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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노인영| 2022.09.16

로마의 르네상스를 이야기하려면,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1508~1512)]에 관한 설명을 먼저 듣고 다음으로 넘어가야 한다. 지금까지 존재하는 회화 작품 중 최고이기 때문이다. 20m 천장 위 프레스코화를 보면, ‘조각가인 그가 어떻게 이런 훌륭한 회화 작품을 완성할 수가 있었을까?’ 라는 의문이 저절로 생긴다. 기법상의 문제를 거론하려 함이 아니다. 미켈란젤로는 화가가 아니라 마치 구도자와 같은 길을 걸었다는 생각에서 나온 감탄사이다.

미켈란젤로는 1496년 처음 로마에 갔다. 그곳에서 1500년까지 머물다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리고 카라라 채석장에서 8개월 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2층짜리 무덤을 장식할 조각품 40개를 만들 대리석을 골랐다. 1505년 12월 다시 로마에 도착했으나 교황에겐 최초 보였던 열의가 사라져 있었다. 교황은 계획을 바꾸어 묘의 건축을 취소했다.
이로 인해 빚을 진 미켈란젤로는 오랫동안 만나주지 않는 교황에게 화가 났다. 교황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자 교황은 무임소 장관에 명령하여 그를 바티칸 궁정에서 내쫓았다. 미켈란젤로는 교황에게 '앞으로 자신에게 볼일이 있다면, 로마 땅 밖으로 나를 찾아와야 할 것'이라고 편지를 쓴 후 피렌체로 돌아갔다.

미켈란젤로가 천장화를 맡게 된 데는 우르비노 출신의 건축가 브라만테가 동향인 라파엘로를 위해 농간을 부렸다는 음모론이 많다. 이 점을 명확히 해명하고 난 후 다음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 둘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반면 천장화 작업 배경에는 의견이 갈린다.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로맹 롤랑은 [미켈란젤로의 생애]에서 브라만테가 교황을 꼬드겨 영묘 작업을 취소시켰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그가 수작을 부린 것 같다고 전한다. E.H. 곰브리치도 미켈란젤로가 브라만테의 음모론을 믿었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엔리카 크리스피노는 브라만테가 "미켈란젤로가 인물을 많이 그려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작업을 할 의사가 없다고 생각했다"며 오히려 천장화에 반대 의사를 피력했다고 못 박는다. (그의 [미켈란젤로]참조)

교황에게 시스티나 성당은 작은 예배당이지만, 삼촌이자 자신을 추기경으로 만들어준 식스토 4세를 기념했다는 데 의미가 크다. 또한 자신의 영묘는 기존 성 베드로 성당 건물 안에 안치되기에 그것을 헐고 새 성당을 짓게 되면, ‘영묘를 어디에 세울 것이냐?’ 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영묘 작업을 뒤로 미루고, 우선 새로운 성당의 천장화 작업에 무게를 두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런 연유로 조각가 미켈란젤로를 피하려 했다고 볼 수 있겠다.
당시 교황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특히 율리우스 2세는 재위(1503~1513) 중 전쟁을 즐겼고, 막대한 예술 후원을 통해 자신의 위업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러나 금전 문제에 대해서는 관대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런 율리우스가 미켈란젤로 때문에 세 번의 교서를 보냈고, 이로 인해 로마와 피렌체 간 외교 문제로 비화할 뻔했다. 고집 센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1506년 11월, 전쟁 중이던 볼로냐로 불려간 그는 교황에게 사죄했다. 교황은 용서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율리우스 교황이 미켈란젤로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여하튼 미켈란젤로는 1508년 교황의 영묘(靈廟) 조각 대신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를 그리게 된다. 이때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조각가'로서 미켈란젤로의 앙금이 아직 풀리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오늘 1508년 5월 10일, 본인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우스 2세로부터 교황 식스토의 예배당 천장화 주문받았고 (...) 500두카트를 받았으며, 오늘부터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는 이렇게 율리우스 2세의 전폭적인 신뢰가 전제되지 않았더라면, 성사되기 어려운 과업이었다. 최초 설계안은 빈약했다. 벽감 속에 십이사도를 그려 넣고 밋밋한 천장을 푸른 바탕으로 칠한 후 덩굴무늬로 장식하려 했다. 그러나 갑자기 미켈란젤로가 예배당 안에 혼자 틀어박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이왕에 맡을 바엔 제대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지 야심 찬 구상을 교황에게 밝혔다. 추정컨대 예배당 벽에 그린 보티첼리나 기를란다요 같은 선배 화가들의 작품이 자극을 준 것으로 판단된다. 교황은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하라'며 그에게 모든 것을 일임했다. 이렇게 그의 전 생애에서 가장 고되고 숭고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500평방미터가 넘는 천장에 모두 33개 부분으로 구성했다. 그 핵심은 중앙에 띠 모양으로 천지창조의 첫날부터 노아가 술 취한, 즉 인간이 타락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창세기 아홉 장면이 구상의 핵심이다. '어둠과 빛을 구별하다', '해와 달을 창조하다', '바다와 육지를 분리하다', '아담을 창조하다', '이브를 창조하다', '원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다', 그리고 '노아의 제사', '홍수와 노아의 방주', '술 취한 노아'가 그것이다. 이중 아담에게 숨을 불어넣어 신의 권능을 잘 나타낸 [아담의 창조]는 성경의 순서와는 반대로 가장 마지막에 완성된 장면이다.

