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남성 다섯 명이 누워도 족히 남을 것 같이 아주 큰 캔버스에 앞에서 작업하는 쿠사마 야요이의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쿠사마는 거침없는 손길로 선을 긋고, 선 사이의 공간을 점들로 채워나간다.
‘쿠사마 야요이’라는 이름은 모를지 언정, 모두들 그녀의 작품을 한 번쯤은 본 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내가 그렇다. 디자인 전공과 예술 관련 활동에서 스치듯 잠시 다루고 지나가서 작가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는 이미지가 있다. 채도 높은 색으로 칠해진 무수한 점들.
경제적으로 부유했지만 정서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쿠사마는 10살 때부터 화가를 꿈꿨다.
하지만 어머니의 반대가 극심했고, 어느 날은 어머니에게 그림을 빼앗긴다. 그녀는 자신의 그림을 또 빼앗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그 경험의 트라우마로 어린 시절부터 빠르고 강렬하게 자신을 표출하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다.
가족들의 계속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무 살이 되는 해에 쿠사마는 첫 전시를 개최한다. 하지만 전시에는 아무도 오지 않는다. 영화는 당시 일본의 굉장히 보수적인 정서로 그 이유를 설명한다. 나레이션과 함께 나온 몇 장의 사진에는 아무도 없는 전시장을 배경으로 쿠사마가 서있다. 모든 벽에 자신의 그림들이 걸려있지만 그 누구도 오지 않은 전시장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쿠사마가 결혼을 해서 전업주부로 살기를 바랐다고 한다. 쿠사마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더 이상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여태껏 자신이 그린 2000 점의 그림을 태우고 미국으로 떠난다. 미국에서는 이것보다 더 훌륭한 작품을 그리리라 다짐하며.
그녀가 미국으로 떠난 1958년이 쿠사마 인생 전반을 차지하는 저항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덧붙여 이 저항은 그 당시 가족과 사회가 바라던 여성상을 거부한 쿠사마가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한 도약이기도 하다.
뉴욕에 도착한 첫날, 쿠사마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뉴욕 전경을 내려다보며 이 도시를 정복하리라 다짐하지만 그것은 순탄치 않았다. 당시 뉴욕의 미술계는 철저히 남성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여성이 개인전을 연 전례가 없는 뉴욕에서 여성이자 외국인인 쿠사마는 모든 것을 스스로 개척해야만 했다.
“과거 미술계는 쿠사마를 받아주지 않았어요. 쿠사마는 여성이고 일본인이었으니까요”
“쿠사마도 대단한 작품들을 만들었지만 남성 작가들만큼 지원을 받지 못했어요”
기모노에 숨겨온 돈으로 쿠사마는 작업실을 구하고 부단히 작업한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을 걸어줄 갤러리도 발 벗고 찾아 나선다. 당시 최고의 갤러리에 자신의 그림이 전시될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알려서 먼저 관람객이 자신의 그림을 찾도록 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그림을 전시한다.
하지만 앤디 워홀과 클래스 올덴버그 등 서양의 남성 작가들이 연이어 쿠사마의 아이디어를 표절하면서 그녀는 크게 낙담한다.
급기야 심한 스트레스로 창밖으로 뛰어내리기도 하지만 죽지 않은 쿠사마는 그녀만의 방식대로 현실에 계속 저항한다. 초청받지도 않은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석하여 분수대에 작품을 설치하고 소개한다. 관람객에게 2달러에 자신의 작품을 팔다가 주최 측에게 중단 당하기도 하지만 쿠사마는 굴하지 않았다.
히피 운동이 들끓었던 1960년대 후반에는 전쟁을 반대하며 앞장서서 반전시위에 앞장서기도 한다. 하지만 시위에서의 나체 해프닝이 일본에 선정적으로 보도되어 일본 미술계는 건강 쇠약으로 귀국한 쿠사마를 거부한다. 쿠사마는 스캔들의 아이콘으로 불리며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정신 이상의 심화와 연이은 아버지의 부고로 증상이 악화된 쿠사마는 미술치료를 하는 정신병원에 자진해서 입원한다. 쿠사마는 미술사에서 잊히기 시작하지만 그녀는 결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지난 작품들을 눈 여겨보고 있던 전시 기획자로 인해, 1989년 뉴욕에서 쿠사마의 회고전이 열리고 일본과 미국에서 그녀를 재평가하기 시작한다. 4년 뒤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 최초로 개인전 초대 작가로 초청받으며 일본에서도 쿠사마를 인정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힘든 싸움을 한 후에야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죠"
여성 아티스트 역대 경매가 1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아티스트 등 이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현대 미술의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나는 ‘쿠사마 야요이’라는 이름 앞에 ‘개척자’라는 수식어를 사용하고 싶다.
감독인 헤더 렌즈는 이 영화를 ‘성차별, 인종 차별, 정신 질환을 극복하고 예술가가 되겠다는 꿈을 좇아온 한 개척자의 이야기’라고 설명한다. 나도 이 의견에 동의한다. 쿠사마는 자신의 평생을 자신의 꿈을 쫓았고 그 어떤 장애물 앞에서도 잠시 멈출지 언정 포기하지 않았다.
“전 그림을 그려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예술의 힘으로 세상이 평화로워지길 바라요”
그리고 세상의 평화를 염원하는 쿠사마의 모습에서 어렴풋이 자신의 평화도 소망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유년시절부터 시작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예술을 추구한다던 그녀의 말처럼, 습작 없이 순간 떠오른 것을 빠르게 완성하는 그녀의 작업 스타일은 스스로를 치유하는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