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클

그라나다의 햇살 아래에서

가울| 2022.08.12
그라나다의 고양이 (종이 위에 수채, 2019)


작은 창의 풍경

알바이신 언덕 위 어딘가, 작은 창문 너머엔 장미와 쟈스민이 가득 피어있어요. 아침에 깨어나 덧창이 달린 창문을 열면 햇살과 함께 꽃 향기가 왈칵 쏟아졌습니다. 한 순간 파도가 밀려오듯 창 밖의 세상과 창 안의 공간이 연결된 순간,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방 안을 환히 밝히곤 했어요. 상쾌한 아침 공기에 가득 배인 햇살의 향기와 꽃 향기를 맡고 있노라면 지저귀는 새소리와 먼 곳에서 들려오는 종소리가 고요한 정적 너머로 들려오곤 했습니다. 그 고요한 풍경은 그대로 똑 떼어와 어디에서나 바라보고 싶은 아름다운 모습이었어요.
아침에 깨어나면 창 앞에 앉아 가벼운 식사를 하는 동안 그라나다의 이 곳 저 곳을 떠올리며 어디를 그리러갈까 고민하다, 너무 더워지기 전에 서둘러 재료를 챙겨 나서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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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빅 거리 스케치 (종이 위에 수채, 2018)


그라나다의 풍경을 종이에 담으며

그라나다 햇살 아래 자리를 잡고, 거리의 풍경을 종이에 담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풍경을 그림으로 남기는 일은 퍽 즐겁습니다. 순간에 푹 빠져 풍경을 꼼꼼히 관찰하게 되고, 주변에 떠도는 소리가 귓바퀴 너머로 흘러가는 동안 생각은 적어지고 붓 끝에 집중하게 돼요. 그렇게 그려진 거리들은 작은 부분까지도 정말 선명하게 기억됩니다.


산 니콜라스 전망대에서 그린 알함브라 궁전 스케치 (종이 위에 수채, 2018)


처음엔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끄럽기도 하고, 어떤 풍경을 그려야할지 감이 오지 않았어요. 다음 골목에서 더 멋진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 열심히 걸어다니기만 한 적도 있습니다. 그래도 꾸준히 그림을 그리러 길을 나섰어요. 시간이 지나 하나 둘, 그림이 쌓이자 나름의 노하우가 생겼습니다.
가장 먼저 그림을 그리기 좋은 시간이 언제인지 알게 되었어요.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온도가 맞지않아 덥거나 춥고, 또 빛이 부족해 종이가 잘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가 가장 높이 떠오를 한낮엔 종이에 비치는 햇살이 따가워 오래 그림을 그리기가 어려웠어요. 가장 좋은 때는 아침과 점심 사이, 10시에서 12시 사이의 시간이었습니다. 햇살과 그림자가 적절히 섞여있는 데다 해가 질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고, 다 그린 뒤엔 맛있는 점심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좋은 풍경을 찾아 걸어다닌 덕에 그림으로 그릴 풍경을 몇 개나 찾아내게 되었고, 물을 길을 수 있는 분수가 어디에 있는 지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분수가 없으면, 평소보다 물통에 물을 많이 챙겨 나가야해요.) 점차 사람들의 시선에도 익숙해졌고, 때때로 그림을 그리던 중 만나게 된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도 즐거워졌습니다.


가장 오래 그려 그리는 동안 피부가 까맣게 타버렸던 산 크리스토발 스케치 (종이에 연필, 2018)


자스민, 석류 그리고 고양이 (종이 위에 수채, 2018)


태양이 가장 높은 곳에 다다를 때면,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던 고양이들은 꽃 그림자 아래를 찾아 몸을 뉘이곤 했습니다. 그라나다의 낮은 정말 뜨겁습니다. 눈이 부셔 벽을 똑바로 보기가 어려울 정도예요. 저도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짧은 낮잠을 청했습니다. 침대에 누우면 창 밖의 풍경은 방 안이 까맣게 느껴질 정도로 환하게 빛났습니다. 그 시간 즈음엔 거리에 사는 작은 동물들이 방 안에 들어와 그림자 아래서 쉬었다 가곤 했는데, 창틀에 조용히 몸을 숙이는 작은 도마뱀이 가장 단골이었고, 하루는 고양이가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그 날은 유독 잠이 오질 않아 낮잠대신 창 앞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데, 갑자기 고양이가 창틀 사이로 몸을 쑥 내밀었어요. 다양한 색이 담긴 그림이며 재료들을 살펴보더니 눈이 마주치자 야옹하고 울고 훌쩍 떠나갔습니다. 다음 날에도 혹시 오려나 간식과 함께 기다렸지만, 그 날의 방문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언젠가 그 순간을 꼭 그림으로 남기기로 마음먹었고, 여행에서 돌아와 그린 그림이 바로 이번 글의 첫 번째 그림인 '그라나다의 고양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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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로의 정원 (종이 위에 수채, 2019)


