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토의 [영아살해(1304~1306)]와 루벤스의 [유아대학살(1611)]
두 작품의 모티브는 같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유아 대학살>이다. 헤롯왕은 ‘큰 인물이 태어난다’는 예언을 믿고 아기 예수가 태어난 베들레헴 지역 갓난아이의 씨를 말리려 했다. 왼편 조토 디 본도네의 작품 속 윗편에서 손을 뻗어 살해를 지시하는 인물이 헤롯왕이리라. 하지만 지금 다루려는 것은 성경 내용이 아니라, 두 작품 간의 비교이다.
그러면, 대뜸 대중은 이렇게 물을 수 있겠다. “어떤 그림이 더 잘 그린 걸까?” 그리곤 서로 오른편 루벤스의 작품(1611년)을 가리킬 확률이 높다. 한 눈으로 보아도 조토의 작품보다 생생한 현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조토의 작품이 루벤스의 것에 비해 뒤떨어진 걸까? 그건 아니다. 오히려 위대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모든 미술사가가 입을 모아 조토를 칭찬한다. 왜 그럴까? 그 이유를 알고 싶다면, 우리는 작가의 솜씨보다 당시의 역사적 환경에 주목해야 한다.
조토는 비잔틴 미술의 전통을 깨고 르네상스 회화를 연 선구자로 대접받는다. 적어도 이탈리아에서는 그렇다. 최초의 미술사가 조르조 바사리는 이탈리아에서 '훌륭한 미술'이 1300년대 조토 시대에 '부활했다'라고 평가했다. 잘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훌륭한 예술’은 고대 그리스 미술을, ‘부활’이란 글자 그대로 ‘르네상스(Renaissance, 문예 부흥)’를 이름이다. 그러니 조토 때 와서야 고대 그리스 미술이 재현되었고, 그의 작품이 중세 천 년을 뛰어넘는 시대적 걸작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대중은 혼란스럽다. 아무리 작품을 둘러보아도 조토의 어떤 점이 훌륭한지를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 우리는 700여 년 전 파도바로 시공간을 옮겨 갈 필요가 있다.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7~1337)의 <애도(혹은 그리스도를 애도함, 1304~1306)>가 바로 초기 르네상스의 형식과 내용을 알려주는 단초이다. 북부 이탈리아 파도바에 소재한 스크로베니 예배당 프레스코화 가운데서도 <애도>는 그중 유명하다. 엄격한 초기 비잔틴 양식에서 벗어나 실제처럼 표현하는 자연주의적 접근을 시도했다. 이탈리아화 된 비잔틴 기법이다.
엄격한 비례는 아니지만, 개념적으로나마 원근감이 드러난다. 평평한 평면에서 깊이감을 느끼게 하는 미술로, 고딕 조각가들의 작품들과 흡사하다. 이전과 완전히 구별되는 새로운 미술의 시작이며, 회화가 비로소 기록된 문자의 대용품 이상이 되었다. (E.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조토의 이런 시도는 추후 르네상스 시대의 해부학과 원근법, 나아가 서양 미술의 전범(典範)이 되었다.
작품은 내용 면에서 신(神)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인본주의 정신이 반영되었다. 정서적으로 대중과 동질감을 형성한다는 의미이다. 스승 치마부에와 조각가 니콜라 피사노가 닦아 놓은 인문주의를 발전시켰다. 그의 회화는 피렌체의 예술혼을 깨웠다. 브루넬레스키, 마사초, 도나텔로의 작품 속에, 기베르티, 알베르티, 첸니니의 예술 의지 속에 살아 숨 쉬게 된다.
작품 속 인물들의 표정을 보면, 이전의 그림처럼 근엄하고 성스럽지 않다. 예수의 주검 앞에서 성인들도 우리네처럼 오열한다. 그 표정이 매우 현실적이다. 심지어 천사까지도 울먹이는 모습이다. 그의 회화는 메시지를 단순하게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마치 무대 위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생생하다. 특히 성 요한은 양팔을 보라. 이전처럼 두 손을 맞잡고 있는 소극적인 자세가 아니다. 몸을 앞으로 구부리며 양팔을 뒤로 크게 벌리는 매우 열정적인 동작을 취한다. 마치 연극배우처럼.
그의 출현은 새로운 예술사적 세기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모두가 입을 모아 찬양한다. 단테가 <신곡>을 통해 “이제 조토의 시대가 왔으니 다른 사람의 명성은 사라져간다”고 격찬했다. 조반니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을 통해 한술 더 뜬다. 그는 ‘여섯째 날’ 이야기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조토는 천재적인 화가였습니다. 만물의 어버이며 하늘의 끊임없는 운행의 조작자인 ‘대자연’이 더 이상 아무것도 그에게 보탤 필요가 없을 정도로 우수했던 것입니다.”
이런 평가와 관련하여 스크로베니 예배당 28개의 프레스코화 중 개인적으로 꼭 보여주고 싶은 작품이 <예수의 탄생(1304~1306)>이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색조가 풍부하고, 조각상 같은 인물들의 감정 표현이 돋보이는 등 큰 무리가 없다. 성모 마리아가 갓 태어난 아기 예수를 앉고 있고, 하늘에서는 천사들이 축복한다. 당시로선 모험적으로 '등을 돌리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점이 눈에 뜨이는 정도이다.
그런데 아래 웅크리고 앉은 요셉의 표정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마리아의 남편, 즉 예수의 아버지인 요셉의 표정이 묘하다. 아들을 낳았는데 (적어도)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다. ‘예수의 탄생’과 관련된 작품은 어마어마하게 많다. 그러나 경배 일색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발견할 수 없는 독특한 시각이다. 왜 이렇게 그렸을까? 역시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지인이 조토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조토는 대답한다.
“내 기억에 없는데 아내가 아이를 낳았어. 어찌 거리낌 없이 기뻐할 수 있겠나?”
물론 일화지만, 불경(不敬)이다. 그러나 14세기가 막 시작된 당시 이런 작품 해석은 조토만이 가능했다. 성경 ‘예수의 탄생(마태복음 1장 18절~25절)’과 관련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성령에 의한 잉태”라는 사실을 고지(20절)하기 전 요셉의 모습이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동거 전 잉태)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19절)”하는 보통 사람 요셉의 표정이다. 이른바 패러다임의 변화이며, ‘모더니티’이다. 모더니티는 마네의 <올랭피아>처럼 현대에 대한 예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더니티는 주어진 순간에서 인간 조건의 보편성, 특히 인간의 나약함,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숙명을 이야기해야 한다. (자크 아탈리, <인류는 어떻게 진보하는가>)
신성(神性)에서 인성(人性)의 시대로 넘어온 르네상스, 조토는 새로운 회화의 세계를 활짝 열었다. 오늘날의 눈높이에서 그의 그림을 보면, “뭐가 대단한 거지?”라며 고개를 갸웃거릴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조토의 급진적인 혁신성을 가장 잘 이어받은 대표적인 작품이 60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1907)>로 이어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가히 '불멸'이라 하겠다. 그러나 냉정히 따져보면, 문화에는 단절이 없다. 물 흐르듯 인류와 함께 숨 쉰다. 조토의 작품이 갑자기 등장하지 않았다는 반론이다. 더군다나 ‘암흑기’라 폄하하는 중세의 마지막 미술, 국제고딕 양식 역시 화려했다. 14세기 말부터 발흥하여 1420년까지 전 유럽을 휩쓸었다. 결론적으로 르네상스란 중세 미술과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한 시대 구분일 뿐이다. 다만 당시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관념의 변화는 분명하게 감지되며, 그 변화의 일단을 조토의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뛰어나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