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빛'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시나요? 크리스마스 트리의 반짝이는 빛, 케이크 위에 타오르는 촛불, 맑은 밤하늘 위에 떠오른 은하수일 수도 있을 거예요. 기억 속 한 장면일 수도, 어딘가에서 전해 받은 풍경의 조각일 수도 있겠지요.
오늘은 작은 빛이 모여 큰 빛무리가 된 풍경에 담긴 이야기와 함께, 'Lightfull'이라는 단어가 가진 개인적인 의미를 전해보려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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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의 숲엔 반딧불이가 살고있습니다. 정글이 석양을 집어삼키고, 나무 사이로 깊은 어둠이 빠르게 스미기 시작하면 반딧불이를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은 선착장을 떠나 어두운 숲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합니다.
보트를 따라 잔잔한 물살이 퍼져나가는 강물 위론 깊은 어둠이 가라앉은 숲이 반사되고 있었습니다. 짙은 흙색의 강물이 이제는 녹색과 흙색, 그리고 어두운 밤의 색을 품고 넘실거립니다. 아무런 빛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숲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자 어둠 속의 숨바꼭질처럼 반짝이는 빛이 하나둘, 울창한 나뭇잎 사이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깊은 숲 어딘가, 모터 소리가 잦아든 곳에서 세상에서 가장 작은 빛이 모여 나무를 가득 채우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뱃머리에 선 가이드가 작은 손전등을 손에 쥐고 반딧불이의 불빛을 흉내 내기 시작했습니다.
깜빡대는 불빛을 따라 작은 빛이 강물 위로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겐 좁고, 그들에게는 먼 강을 천천히 가로지르며 날아와 사람들의 뻗은 손 위로 내려앉은 반딧불이는 정말 작았어요.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는 쌀알보다 작은 존재가 내는 빛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손바닥을 밝혔습니다. 모든 걸 낱낱이 드러낼 만큼 강렬하지 않아도, 제 존재를 드러내기엔 충분한 크기의 빛이었습니다.
동화 속 한 장면처럼 신비롭게 빛나는 반딧불이의 모습에 흠뻑 빠져있는 동안, 가이드의 불빛을 따라 많은 반딧불이들이 강 위를 날아와 보트 주변을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를 따라 빛무리의 모양은 계속해서 춤을 추듯 변화했고, 어두운 숲은 반딧불이의 빛으로 인해 더 머물고 싶은 신비로운 장소가 되었습니다.
말레이시아에서 돌아온 뒤, 그날의 기억을 종이 위에 담았습니다. 작은 반딧불이의 빛을 표현하려 어두운 숲을 그리고, 그 위로 밝은색의 물감을 짙게 개어 느린 속도로 다가오는 반딧불이의 모습을 그림에 담았어요. 완성된 그림을 액자에 넣어 침대 옆에 걸어두었습니다. 매일 밤 침대 위에 몸을 뉘이면 고요한 그 숲, 그림 속의 '빛의 숲'을 볼 수 있어요. 그림을 완성한 후로 여러 해가 지나, 코타키나발루의 빛과 닮은 종류의 감동을 주는 풍경을 만나게 되었어요. 바로 조지아 카즈베기 산맥에서 바라본 하늘의 별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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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서 시작해 포르투갈, 터키를 거쳐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를 여행하던 중, 여백 없는 도시의 풍경에 지쳐 눈에 쉼을 주기 위해 카즈베기 산맥 자락에 위치한 스테판츠민다 마을로 향했습니다.
사륜 지프차를 타고 눈길을 헤쳐 인적이 드문 산속 마을에 도착하자 매연이 가득하던 수도 트빌리시와는 공기부터 달랐어요. 맑은 공기가 가득한 작은 산 속 스테판츠민다 마을 건너편엔 카즈베기 산맥 위에 세워진 게르게티 츠민다 사메바 성당이 보였습니다. 해가 떠오를 때마다 게르게티 성당 너머의 카즈베기 산맥이 금빛으로 물드는 풍경을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방문하는 마을이었습니다. 저 또한 그 일출을 보기 위해 게르게티 성당이 보이는 언덕 위의 방을 얻어 매일 아침 산의 일출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금빛으로 물드는 산맥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만큼 장엄한 모습이었습니다.
