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클

한 번도 안해봤쇼.

김승화| 2021.04.27

"할머니, 이건 크레파스인데요,
오늘은 이 재료를 활용해서 그림을 그려볼 거예요"

"어르신, 지금 나오는 노래는 모차르트라는 사람이 만든 곡이에요.
우리 맨날 트로트만 듣다가 이런 것도 한번 들어보자구요"

어르신들과 아트웍 작업을 시작한 지도 벌써 5회 차, 매 수업 때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어르신들께 얻는다.


작은 프로젝트부터 시작했던 우리가 아무것도 아는 것 없이 여기저기 부딪혀가며 어엿한 법인을 세우기까지는 꼬박 3년이 걸렸다. 그동안 우리는 크고 작은 활동들을 시작했고 그 경험들을 모아 브랜드를 만들었다.

사실 우리의 브랜드를 만들게 된 계기는 별것 없었다. 우리 브랜드의 기반이 된 곳은 천안의 남산마을이라는 곳인데 이 마을은 도심에서 약간 벗어나 위치한 곳으로 남산이라는 작은 산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인구의 대부분이 고령의 어르신들로 홀로 거주하시는 분들이 많았고 향후 마을정비와 주민들의 질 높은 삶을 위해 2018년도 도시재생 선도지역으로 선정되었다. 이후 주민들에게 마을이 어떻게 재정비될 것인지 주민 대상사업설명회가 있던 날, 주민도 아니었던 우리는 그저 궁금한 마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것이 어르신들과의 첫 만남이었다.



남산마을


사업설명회를 계기로 우리는 크고 작은 프로그램들을 어르신들과 함께 할 수 있었는데 도시농업프로그램에 참가해 배추를 키워보기도 하고 어르신들도 쉽게 만들 수 있는 가구 만들기와 집수리 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고 참여했다. 어르신들은 젊은 여자애 둘이 앉아있으니 신기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셨는지 우리를 꽤나 예뻐해 주셨는데 나는 어릴 적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받은 사랑이 기억나 마음이 푸근해지고 따뜻한 기분이 종종 들었다.



어르신들과 함께한 문패 만들기 수업


그런데 가만 보니 이 어르신들이 집에서 하는 게 별 것 없었다.

생계가 어려우신 분들은 그저 동네 미용실에 점심을 해주러 가거나 청소, 거리의 파지를 줍는 게 돈벌이의 전부였고 생활하는데 어려움이 없는 분들은 먹고 살 만은 하지만 딱히 여가시간을 보낼 거리들이 없었다. 주로 노인정에 가서 화투를 치거나 수다를 떠는 게 전부였는데 화투를 치는 게 싫으신 분들은 집에서 TV를 보거나 산책을 하시곤 했고 그마저 지겨울 때면 집 앞에 나와 밖을 바라보는 것이 하루의 전부인 듯했다.

시골에 계신 어르신들도 집 앞 텃밭을 가꾸는 것 외에는 똑같은 일상일 테이지만 도시의 어르신들은 그마저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여가시간이면 낮잠도 자고 영화도 보고 카페에 가 친구도 만나며 다양한 활동을 하지만 나와 함께 이 사회에 살고 있는 어르신들이 여가생활을 즐기기에는 그분들에게 허락된 프로그램도, 시스템도, 시설도 거의 없었으며 그저 하루를 보내기에 24시간은 너무 길었다.




여가생활을 즐기는 어르신들.

나는 여가시간이 생기면 주로 광화문 근처 제일 좋아하는 카페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고는 한다. 그곳에는 종종 말끔하게 차려 입은 어르신들이 여유롭게 커피를 한잔 마시고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모습을 볼 때면 노후를 즐겁게 보내는 어르신들의 모습이 느껴져 나도 그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런 어르신들은 대부분 많지 않다. 대다수 도심 속 어르신들은 공터에서 홀로 외로운 시간을 보내거나 집에서 TV를 시청하는 것이 전부이며 또 무거운 리어카를 끌어가며 남은 세월을 하염없이 보낸다. 실제 이런 분들과 함께 이야기해본다면 '그러게 젊을 때 열심히 좀 살지 그러셨어요'라는 말을 던질 수는 없을 것이다.

