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뇌손상 환자를 오랫동안 담당한 일이 있었다. 전두엽 기능이 손상된 환자는 감정 조절에 어려움이 있어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했는데, 처음에는 언어 기능이 손상되어 잘 몰랐지만 점차 기능을 회복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폭언을 하는 일이 잦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원하는 만큼 수행력이 나오지 않자 “나이도 어린 여자인 네가 뭘 아냐. 내 돈을 떼 먹으려는 거다”라며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그의 화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고, 결국 ‘저거 또라이 아니냐’는 말과 함께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일을 하면서 웬만큼 우발적인 상황에 초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욕설은 그렇다 치고 ‘나이 어린 여자인 네가 뭐를 아냐’는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지금까지 꾸준히 커리어를 쌓아왔는데, 그에게는 그저 내가 ‘전문가’가 아닌 ‘여자’일 뿐이었나 보다. 그도 그럴 게, 때때로 그 환자는 자신을 케어하는 전문 인력이 여성일 경우 비하적인 표현이 잦았다.
“여자가 어떻게 이걸 하냐”, “여자가 이걸 어떻게 아냐”등의 첨언이었다. 아픈 사람의 의미 없는 말이라고 하기에는 툭- 툭- 심기를 건드렸고, 하필 비교적 자신 없던 분야에 속해있던 환자여서 그의 말이 더 크게 와 닿았다. 하지만 비하적인 표현은 분명했다. 아마 내가 남자였더라면 그가 ‘남자가 어떻게 이걸 알아?’라고 하지는 않았을 테니. 이렇게 일터에서 남성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들을 만날 때면, 지금까지 내가 이뤄온 것들이 휴지조각처럼 흩어질 때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때때로 업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업무적으로 좋은 조건을 제안 받았을 때나 좋은 비즈니스를 건의 받았을 때도 “과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쉽게 압도당하고는 했다. 그런 제안들에 겉으로는 전혀 꺼리지 않았지만, 맡은 바 일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기 위한 시뮬레이션과 일정을 습관처럼 세웠다. 그 와중에도 상대에게 얕보이지 않는 가장 쉬운 방법이 ‘경어’ 사용과 자신감 있는 ‘태도’임을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다.
동시에 학위 과정 때 최연소로 임용된 교수님이 왜 그렇게 딱딱한 말투밖에 사용할 수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사회는 생각했던 것보다 능력 있는 여성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오롯이 그의 능력으로 얻은 산물일지라도 여성으로서 얻은 권력과 전문성은 끊임없이 그 출처를 의심받으며 도마 위에 오르곤 했다.
이러한 완벽주의 콤플렉스는 직장에서는 엘리트한 사원으로, 가족에게는 야무지고 똑똑한 딸로, 이성에게는 완벽한 여자 친구로 기능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주었다. 문제는 스스로 완벽하게 결과를 쟁취하고 나서도 오롯이 나 자신을 칭찬하기보다 매번 겸손에 가까운 사고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는 일이 죽기보다 어색하며 아직도 “어떤 일을 하느냐”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쉬이 답할 수 없다. 더욱 완벽한 자신이 되기 위하여, 끊임없이 스스로 갈무리 하지 않으면 강해질 수 없다는 생각에 몇 번이고 미래를 수정하며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베르트 모리조의 이야기는 충분한 공감을 자아냈다. 그녀는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미술계에서 가정과 작업을 양립하며 10년 동안 꾸준히 그림을 이어갔다. 실제로 그녀는 1864년부터 1873년까지 매해 개최되는 살롱전에 참가해 작업을 선보였다. 한 분야에 최소 10년 이상 몸을 담으며 작품을 출품했다는 건, 그만큼 전문성을 갖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특이점은 그녀가 자신의 작업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게 상류층 자제로 태어난 ‘베르트 모리조’는 언니 ‘에드마 모리조’와 함께 어려서부터 미술을 배웠다고 한다. 자매는 화가를 꿈꿨지만, 집안의 압력으로 언니 에드마가 먼저 결혼을 하게 된다. 당시의 여성상은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없었기에 에드마는 순리에 따라 화가의 꿈을 포기하고 가정을 택한다. 함께 꿈을 꿨지만 현실에 순응한 언니를 보면서 베르트 모리조가 느꼈을 여러 가지 감정이 유추가 된다. 그리고 당시에 그녀가 느꼈을 감정은 지금의 나와 같은 여성들이 느끼는 감상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베르트 모리조에게는 ‘에두아드 마네’라는 존재가 있었다. 마네는 그녀에게 작업적 영감뿐만 아니라 가르침을 주는 존재였지만, 그녀를 틀에 가두는 사람이기도 했다. 한 일화로 베르트 모리조는 1970년에 <어머니와 언니>를 작업했는데, 마네가 그녀의 그림을 비웃으며 붓을 댔다고 한다. 요즘말로 하면 ‘선을 세게 넘은’ 마네의 행동에 화가 날 법도 한데, 베르트 모리조는 그의 무례함을 지적하기보다 자신의 작업을 폄하했다고 한다. 자신의 작업을 한껏 비웃으며 붓을 댄 그의 행동이 자신의 작업을 더 완성 시켜주었다는 이야기였다.
애석하게도 베르트 모리조는 평생 그림을 그리면서도 자신의 실력을 믿지 못해 불안에 떨었다고 한다. 종국에는 직업란에 ‘화가’라 적지 못했고, 무덤의 묘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엇이 그녀를 믿지 못하게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당시 동료 화가의 진술에 따르면 베르트 모리조는 자주 자신의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없애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의 그림은 사후 루브르 박물관이 구입을 하면서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을 만큼 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
만약 조금 더 그녀가 자신에게 관대했다면 어땠을까. 나아가 당시의 사회가 ‘여성’ 베르트 모리조가 아닌 ‘화가’ 베르트 모리조로 봐주었다면, 그녀는 조금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여자들은 자신의 성공이 우연찮은 행운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또, 타인의 시선만큼 스스로에 엄격해서 끊임없이 완벽해지려고 애쓴다. 베르트 모리조가 살았던 시대보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과연 지금의 사회가 더 이상적이라 말 할 수 있을까. 앞으로 보다 많은 여성들이 스스로를 시험하지 않고 오롯이 본인을 인정할 수 있는 시대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