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숲의 아름다움
비 내리는 숲을 걸어본 적 있으신가요? 비로 덮여 한 층 깊은 색을 내는 풍경과 나뭇잎을 두드리는 무수히 작은 소리, 낙하하고 부서지는 빗방울을 따라 공기에 가득 퍼지는 숲의 향... 비 내리는 숲은 화창한 날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화창한 날의 숲만을 경험했다면 알 수 없을 감각이에요.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을 다녀온 뒤로, 저는 비 내리는 숲을 걷는 일을 주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론 신발에 진흙이 묻어 더러워지고, 머리칼을 적신 빗줄기를 따라 옷자락이 축축하게 젖게 되더라도 말이에요. 플리트비체의 기억은 손바닥을 모아 건져낸 호수의 맑은 조각처럼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반짝입니다.
요정의 숲을 향해서
플리트비체를 처음 접한 건 한 TV 프로그램이었습니다. 화면 속 플리트비체의 모습은 동화처럼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웠습니다. 푸르른 하늘 아래 빛나는 호수와 그 물의 색을 닮아 신비한 색을 띠는 나무, 그리고 나무줄기 사이로 굽이쳐 흐르는 폭포가 어우러진 숲은 작은 요정이 뛰어놀 것만 같았습니다. 그 모습이 잊히지 않아 언젠가 꼭 플리트비체를 가보리라 결심했습니다.
어려서부터 흙과 풀의 향이 좋았고, 돌 틈의 작은 이끼며 나무 아래 자라난 작은 꽃잎을 바라보는 일이 즐거웠습니다. 작은 발견과 경이로움이 가득한 모든 숲은 그 어떤 곳보다 많은 상상을 하게 합니다. 깊은 동굴 속 가느다란 빛을 따라가면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요? 저 굽어지는 길 너머엔 또 어떤 아름다운 풍경이 있을까요.여행을 갈 때마다 숲이며 산을 항상 일정에 넣게 된 건, 때론 가보고 싶은 숲을 가기 위해 여행을 떠나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그렇게 크로아티아 역시 오로지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을 위해 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몇 년의 시간이 흘러 크로아티아에 도착하자, 예상치 못한 비가 한창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저에게 숲이란 가장 좋은 날씨가 오길 기다리다 찾아야 하는 장소였습니다. 물기를 머금은 길은 위험할 수도 있고, 젖은 운동화를 신는 건 정말 피하고 싶은 일이었거든요. 비 내리는 날엔 따스하고 뽀송한 곳에서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줄기를 멍하니 바라보는 일이 최고라 생각했습니다. 왜 하필 오늘 비가 내리는 걸까? 하루만 늦게 비가 내렸다면 얼마나 좋아. 멈출 기색 없이 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야속하단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그냥 자그레브 시내를 구경하고, 플리트비체는 다음에 갈까? 하지만 그 때도 비가 내리면 어쩌지? 다음 번에도 비가 오면, 그 다음이라고 해가 뜰까.
날씨는 통제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이었고, 불확실한 행운을 기대하며 비가 그치길 기다리다 숲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플리트비체에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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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향한 플리트비체의 기억은 온통 물입니다. 숲을 향하던 순간부터 돌아오던 때까지 계속해서 내리던 부슬비, 범람해 종아리까지 차올랐던 옥빛 호수, 그리고 굽이쳐 흘러 바람결에 비와 함께 흩어지던 폭포까지. 모든 시선에 물이 가득했습니다.
잔잔히 내리는 비는 풍경을 부드럽게 흐트러트렸고, 하얗게 튀어오르는 물방울을 따라 번진 숲의 색이 허공을 물들였습니다. 피어오르는 물안개 속으로 부드럽게 번진 숲의 테두리는 신비로운 풍경을 더욱 환상적으로 만들었습니다.
