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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네 마르티니의 [수태고지]

노인영| 2022.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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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네 마르티니, [수태고지(1333)]


조토와 비슷한 시기에 피렌체의 이웃 시에나에서 최고의 화가는 두초 디 부오닌세냐 (Duccio di Buoninsegna)이었다. 그는 조토처럼 갑작스럽고 혁명적인 방법이 아니라 비잔틴 미술의 전통을 이어가는 방법을 택했다. 북유럽 미술가의 영향을 받아 사실적인 묘사에서는 오히려 조토보다 뛰어났다. 그는 중세 말 인본주의 영향을 받아 후기 고딕 미술, 즉 '국제 고딕양식'을 바탕으로 시에나 화파를 창시했다. 조화, 섬세함, 그리고 선명한 색상 등이 시에나파의 특징이다. 두초의 제자로 추정되며 시에나파 전통을 이어받은 인물이 바로 시모네 마르티니(Simone Martini)이다. 위대한 시인 페트라르카의 친구인 그가 시에나 성당의 제단화 [수태고지(1333)]를 그렸다. 수태고지(受胎告知)를 주제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금세공사의 값비싼 작품처럼 보인다. 이 역시 국제고딕 양식이며, 귀족적인 우아함과 고상한 분위기를 특징으로 한다. 중세의 구성을 따랐으며 사물의 실제 형상과 비례를 무시하고 상징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중앙 아치에 날개 달린 천사들이 성신(聖神)의 상징인 비둘기를 에워싸고 있다. 자칫 문양으로 여길 수 있다. 그 오른편 아치 밑에는 상아로 장식한 금박 옥좌에 망토를 걸친 성모 마리아가 앉아 있다. 왼편 큰 날개를 가진 가브리엘 천사가 무릎을 꿇고 성모에게 '성령으로 잉태하리라'는 사실을 전한다. 재밌는 점은 ‘수태고지’하는 말이 금박을 입힌 글자의 모양으로 천사의 입에서 나와 성모의 귀로 전달된다. 아베 그라티아 블레나 도미누스 테쿰(평안하여라. 은총을 가득 받은 이여.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 별도의 설명을 필요 없으리라.


다만 본질적인 두 가지는 함께 생각해 볼 만하다. "가브리엘 천사가 왼손에 들고 있는 것이 왜 올리브 가지냐?”와 "성모가 든 책이 과연 성경이었겠느냐?” 라는 질문이다.

수태고지에서 등장하는 꽃은 통상 ‘범접할 수 없는 순결함’을 상징하는 백합이다. [구약성경]에서 아름다움, 다산, 영적인 꽃을 상징하여 언급하며, 동정녀 마리아의 가장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그런데 백합은 공교롭게도 피렌체를 상징한다. 당시 이탈리아는 통일국가가 아니었다. 서로 자주 전쟁을 벌이던 독립 도시국가들의 집합체로, 시에나와 피렌체는 오늘날 중부 토스카나주 지역의 패권을 다투었던 앙숙이었다. 따라서 시에나에 뿌리를 둔 그가 이곳 성당 제단화에 천사가 백합을 들어 피렌체의 영광을 구현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전통적인 백합을 철저히 배제할 수도 없었고. 그래서 묘안을 생각해낸다. 먼저 화병에 백합을 넣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평화’와 시에나를 상징하는 올리브 가지를 천사의 손에 쥐여주었다. 노아가 방주에서 보냈던 비둘기가 뭍에서 물고 온 올리브는 ‘구원, 희망’을 상징하기도 하다.


다음, 성모가 든 책과 관련해서 곰브리치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은 의심 없이 (구약) 성경 혹은 기도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르티니의 다른 프레스코화의 기도서는 푸른색이다. 그런데 작품 속 8절지 큰 책은 자주색이다. 한편 성경 혹은 기도서를 들었다고 하면, 성령이 전하는 말씀에 처음부터 성모가 순종적이었다는 의미와 통한다. 그러나 작품 속 성모의 자세는 그렇게 보기 어렵다. 오른손은 턱밑 망토를 꼭 잡고, 몸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천사와 일정 거리를 둔 채 천사의 눈이 아니라 입에 고정되었다. 결정적으로 성령을 말씀을 전하는데 책갈피를 한 왼손 엄지손가락을 그대로 둔 것은 오히려 반항적으로 보인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성모가 읽고 있던 책을 다른 지혜의 서적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럼, 지혜의 확장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 잉태에 대한 성모의 결심이 주체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결론과 맞아떨어진다. '처녀의 잉태', 처음엔 두렵고 의심을 품었어도, 결심이 단호해야 한다. 그래야 이후 성모에게 벌어지는 엄청난 고통을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알베르토 망구엘, [독서의 역사]) 물론 조토 이전에는 예술가들에 관한 자료가 없다. 그들은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장인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바사리가 동향 피렌체 출신 조토의 천재성을 강조하기 위한 충정도 이해한다. 그러나 문화에는 단절이 없다. 르네상스 회화 역시 중세로부터 양분을 흡수하여 태동한 양식으로 보아야 사리에 맞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잠시 시모네 마르트니를 불러왔다.




