그리고 조각 예술의 새로운 장을 연 작품은 바로 청동 [다비드 상]이다. 천 년 넘게 시도되지 않은 최초의 나체상이다. 코시모 궁전의 안뜰에 세워놓고 사방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조각의 진정한 장점을 구현했다. 그의 위대한 점은 단순히 기법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 시대 후진들을 향해 ‘형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차원을 넘어 내면을 표현하라’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오늘날로 치면, 표현주의의 선구자인 셈이다. 장인의 차원에서 예술가로서 대접받을 수 있는 이정표를 제시했다는 면에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비교되는 대목이다.


[가타멜라타 장군 기마상(1453)]

이런 측면에서 그의 대표작은 청동기마상 [가타멜라타 장군 기마상]이다. 높이 4m의 대형 조각상이 파도바의 수호성인(聖人) 성 안토니오 대성당 광장에 세워졌다. 청동으로 만든 유럽의 최초의 작품이다. 9세기가 이르는 동안 세부 제작 기법이 알려지지 않은 고대 로마 시대 주물 상을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살아있는 동안 상당한 명성을 얻은 그의 작풍은 북유럽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나 미켈란젤로에게 많은 영감을 주어 근대 조각으로 발전할 계기를 마련하였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유명한 용병대장 에라스모 다 나르니의 머리가 벗어진 모습이 마치 고대 로마의 명장 카이사르가 떠오르게 하는 작품이다. 유족 요청으로 세웠다. 하지만 도나텔로는 용병대장의 전성시대였던 점을 고려하여 최대한의 예우를 다해 제작했다. 도나텔로는 카피톨리누스에 있는 고대 로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에서 받은 영감을 끌어냈다. 기마상은 사방이 탁 트인 곳에 있어 입체성이 중요한데, 당시에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더군다나 비용도 많이 들었다.

가타멜라타는 ‘얼룩 고양이’라는 뜻이다. 본명 에라스모 다 나르니가 교활하고 영민하여 붙은 별명이다. 베네치아 공화국 장군의 고집스러운 표정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부릅뜬 눈, 꽉 깨문 입술, 군인으로서 단호함이 생생히 드러난다. 왼쪽 말굽 아래 대고 있는 원구(圓球)는 고대로부터 유래된 기법이다. 앞으로 힘차게 나아가려는 체격 당당한 말을 강력하게 제어함으로써 말 주인의 강한 기상을 돋보이게 한다. 이후 영웅에 대한 가장 극적인 찬사는 청동 기마상이 되었다.


도나텔로의 성격도 가타멜라타를 닮았다. 전해지는 작품이 몇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독하게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관대했다. 금 세공인으로 출발한 그는 이 작품을 완성하고 금화 1,650두카트를 받았다. 기베르티의 조수로 일할 때 연봉이 75두카트였으니 연봉의 22배에 해당하는 액수다. 그는 상자에 돈을 넣어 작업실에 매달아 놓았다. 돈이 필요한 동료들이 누구나 꺼내 갈 수 있도록 배려한 행위다. 이런 그를 메디치가(家) 코시모가 친구처럼 좋아했다. 고대 그리스 유물을 수집하는 등 평생을 함께했으며, 1466년 여든한 살의 나이로 죽을 때 그의 유지대로 산 로렌초 묘지 코시모의 묘 곁에 묻혔다. (조각에서 원근법은 부조 작품에서 잘 드러나는데, [예수의 승천(1428~1430,제목 사진)]이 대표적이다)

[예수의 십자가형(1426?)과 [성 삼위일체(1427~1428)]


회화에서는 마사초(Masaccio, 1401-1428)가 최초로 원근법을 사용하였다. 프레스코화 두 작품을 비교해 보자. 한 눈으로 보아도 오른편 작품을 그린 작가가 매우 뛰어나다. 파여 있듯 공간감이 사실적이며 세련되었다. 그러나 반전이 있다. 모두 한 화가에 의해 그려졌다. 그것도 1년이란 짧은 시간 간격이 존재할 뿐이다. 정통 프레스코(‘프레스코 부오노’) 벽화 기법의 창시자 마사초가 그 주인공이다. 왼편은 [예수의 십자가형]이고, 오른편은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벽에 그린 유명한 [성 삼위일체]이다. 당시에는 기법의 변화 속도가 무척 느렸을 터인데 가히 혁명적 성과라 하겠다.