스테판츠민다 마을은 호텔 몇 개와 민박을 운영하는 작은 가정집들 몇 채가 모여있습니다. 소와 돼지가 길을 돌아다니고, 송아지만큼 커다란 강아지들이 길을 다니곤했어요. 비탈길 아래로 내려가면 표지판 없는 정류장과 음식점 두 곳, 그리고 작은 마트가 있었습니다. 하루면 모두 구경할 수 있을 만큼 작은 마을이었어요. 겨울 산의 밤은 빠르게 찾아오고 길게 이어집니다. 마을에 머물며 밀린 여행일기를 쓰다 지루해지면 입김이 나오도록 추운 밤, 가로등마저 흔치 않은 어두운 마을 공터에 앉아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어요.
잠든 마을은 고요했고, 옆에 앉아 곁을 지키는 송아지만큼 커다란 강아지의 숨소리, 겨울바람에 속삭이는 들풀의 소리만 들려왔습니다. 옷깃이 스쳐 바스락대는 소리가 요란하게 느껴질 정도로 고요하던 그 밤, 하늘에선 별이 반짝였습니다. 종종 보곤했던 글귀처럼 쏟아질 것처럼 별로 꽉 찬 하늘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잔잔한 쉼을 주기에 충분한 양의 별이었어요. 고요한 밤,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면 하루의 무게가 자잘한 알갱이가 되어 시간의 틈으로 스르르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그 고요한 빛의 시간이 저는 참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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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태국을 여행하던 어느 날, 히피와 예술가들이 머무는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림이 가득 걸린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방문객들이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종이와 붓, 재료를 알 수 없는 물감이 가득 쌓여있었습니다.무엇을 그릴까 고민하다, 푸른색으로 종이를 채웠고 그 위에 'Light-full'이라는 단어를 적게 되었습니다. 단어를 적어 내리는 순간, '빛으로 가득하다'라는 의미가 무게를 가지고 마음속에 내려앉은 듯했습니다. 스스로 살고 싶은 삶의 정체성이 마침내 단어로 표현되었다는 느껴지는 순간이었어요.그 후 'lightfull'이라는 단어에 저만의 의미를 더해 'live lightfull life'라는 문장을 적게 되었어요. 문법적으로 완전하진 않지만, 문장에 담고자 했던 의미는 '빛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자'라는 다짐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생에 있어 '빛나는 순간'이란 얼마나 될까요? 섣불리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빛나는 날들은 흔한 순간은 아닐 거예요. 어쩌면 빛나는 순간보다 어두운 순간이 더 길지도 모르겠지요.
하지만 그 어두운 순간 속에도 빛은 있습니다. 캄캄해 보이는 우주를 들여다보면, 수없이 많은 별이 반짝이고 있는 것처럼요. 평범해 보이는 하루에도 늘 빛나는 조각이 숨어있어요. 하나둘, 빛나는 작은 하루의 조각을 모아 소중히 여긴다면, 어느새 빛으로 가득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요? 밤의 숲을 빛의 숲으로 만드는 반딧불이의 빛처럼, 어두운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태양처럼 환히 빛나지는 못하더라도, 작은 빛은 어둠을 이기고 풍경의 주인이 됩니다. 그렇게 작게 빛나는 순간들을 그림으로 담다보면, 언젠가 별처럼 많은 순간을 기록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는 반짝이는 별을 담는 마음으로 기억을 그림에 담습니다. 그림에 담긴 빛나는 순간의 이야기가 저에게 그랬듯, 누군가에게 전해져 작은 별과 같은 위로가 되길 바라면서요.
글을 마치며, 전해드린 이야기와 그림들이 또 하나의 작은 빛으로 전해지길 바랍니다.
가울 드림
매달 그림과 글을 한 편의 레터로 엮어 발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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