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한자급수시험을 꼭 봐야만 했다.
매년 다른 레벨의 한자를 외우고 시험을 거쳐 해당 급수를 따는 형식이었는데 나는 한자에 별 흥미가 없었을뿐더러 그림인지 글자인지 알 수 없는 문자를 외우고 쓴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글자 수가 천자, 아니 만자나 된다니.
이처럼 나와 같은 백성들을 위해 세종대왕님은 누구나 쉽게 읽고 쓰며 생활할 수 있도록 한글을 만들어 주셨다.
한글이야 말로 공공을 위한 새로운 창조물이었다.
그렇다. 세종대왕님은 아주 훌륭한 공공디자이너였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공공디자인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의식주와 같은 필수 욕구에서 벗어나 질 높은 삶을 영위하는 것에 대한 필요성이 높아진 지금, 사람들은 내가 살고 있는 주거 공간뿐만 아니라 회사, 거리 등 주변 환경에 대한 욕구도 올라갔다.
공원이나 미술관 등은 물론이거니와 거리에 있는 휴지통 하나까지 디자인되고 있는 요즘, 공공디자인의 퀄리티에 대해서는 한 번쯤 생각해 볼만 하다.
서울시는 영화 괴물의 흥행 기념으로 한강에 괴물 조형물을 세워두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돌아오는 시선은 꽤 오랫동안 비판적이었다. 놀랍게도 한강에 살고 있는 괴물은 영화 속 모습과 매우 흡사해 제작업체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평화롭던 공원에 진짜 괴물이 나타난 이후 시민들은 불쾌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내가 즐길 수 없는 조형물에 대해 만족하지 못했고 제작 의도에 공감 또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즐길 수 없는 없는 것이 과연 좋은 창조물이라 할 수 있을까?
이처럼 잘못된 디자인은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지만 잘 된 디자인은 우리를 특별하게 만든다.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서 스카이라인을 바라보며 산책할 수 있는 경험을 선물해준 서울로 7017과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며 다양한 전시와 이벤트를 열어 시민들이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게 해 준 문화역 서울 284는 이용객들로 하여금 특별함을 느끼게 한다.
지난겨울 나는 휴가차 뉴욕에 방문했다. 그중 우연히 들르게 된 도미노 파크는 기존 뉴욕의 풍경과는 색다른 모습이었다.
도미노 파크는 브루클린 내에 있는 공원으로 벌써 국내외 여러 매거진을 통해 소개된 바가 있어 새로운 관광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강 건너 맨해튼의 높은 빌딩과 석양을 바라볼 수 있는 지리적 위치, 윌리엄스 버그 다리 앞에 자리 잡은 공원의 한적한 풍경 등, 사람들이 도미노 파크를 찾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개인적으로 도미노 파크가 뉴욕에서 새롭게 사랑받는 장소 중 하나가 된 이유는 이용객들로 하여금 공감할 만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처럼 도미노 파크는 내게 한층 더 발전된 공공디자인의 미래를 보여주었다.
도미노 파크의 본래 이름은 아메리칸 슈가 리파이닝 컴퍼니(American Sugar Refining Conpany)로 설탕 정제소였다.
1856년 한때 세계에서 가장 큰 설탕 정제소였던 '도미노 설탕 정제소'는 윌리엄스버그와 브루클린 해안가 성장과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급변하는 세계정세로 인해 도미노 설탕공장은 2004년에 문을 닫았고 이후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도미노 파크로 재탄생되었다.
도미노 파크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공원 안에 있는 어느 것 하나도 공원이 가지고 있는 히스토리에 반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 공장을 구성하고 있던 공장 기둥은 물론이거니와 목재, 컨베이너 벨트, 공장 부속품들까지 공원의 의자와 구조물이 되고 조각품으로 재 탄생되었다.
도미노 파크의 비주얼 랭귀지 또한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고 귀엽다.
말 그대로 '도미노'라는 시각적 언어를 활용해 그래픽 요소로 활용했고 도미노 설탕 공장 곳곳에 있던 문자를 재탄생시켜 서체와 로고를 만들었다.
*도미노 파크를 브랜딩 한 Noë & Associates의 홈페이지
https://noeassociates.com/projects/2177/domino-park/
* 도미노 파크를 설계한 James Corner Field Operations홈페이지
https://www.fieldoperations.net/project-details/project/domino-park.html
또 도미노 파크 내에는 어린아이들이 놀 수 있는 특별한 놀이터도 마련되어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놀이터에서는 설탕 생산 과정을 몸소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실제 공장의 일부와 비슷하게 설계된 도미노 파크 놀이터에서 사탕수수가 되어 사탕수수 통나무집에서부터 사탕수수 원심분리기까지 설탕 정제소 여행을 떠날 수 있다.
12월 추운 날이었지만 몇몇 아이들은 부모님들과 함께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사실 도미노 파크는 이번 휴가 방문 목록에는 없던 곳으로 가보나 마나 똑같은 공원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브루클린에 거주 중인 직장 선배가 자신이 뉴욕에서 제일 좋아하는 공간이라며 적극적으로 추천해주셨는데 얘기로만 듣던 것과 달리 실제 방문해보니 매력이 배가 되어 다가왔다.
새로운 장소를 알려주신 수석님께 감사의 말을 표한다.
어떻게 보면 흉물이 될 수 있는 설탕공장을 멋진 공원으로 재탄생시키고 많은 시민들이 찾는 공간으로 만든 것은 누구나 즐기고 공감할 만한 스토리와 디자인으로 계획한 뉴욕시와 건축가, 디자이너 그리고 지역주민들의 노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공공디자인은 누구나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디자인의 힘은 매우 특별해서 무의미한 것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
이러한 디자인의 힘을 누구나 즐기고 경험해야 하는 것이 진정한 공공디자인이 아닐까.
디자인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것.
단순히 예쁘게만 만드는 디자이너가 아닌 디자인의 힘을 이롭게 쓸 수 있도록 나는 어떤 노력을,
또 우리는 어떠한 것을 할 수 있을까?
디자인을 널리 이롭게 마침.
*도미노 파크 공식 홈페이지
https://www.dominopar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