피가로의 정원

그라나다와 함께 떠오르는 또 다른 고양이는 숙소 정원에서 살고 있는 상냥한 고양이 피가로입니다. 고양이로는 할아버지 나이에 가까운 피가로는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았고, 첫 만남부터 무릎 위에 올라와 골골소리를 들려줄 만큼 차분한 성격에, 사람을 좋아하는 고양이였어요. 피가로가 머무는 정원은 한 낮의 태양을 피하기 아주 좋았습니다. 풍성한 잎을 가진 석류나무와 무화과, 오렌지나무가 정원에 너른 그림자를 만들어주었고, 작은 분수가 공기를 식혀주었어요. 전 그 정원을 '피가로의 정원'이라 불렀어요. 한가로운 오후 시간, 커피 한 잔을 들고 정원으로 내려가면 피가로는 언제나 수풀 사이에서 나타나 종아리에 몸을 비비며 쓰다듬어달라 애교를 부리곤 했습니다. 손길을 따라 폴폴 날아오르던 피가로의 주홍빛 털들은 햇살 속에서 반짝이며 민들레 홀씨처럼 멀리 멀리 날아가곤 했습니다. 참 평화로운 풍경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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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그라나다에서 친해진 친구가 저에게 그라나다를 좋아하는 이유를 물었어요. 놀랍게도 그제서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질문이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답하지 못한 채 남겨진 질문은 마음 속 깊이 남아 계속해서 떠올랐습니다. 왜 저는 그라나다를 그토록 사랑해 계속해서 그리워하는 걸까요?


스페인 대축제 (종이 위에 수채, 2019)


답은 아주 천천히 저에게 찾아왔어요. 그라나다의 풍경은 그 자체로 저에게 위안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수백년 전의 길과 오늘의 길이 하나로 이어지고, 지붕 위엔 언제나 때탄 적 없는 맑은 공기가 가득합니다. 알바이신 언덕 어느 곳이든 돌아본 풍경엔 높은 하늘과 탁 트인 너른 평야가 보여요. 매일 걸어다니는 골목길엔 향긋한 꽃 향기가 가득하고, 석류와 무화과 열매가 담장 너머로 가지를 뻗고 달콤하게 익어갑니다. 밤이면 떠오르는 별 아래 안달루시아의 바람을 닮은 음악이 흐르는 그라나다엔 미처 깨닫지 못한, 제가 행복을 느끼는 일들이 잔뜩이었어요. 제가 그라나다를 가슴 깊이 애정하게 된 건 이유를 묻지 않을만큼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안달루시아의 음악 (종이 위에 수채, 2019)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

난생 처음으로 보았던 그라나다, 강렬한 햇살 속 기억이 남긴 건 저 풍경 속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따라 도착한 알바이신 언덕에서 보낸 소박하지만 반짝이던 나날은 스스로를 더 깊이 이해한 중요한 시간이 되었어요.

텅 비어있는 하루를, 아무 것도 해야 할 일 없는 하루를 꿈꾸었습니다. 만약 어제의 부채와 내일의 과제 없이, 오로지 오늘을 살며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바로 그 일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라나다에서 보낸 시간들은 제 인생의 방향을 알고 싶었던 저만의 실험이기도 했습니다. 그라나다는 간절히 바래왔던, 가장 사랑하는 일로 하루를 채울 수 있었던 첫 번째 도시였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리고 싶은 풍경과 순간이 쌓여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하루는 그림으로 풍성히 채워졌고,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하며 살게 되자 무엇을 해야 행복할 수 있는지 이전보다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탁 트인 풍경에 쉼을 얻고, 붉은 석양에 감동합니다. 맑은 공기와 꽃 향기에 기쁨을 느끼고, 넓은 공간에 퍼지는 음악을 듣는 걸 즐거워해요. 세상의 다양한 문화와 사람, 음식을 접하기를 좋아하고, 무엇보다 세상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그릴 때 그 어떤 일보다 깊은 보람을 느낍니다.

그렇게 그라나다의 햇살 아래서 보낸 나름의 실험적인 나날 속에, 저는 저만의 방향을 찾았습니다. 가능한 많은 순간을 글과 그림에 담아 경험한 세상의 아름다움을 전하며 살아야겠다 결심했어요.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지금, 저에게 행복하냐 누군가 묻는 다면, 감히 행복하다 답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그림 중에 제 그림을 좋아해주는 건 강요할 수도, 설득할 수도 없는 기적에 가까운 일이에요. 그리고 감사하게도 종종 제 그림에 대한 감상을 전해듣곤 합니다. 처음 작가 생활을 시작할 무렵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귀한 말들이에요. 그런 말을 듣게 되면 제가 지키려 노력한 삶의 가치가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깊이 안도하고 또 행복해집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행복합니다.

저에게 전해주신 응원만큼, 오늘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요. 제가 사랑하는 일을 응원해주심에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힘을 얻습니다. 앞으로도 진심을 담아 작업을 이어갈게요. 또, 오늘 이 글을 보시는 분들 또한 살고 싶은 곳에서, 사랑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기를 제 자신의 행운을 바라는 마음의 크기만큼, 간절함을 담아 기원하겠습니다.

가울 드림


매달 그림과 글을 한 편의 레터로 엮어 발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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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울

빛나는 순간을 기록하는 일러스트레이터 가울입니다. 17개국 45개 도시를 여행하며 모아온 이야기들이 작은 별과 같은 위로가 되길 바라며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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