조토와 스크로베니 성당 프레스코화

르네상스는 중세와 구별하는 시대 구분이다. 그럼, 중세는 언제부터일까? 서로마 제국의 멸망한 476년, 또는 동로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플라톤 아카데미를 폐쇄한 529년을 기점으로 한다. 그러나 앙드레 모루아는 [프랑스사]에서 814년 샤를마뉴의 사망과 함께 중세가 시작되었으며, 그 본질적 특징을 교회의 정치권력이라고 규정했다. 여하튼 기독교가 개인의 의식을 지배했던 시대이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던 그 날부터 ‘최후의 심판’ 때까지 인류의 삶과 미래를 비관적으로 생각했을 때이다. 원죄를 짓고 태어난 죄인으로서 개인의 삶에는 참회, 반성하는 태도가 중요했다. 그래야 심판의 그 날이 찾아왔을 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미술의 역할은 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달을 가리키면 됐지, 굳이 손가락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수고는 필요치 않다는 입장이었다. 결과적으로 미술은 교양 학문이나 예술성이 아니라 문맹자의 이해를 돕는 수공업적 기능이 강조된 시대였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문화를 계승한 르네상스 시대는 이 세상과 그곳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인간에 대해 철학적 관점을 달리했다. 인본주의란 간단히 말해 모든 것의 중심에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다. 한 마디로 이성(理性)에 대한 긍정이다. 기원전 338년 종말을 고한 고대 그리스는 역설적으로 문화를 통해 지금도 유럽인의 의식을 지배한다. 그중 아테네인의 위대한 업적은 진리와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다. (에른스트 H. 곰브리치, [곰브리치 세계사]) 이런 맥락에서 르네상스 미술의 궁극적인 목표는 평범한 사람들이 공감하는 아름다움의 구현이다. 우리네의 실제 모습과 닮아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수준이어야 한다. 과학적 원근법이나 해부학이 중요해진 이유다.

르네상스의 미술도 여러 방법으로 시대를 구분한다. 그중 단순하게 트레첸토(Trecento, 14세기), 콰트로첸토(Quattrocento, 15세기), 친퀘첸토 Cinquecento, 16세기)로 나눈다. 그리고 ‘초기 르네상스’, 혹은 르네상스를 예고한다는 의미의 ‘프로토(proto) 르네상스’를 덧붙이는데, 그 선구자로 꼽는 이가 바로 조토 디 본도네이다. 또한 통상적으로 르네상스를 초기(1420~1500년경), 전성기(1500~1525년경), 그리고 바로크 양식이 도래하자 사라져 간 말기(1590년경)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토는 13세기 중반 인물이다. 작품의 혁신성을 인정해도 르네상스를 이끈 선구자로 콕 집어 평가하기에는 시대적으로 너무 앞섰다. 양식 면에서 그는 오히려 국제 고딕을 이끌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다. 조토는 1267년경 피렌체에서 22km 떨어진 토스카나의 콜레 디 베스피냐노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치마부에의 제자가 되었고, 당시 런던 인구에 비해 4배 규모인 십만 명 정도의 피렌체와 아시시, 파도바, 로마, 리미니 등지에서 활동했다. 유명한 [미술가 열전]을 쓴 조르조 바사리가 피렌체 출신이라는 점이 후한 평가로 작용했다는 지적도 있다.