[아담의 창조]

왼편부터 [선지자 이사야], [다윗과 골리앗], [그리스도의 조상 아사]

그리고 측면을 7명의 예언자 요나, 예레미야, 다니엘, 에스겔, 이사야, 요엘, 스가랴와 5명의 여사제 리비아, 페르시아, 쿠마엔, 에리트리아, 델피 예언자 등 열두작품으로 구성했다. 미켈란젤로가 이교도의 점술가와 유대교의 예언자들을 통해 인류가 그리스도께 안내되었음을 보여준다.
펜던티브(비잔틴 건축에서 돔을 형성하기 위해 네 귀에 마련한 부분)에 '이스라엘의 기적적인 구제'를 주제로 네 장면, 즉 ‘하만을 벌하다’, ‘모세와 뱀’, ‘다윗과 골리앗’,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를 그렸다. 측면 펜던티브 사이 삼각형 모양에는 '그리스도 조상들' 여덞 장면인 솔로몬과 어머니, 이세의 부모, 르호보암과 어머니, 아사와 부모, 웃시야와 부모, 히스기야와 부모, 스룹바벨과 부모, 요시야와 부모를 담았다. 이와 별개로 아치형 채광창 '루네트'에도 그리스도의 조상들 열네작품을 그려 아브라함과 요셉에 이르는 조상 22명을 망라해 놓았다.

좁고 적은 수의 창문을 지닌 예배당이라 밝게 채색했다. 조각가라 그런지 배경은 메시지에만 충실한 채 파격적인 인체와 감정 묘사에 집중했다. 어느 각도, 어떤 자세이든 336명(엔리카 크리스피노, )의 인체 묘사가 탁월하다. 그리고 비례와 색채를 통해 '조각 같은 인체' 효과를 상승시켰다. 이 거대한 조형적 입체감과 선명한 색채의 완벽한 조화를 보면, 압도되지 않을 재간이 없다. 미켈란젤로는 처음에 세밀하게 시작했다. 그러나 아래에서 20m 높이의 그림을 바라보자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없었다. 이를 포기하자 갈수록 작업에 속도가 붙었다. 또한 이 점이 오히려 작품의 근대성을 보여준다.
1512년 10월 11일 미켈란젤로는 회화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업을 거의 5년 만에 종료했다. 높은 비계(飛階)에 올라 하루 18시간의 지난한 작업이었다. 천장 도배 작업이라고 해도 어려웠을 일이다. 천장에 비가 새서 애써 바른 회반죽이 엉망이 되기 일쑤였다. 십자형 원통형 궁륭으로, 들쑥날쑥한 천장 형태로 인해 작업은 몇 배나 어려웠다. 먹고 자는 것도 잊어버렸다. BBC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화가 두 명에게 같은 작업을 시켰더니, 며칠 못 가 붓을 던질 정도였다.

그는 사실 회화를 폄훼했다. "그림은 오직 여자나 게으른 자들에게나 어울리는 일"이라는 생각했다. 작업을 마친 37세의 미켈란젤로는 뚝뚝 떨어진 안료로 인해 한쪽 눈을 실명하고, 척추는 비틀어졌다. 그러나 조각가로만 평가받던 미켈란젤로가 위대한 화가로서도 완성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작품이 완성되고 나서 몇 달 만에 시스티나 예배당은 성지순례의 장소뿐 아니라, 위대한 회화 작품이 있는 명소로서 입지를 공고히 했다. 그해 11월 1일 모든 성인의 축일, 만성절(萬聖節)에 마침내 천장화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미켈란젤로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그리던 예배당 작품이 끝났습니다. 교황께선 매우 만족하시더군요."

탈진한 미켈란젤로는 이후 20년 동안 회화를 중단한 채 조각과 건축에만 전념했다. 이 천장화에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의 자존심이었을까, 신앙심이었을까? 아니면, 둘 다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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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영

미술과 과학사를 중심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인문학 지식을 버무려 이 다음에 아이들이 읽을 내 일기처럼 글을 올립니다. 여러분의 영혼에도 작은 울림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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