플리트비체에서 보낸 순간들은 문득 일상 속에서 닮은 밀도의 비를 만나거나, 꼭 닮은 초록을 발견할 때마다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르곤 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마다 그 경험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곤 했어요. 여행을 다녀와 그 기억을 그림으로 그리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리는 편입니다. 그렇게 여러번의 고민과 해석 끝에 처음으로 플리트비체의 기억을 담은 그림이 바로 아래의 '비의 숲' 작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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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숲을 그리며
'비의 숲' 그림을 그리는 동안 공기 중에서 부서지던 빗방울들, 시야 가득한 에메랄드빛 숲을 떠올렸습니다. 숲 위에 낮게 내려앉았던 부드러운 먹구름과 은은한 햇살, 흐린 날씨에도 맑고 선명한 옥빛을 띄던 호수... 너무나 선명한 채도에 습기가 배인 모든 옷의 모서리와 찌걱이는 운동화에도 그 색이 스며들 것만 같았습니다.
그 풍경을 그려내고 싶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종이에 물을 담뿍 먹이고 크고 넙적한 붓에 물감을 개어 푸른색과 에메랄드 색을 가득 채웠습니다. 풍부한 물 속에서 번지기 시작한 색은 통제할 수 없어요. 원하는 모양을 내려 자유롭게 흐르는 물의 방향을 비틀고 붓질을 더할수록 색은 되려 탁해집니다. 밑색을 망치지 않으려면, 손을 떼어야 할 시점에 멈추어야합니다.
밑색이 충분히 종이에 스며들면 둥근 모양의 붓을 들고 종이가 완전히 마르기 전 먼 숲의 나뭇가지를 채워넣었어요. 물안개 속에 희미하게 번진 나뭇가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손을 빠르게 움직여야 했습니다. 수채화를 그리며 가장 긴장될 때는 종이에 물을 바르기 시작한 순간부터 처음 먹인 물이 완전히 건조되기 전까지의 시간입니다. 이미 물감이 올라간 종이에 다시 물을 먹이면 얼룩이 지고, 탁해집니다. 바탕색이 엉키지 않으려면 번지기 기법이 필요한 부분은 종이가 마르기 전에 빠르게 해내야해요. 다행이 '비의 숲' 작업은 그 단계를 의도한 대로 해낼 수 있었습니다.
바탕 작업이 끝나면 이제 쉬엄쉬엄 디테일을 쌓아갈 수 있습니다. 욕심가는 만큼 충분히 시간을 들여서 할 수 있어요. 조급해 하지 않고 종이가 충분히 마르길 기다린 뒤에 가장 얇은 붓으로 숲의 작은 요소들과 점점이 흩어지는 비와 물안개를 하나씩 찍어 그리기 시작했어요. 물감을 흩뿌리면 쉽게 점을 채워넣을 수는 있었겠지만, 점의 크기와 위치를 조절하기가 어려워 제가 경험한 비의 모습을 표현하기엔 적절하지 않았습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차근히 그릴 수 있는 가장 작은 점들로 그림에 채워넣었습니다.
'비의 숲' 그림은 제 그림 중 참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시는 그림 중 하나입니다. 종종 플리트비체를 다녀오신 분들은 그림을 가르키며 '정말 이랬다'며 같이 계신 분들에게 말하시곤 해요. 그런 말을 듣게 되면 플리트비체의 풍경을 제 나름의 방식으로 잘 표현한 것 같아, 기뻐집니다.