1348년부터 3년 동안 서유럽에서는 ‘검게 핀 꽃’ 흑사병으로 인구 1/3 이상, 약 2천 5백만 명 정도가 사망했다. 그러자 신앙을 통한 구원의 개념이 만연했다. ‘구원’은 중세 후기 작품에서 흔히 다루어진 주제이며, 스크로베니 성당을 봉헌하고 조토에게 작품을 의뢰한 엔리코 스크로베니의 궁극적 목적도 이것이었다. 경당 뒷면 벽을 꾸민 조토의 [최후의 심판(1303~1305)]의 둥근 원 안에 그리스도가 앉아 있다. 하단이 천당과 지옥으로 나뉘었는데, 그 중앙에서 성모 마리아에게 예배당을 봉헌하는 인물이 바로 스크로베니이다. 하얀 옷을 입은 그는 고리대금업자, 품격 있는 말로 바꾸어 말하면 은행가였다. 당시 기독교에서는 이자 받는 행위를 죄악시했다. [구약성경]에는 오직 이방인에게만 이자를 받을 수 있다고 적혀 있다. 프랑스만 해도 1789년 때까지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행위가 불법이었다. 프로테스탄트 칼뱅에 이르러서야 약 5% 정도의 이자율 이내에서 융통성을 보였다. 게다가 엔리코의 아버지 리날로 스크로베니는 악행으로 유명했다. 피렌체 출신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 등장할 정도였다. 엔리코는 1300년 2월 6일 로마 경기장에 접해 있는 땅을 샀다. 호화로운 저택과 함께 예배당을 짓기 위해서이다. 경기장이란 이름의 ‘아레나’ 채플이다. 이왕이면 첨탑도 올리고 크게 짓고 싶었다. 그러나 주변 수도원의 반대로 비교적 단조로운 모습으로 완성했다. 본당은 길이 20.88m, 너비 8.41m, 높이 12.65m 규모의 사각형 건물이며 뒤에 오각형 구조물로 구성됐다. 대신 내부는 당대 최고의 화가 조토에게 공간이 크게 보이도록 만들어 줄 것을 주문했다. 조토는 건물 내 [최후의 심판] 외 [예수와 마리아의 일생] 38면과 흑백의 [7가지 미덕과 7가지 악덕]을 담았다.

당시 종교 미술은 대부분 이런 기부 형식으로 세워졌다. 그간의 죄를 뉘우치며, 천당 가기를 열망하는 마음으로 예배당을 지었다. 후대는 그 덕을 찬양하며 예술로써 대접한다. 엔리코는 그림 속에서 천당과 지옥의 중간 지점, 연옥쯤에서 무릎을 꿇고 아버지 리날로를 비롯한 가문의 탐욕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 한 걸음 더 나가 그는 평소 알고 지내던 추기경 보카시오가 교황 베네데토 11세로 등극하자 1304년 3월 1일부터 스크로베니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면죄권을 주는 교황의 교서를 받아냈다고 한다. 그렇다면, 봉헌을 받은 성모 마리아도 엔리코 스크로베니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었을까? 여하튼 그가 몇 안 되는 조토의 전성기 작품을 후대에 온전히 전해줌으로써 지금까지 세대를 이어가며 후광을 비춘다는 덕목은 인정해야겠다.



프레스코화에 관한 이해

피렌체 등 이탈리아 중부 지방에서 발견되는 르네상스 시대의 대작들은 대개 건물 벽면을 칠하는 프레스코화이다. 기후 때문이다. 습기에 취약한 플랑드르나 베네치아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그곳엔 유화가 유행했다. 또한 종교화가 대세를 이루었던 시대로 교화 벽면이 고딕식 유리창이 아니라 돌벽으로 이루어져야 프레스코화가 가능하다. 조토의 벽화 기법은 이전 마른 벽에 그리는 건조한 기법(fresco secco)과 다르다. 석회가 마르기 전에 그리는 ‘부온 프레스코(buon fresco, ‘진짜 프레스코’라는 뜻)’ 기법이다. 부온 프레스코는 내구성이 좋고 색이 아름다우나 마르기 전에 작업을 마쳐야 하는 등 제약이 많다. 조토는 이 새로운 방법으로 스크로베니 예배당 벽화 전체를 장식했는데 꼬박 2년간 작업했다. 이것도 프레스코화이기에 작업 기간을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다. ‘프레스코’는 ‘마르지 않은’이라는 뜻이다. 벽에 바른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린다는 의미이다. 물감을 칠하기 전 회반죽은 세 차례에 걸쳐 진행한다.

이때 마르기 전에 석회에 침해되지 않는 물감을 사용하여 (드로잉 위에) 재빨리 칠하는 숙련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화가는 빠른 솜씨와 함께 하루에 할 수 있는 자신의 작업 분량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15세기 이전에는 작가 한 명이 직접 회반죽 위에 예비 드로잉을 하면서 작업했다.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작업 속도는 느렸다. 콰트로젠토(15세기)에 와서 밑그림에 색 가루를 뿌려 회반죽 위로 작은 점들을 만들거나(‘스폴베리’ 기법) 홈을 만들어 드로잉을 전사(傳寫)하는 방식이 개발되었다. 작가의 노력을 줄일 뿐만 아니라, 분업이 가능해졌다. 결과적으로 작품의 완성 시기를 앞당길 수 있었다. 앞으로 설명할 피렌체와 로마를 중심으로 번성한 르네상스 미술과 관련 먼저 프레스코화의 제작 과정을 이해함으로써 당시 작가들의 수고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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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영

미술과 과학사를 중심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인문학 지식을 버무려 이 다음에 아이들이 읽을 내 일기처럼 글을 올립니다. 여러분의 영혼에도 작은 울림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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