[예수의 십자가형]은 깊이가 드러나지 않아 평면적이다. 인체의 묘사도 머리와 몸이 따로 따로라는 느낌이다. 두 팔을 벌린 가슴 위에 별도로 얹어 놓은 듯 어색하다. 하의를 벗겨내고 허리와 십자가에 못 박혀 뒤틀린 다리의 모습을 연결 지어 상상해 보아도 역시 부자연스럽긴 마찬가지이다. 마사초는 이때 역시 보이는 대로 그리려고 애썼지만, 한계를 드러냈다. 원근법, 특히 선 원근법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인간이 멀고 가까움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앞을 향해 겹치는 두 눈의 시야와 뇌의 작동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본 것을 깊이와 공간감이 정확하게 평면으로 옮기는 문제는 또 다른 차원이다. 원근감은 색조로도 표현이 가능하다. 파랑-초록-빨강의 색조에서 빨강이 제일 앞으로 나오고, 파랑이 뒤로 멀어진다. 녹색 빛을 띠는 호수의 얼음을 좀 더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청색이다. 거리에 따라 빛의 파장이 변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며, 이를 색조로 구현하는 방법이 '대기 원근법(공기 원근법)'이다. 또한 중세 때는 성경 속 인물의 비중에 따라 의도적으로 크거나 작게 그렸다. '의미 원근법'이다. 그러나 수학적 비례를 통해 공간을 서술하는 선 원근법에 관한 별도의 지식이 부족하다면, 본질적인 한계가 선명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마사초는 브루넬레스키로부터 선 원근법을 배웠다. 이후 그는 다른 데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원근법에 매몰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룬 비약적인 결과물이 바로 [성 삼위일체]이다. 이 프레스코화의 제막식이 열리던 날, 피렌체의 많은 사람이 깜짝 놀랐다. 반원구 모양의 벽감에서 길이와 폭만 담던 그림에 공간이 추가되면서 마치 조각상을 세워놓은 것처럼 깊이가 생겼기 때문이다. “밑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좁아져서(소실점을 형성하여) 마치 담벼락을 뚫은 것 같아” 보인다. 일종의 착시 효과다. 위대한 미술사가 바사리는 이렇게 칭찬했다.


“이전의 그림을 단순하게 ‘그린 것’이라고 한다면, 마사초의 작품은 ‘생명이 넘쳐흐르고 진실성이 있으며 자연 그대로를 묘사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마사초는 스물일곱 살에 세상을 등진다. 마솔리노와 함께 로마로 갔던 마사초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죽었다. 주변에서는 혹시 독살되지 않았나 의심스러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남동생들을 보살피느라 가난에 찌들어 살았다. 남들에게는 언제나 후했으나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원근법을 가르쳐주었던 브루넬레스키도 “마사초를 잃어버린 것은 비할 데 없는 큰 손실이다”라며 슬퍼했다고 한다. 다행스럽게 그의 제자였던 필리포 리피의 그림이 마사초를 닮았다. 게으르고, 단정치 못했던 그는 수사복을 던져버리고 그림으로 먹고살기로 결심하였다. 1441년 명작 [성모의 대관식]을 남겼다. 그리고 훗날 신이 내려준 예술가 미켈란젤로와 페루지노, 다 빈치, 라파엘로, 안드레아 델 사르토, 프라 바르톨로메오 등 숱한 천재들이 마사초의 그림을 모사하며 공부했다. 이런 맥락에서 도나텔로와 마사초를 이끈 브루넬레스키의 원근법이 피렌체 르네상스 미술을 견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아요 2
공유하기

노인영

미술과 과학사를 중심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인문학 지식을 버무려 이 다음에 아이들이 읽을 내 일기처럼 글을 올립니다. 여러분의 영혼에도 작은 울림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목록으로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