'비의 숲' 작업을 완성하고 3년 뒤 또 다시 플리트비체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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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 한 이야기
2020년 여름, 여러 개의 스케치를 했고, 총 다섯 개의 작업을 완성했습니다. 오늘 글과 함께 담긴 '플리트비체의 폭포', '인어가 잠든 호수', '플리트비체의 인어' 그리고 '동굴 속의 빛'과 '작은 폭포가 흐르는 호수를 건너서' 작업입니다. '비의 숲'의 그림으로 미처 표현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작업을 따라 숲의 시간을 정리하면 '동굴 속의 빛'을 따라 호수를 발견했고, '작은 폭포가 흐르는 호수를 건너서', 그리고 '비의 숲'을 지나 '플리트비체의 폭포'를 만났고, '인어가 잠든 호수' 플리트비체와 작별했습니다. 그 중 '플리트비체의 폭포'는 '비의 숲'의 쌍둥이 작업으로 그려졌어요. 그래서 동일한 크기로 그려 함께 걸어두고 싶었습니다.
오랜만에 큰 종이에 그림을 그리려니 꽤 긴장이 되었어요. 작은 크기의 작업들을 먼저 완성하고, 충분히 손을 푼 뒤에 오랫동안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플리트비체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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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가 품은 인어의 숲
요정이 사는 숲을 기대하고 찾았던 플리트비체를 막상 직접 눈에 담자, 들꽃 같은 요정보다는 호수의 색을 닮은 머리칼과 이끼색 비늘을 가진 푸른 피부의 인어가 호수 아래서 잔잔히 헤엄치고, 쏟아지는 비에 촉촉해진 풀밭 위에 몸을 뉘이고 휴식을 취하는 인어가 떠올랐어요. 그런 상상을 그림에 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길이 잠겨 맨발로 걸어가 마주했던, 플리트비체의 숲의 가장 커다란 폭포를 보았을 때의 감동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비에 불어난 폭포는 어디까지가 비이고, 어디부터가 폭포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몸을 두드리는 물방울과 시야를 가득 메운 물의 풍경 너머 폭포는 인어의 숲을 보호하고 무한한 생명력을 건네주는 어머니처럼 느껴졌어요.
그 감동을 담아 폭포를 숲의 머리칼로 표현하고, 그 머리칼 안에서 피어나는 나무들과 비를 맞으며 휴식하는 인어의 모습을 그림에 숨겨두었습니다. 완성된 작업은 액자에 넣어져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 중 하나인 거실에 '비의 숲'과 함께 나란히 놓여져있습니다. 숲이 주는 상상의 힘은 놀라울만큼 커다래서, 많은 시간이 지난 오늘도 이 글을 쓰며 또 다른 스케치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스케치는 언제 그림으로 옮겨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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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는 풍경도, 안개가 내린 풍경도, 뙤약볕에 눈이 부신 풍경도, 각자가 주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엔 나가 노는 데에 날씨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비가 오는 날엔 몸을 두드리는 빗방울을 만끽하며 물웅덩이에서 뛰어놀았고, 더운 날엔 땀을 뻘뻘흘리며 매미를 찾아다녔습니다. 눈이 오는 날은 최고였습니다. 온 세상이 놀이터처럼 느껴졌어요.
조금씩 성장하며 불편한 것과 편한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고, 즐거움 뒤에 따라오는 일들을 걱정하느라 즐거운 순간 그 자체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에 더해 어느 순간 좋은 날씨와 나쁜 날씨를 구분지으며 그 날 하루의 기분을 정해버리곤 했어요. 참 아쉬운 일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여행은 어린 시절의 감각을 다시금 돌아오게 합니다. 날씨에 상관없이 하고싶은 일을 하고, 후회도 즐거움도 오롯이 충분히 채워진 하루의 몫이 됩니다. 멈추지 않는 비에 길 걱정만 가득하던 아침의 두 사람이 빗 속을 걸으며 깔깔대며 웃던 기억은 아직까지도 참 소중한 기억입니다. 물론 그 날 밤 완전히 골아떨어졌지만 말이에요.
푸르른 옥빛의 호수가 넘쳐흐르는 비의 숲, 플리트비체의 기억은 흐르는 비에 신이 나 뛰어노는 인어의 천진한 미소가 담긴, 여울져 반짝이는 물입니다.
매달 그림과 글을 한 편의 레터로 엮어 발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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