무료하고 외로운 건 우리와 마찬가지로 어르신들도 똑같다. 그런 분들을 위해 우리도 하는 여가생활을 제공해드리고 싶었다. 우리는 다양한 콘텐츠의 세계에서 여러 프로그램들을 보고 배우며 살고 있지만 이분들의 일상이라고는 TV 시청과 산책이 유일한 여가생활이라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작한 아트웍 활동

"난 이런 거 해본 적 없으니까 다른 사람이랑 하쇼"

처음에는 마을 어르신들과 미술치료과정을 진행하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하얀 도화지와 크레파스를 이용해 무언가 스스로 그린다는 것에 큰 부담감을 느끼셨고 크레파스나 색연필, 파스텔 등의 다양한 재료들을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다는 분들도 계셨다.

그래서 두 번째 수업은 특별한 목적을 빼고 그저 활동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마블링 작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물과 기름의 특성을 활용한 마블링 작업은 쉽게 흥미를 느끼셨고 처음 접해보는 신기한 방식들과 예상치 못한 패턴들이 도출되는 것을 보시며 내내 즐거워하셨다.

프로그램을 거듭 진행할수록 재능이 있으신 분들이 더러 보인다. 분명 나와 동시대에 태어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으셨다면 아마 대단한 아티스트가 되셨을 수 도 있을 것이다. 또 그림의 강약과 화풍, 컬러 등에 따라 개개인의 성격과 개성이 나오는데 창의적으로 자신의 세계관을 녹여 추상적인 그림을 그리는 분도 계시고 실사와 똑같이 정물화를 그리는 분들도 계신다. 하지만 이 분들의 공통점은 모두 '그린다'라는 행위 자체를 조금씩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어르신들은 '아트'라는 세계에 빠져들고 있는 중이다.



'내 친구의 얼굴'이라는 주제로 진행했던 아트웍 프로그램
'내 친구의 얼굴'이라는 주제로 진행했던 아트웍 프로그램
'첫 붓질'시리즈의 모티브가 됐던 할머니의 진짜 첫 붓질 작품
첫 붓질 작품을 모티브로 페브릭 제품과 엽서를 제작했다.
첫 붓질 작품을 모티브로 페브릭 제품과 엽서를 제작했다.



함께하는 예술과 디자인.

우리는 어르신들의 아트웍 작업물을 모티브로 패턴을 만들어 가방과 엽서 등 어르신들의 기쁘고 설렌 마음이 담긴 제품을 만들고 판매한다. 또 일부 과정에 어르신들을 고용해 우리가 돌보아야 하는 귀찮은 존재가 아닌 우리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자리 잡아가는 중이다.

작은 활동에서 시작된 우리의 브랜드 이름은 링크 앤 라이프(Link and Life), 줄여서 릴리(lili). 어르신들의 삶과 우리의 삶이 연결되어 모두가 기쁘고 행복한 꽃을 피우기 바라는 마음에서 지었다.

현재 아트웍 프로그램은 어르신들이 조금이라도 부담감을 덜 수 있도록 다양한 주제와 재료들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개발 중이며, 아트웍뿐만 아니라 향후 다양한 취미활동 수업으로 범위를 넓혀나갈 예정이다.

그저 그림을 그리며 다양한 문화생활에 함께 한다는 것. 이러한 활동을 통해 그분들의 여생이 그저 흘러가는 것이 아닌 주체적이고 보람차게 보내실 수 있도록 도움이 되길 바란다. 또 우리는 이런 모습을 바라보며 현재에 대해 생각하고 조금이나마 행복한 미래를 그릴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 디자이너로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똑바로 걸어가지 못했다. 회사를 다닐 때는 항상 착한 디자인이라는 범위 안에서 또 사업을 할 때면 금전적 문제들과 나름대로의 고민들을 가지고 이리저리 걸었던 듯하다. 하지만 이 작업들은 나에게 어디로 가야 할지 안내판 같은 역할이 되어주었고 나는 처음 회사를 시작했던 그때처럼 아무런 저항 없이 조금이나마 균형을 맞추며 한걸음 더 나아가는 중이다.

한 번도 안 해봤쇼, 마침.



남산마을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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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화

예비사회적기업 비유니크 디렉터로 어르신여가생활과 일자리문제 해결을 위한 생활소품 브랜드 <링크앤라이프 릴리>의 브랜드에셋을 총괄 및 관리감독하고 있습니다.
대학동기와 소셜창업의 전선에 뛰어들어 매일 새로운 것을 경험 중이며 사회적 가치와 이익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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