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다 보면 종종 그림으로 남기고 싶은 순간을 만나게 됩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거나, 뜻밖의 발견을 하거나, 특별한 경험을 하는 순간들을 마주치면 그림으로 그리고 싶다고 생각하곤 해요. 그럴 때면 온 마음을 푹 담가 순간을 만끽하려 합니다. 에펠탑의 빛을 마주한 순간은 아름다운 풍경과 특별한 경험, 그리고 뜻밖의 발견이 교차한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래서 꼭 그림으로 그리고 싶었어요.
그림을 그리면 그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납니다. 마치 여행을 다시 한번 다녀온 기분이 들어요. 파리의 그림을 그리는 동안 푸른 하늘 아래 노트르담 성당이 기억났고, 센느 강변을 따라 에펠탑으로 걸어가던 길을 나란히 걷는 듯했습니다. 셰익스피어 서점의 오래된 책의 향기,센느 강가에서 흩날리던 버드나무 가지들과 몽마르트 언덕의 햇살, 그리고 에펠탑을 보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던그날의 하루의 크고 작은 시선이 생생히 떠오릅니다. 그렇게 완성된 그림을 바라보면 그림을 그리는 동안 떠올랐던 모든 순간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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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함을 채우는 낭만의 힘
돌아보니 파리 여행은 참 무모했습니다. 여유롭지 않던 여행경비를 생각한다면 조금 더 물가가 저렴한 곳을 가는 편이 훨씬 편하고 풍족했을 거예요. 그러나 현명치 않은 결정이라도 모네와 르누아르, 고흐와 상뻬가 살던 곳, 에펠탑이 반짝이고 센느 강이 흐르는 파리에 잠시나마 머물러 보고 싶었습니다. 대학을 막 졸업하고 삶의 방향을 묻던 시절, 저는 파리에서 위대한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보며 답을 얻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주 작은 힌트라도 얻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요.
파리에 아주 짧은 시간 머물기 위해 많은 부족함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버스비를 아끼느라 무작정 걸어 다녀 발바닥엔 물집이 잡히고 터지길 반복했고, 바게트 하나를 두 끼 동안나누어 먹어야 했습니다. 여유로운 커피 한 잔, 제대로 된 식사 한번 하지 못한 채 이어지던 모든 순간이 마냥 좋기만 했다면 거짓말일 거예요. 에펠탑을 향하던 길은 가장 초라했던 순간이었습니다. 내내 걸어 다녀퉁퉁 부은 다리를 끌고 센느 강변을 따라 걸어가던 길, 느닷없이 소나기가 내렸습니다. 우산을 쓰고 분주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파리 사람들 사이에서 길을 잃은 기분이었어요. 남은 거리가 가늠되지 않는 길을 걸으며 참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피로가 짙어지니 아름답게만 보이던 파리의 풍경도 제 색을 잃는 것만 같았습니다.
부슬비가 내리는 센느 강의 물결을 바라보며 걷는 동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두서없이 떠오른 생각이었습니다. 낭만이란 뭘까? 왜 사람들은 여행을 통해 낭만을 찾을까. 나는 왜 낭만을 그리며 이곳에온 걸까? 골똘한 생각 속에서 불쑥 ‘낭만은 원래 돈이 없어야 하는 거래, 그러니까 우린 지금 낭만 속에 있는 거야’란 말이 튀어나왔어요.
다듬어지지 않은 말이었지만 놀랍도록 그 순간이 괜찮아졌습니다. 이 길이 낭만을 향한 길이라면, 힘을 내어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이후로도 오랜 시간 마음에 남아 다듬어진 문장이었습니다. 낭만이란 부족함과 불완전함을 채우고 완전한 충족감을 선물하는 가치가 아닐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날, 낭만은 에펠탑으로 향하는 길 위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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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의 빛
긴 길의 끝, 마침내 트로카데로 광장 앞에 도착했을 때 에펠탑은 점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핑크빛 석양이 물들기 시작한 하늘 앞에 서 있는 에펠탑은 상상 이상으로 거대했고, 언제든 빛날 것만 같았어요. 남은 힘을 쥐어짜 내 언덕 위로 달려갔습니다. 어서 높은 곳에서 에펠탑이 빛나는 모습을 보고 싶었어요.광장 가장 높은 곳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을 때 ‘와!’하는 탄성이 들려와 앞을 바라보니 광장에 선 사람들의 얼굴에 감탄이 떠올라 있었습니다. 에펠탑이 빛나기 시작한 걸까? 어떤 풍경일까.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광장 위로 달려갔습니다. 긴 거리를 걸어 찾아온 만큼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서 보고 싶었어요.
마침내 광장 위를 올라 뒤를 돌아보았을 때, 황금빛으로 빛나는 에펠탑이 저편에 우뚝 서 있었습니다.
단정한 파리의 스카이라인 사이로 우뚝 서 있는 에펠탑이 시야를 가득 채우며 반짝이고 있었어요. 힘껏 달려 벅찬 숨만큼 부풀어 오른 마음이 두근거렸습니다. 황홀한 풍경이었어요. 황금빛으로 빛나는 에펠탑은 하늘의 색채가 짙어질수록 더욱 환하게 빛났습니다. 빛나는 에펠탑을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모든 게 괜찮아지던 순간이었습니다. 배고픔도, 추위도, 물집이 터진 발바닥의 통증도, 파리를 오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모두 가치를 되찾고 있었습니다.
이내 해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며 하늘이 푸른빛을 내며 광장을 덮었고, 사람들은 파란 바다에 자라난 해바라기처럼 빛나는 에펠탑을 바라보았습니다. 에펠탑의 빛을 머금어 따스한 미소를 띈 사람들 사이에 나 또한 풍경의 일부가 되어 모든 소리와 공기를 맛보고 있음이 깊은 기쁨이었습니다.
광장의 계단에 앉아 반짝이는 에펠탑과, 에펠탑을 바라보는 사람을 보았어요. 탱고의 선율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 나와 같이 비에 젖은 머리칼로 에펠탑을 보며 웃고 있는 사람, 기념품을 팔고 있는 장사꾼들과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사람… 에펠탑의 빛 속에서 사람들은 풍경의 일부가 되고, 또 저마다의 풍경에서 주인공이 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에펠탑이 그렇게까지 고생해서 볼만큼의 가치있는 풍경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나에겐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도, 누군가에겐 별 볼 일 없는 시시한 모습일 수 있죠. 같은 공간을 여행한 모두가 같은 경험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의 풍경은 세상에서 단 하나뿐입니다. 그리고 전 제가 바라본 에펠탑의 모습을 그림으로 기록합니다. 그 풍경은 무척이나 아름답고, 찬란했습니다.
가능한 많은 순간을 기억하려 애써도 파리에서의 많은 순간이 흐릿해졌습니다. 그 날 밤 늦은 저녁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호스텔의 삐걱대는 침대에서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 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모든 순간을 다 담아내기에 오늘의 시간이 너무도 짧습니다. 대신 놓치지 않은 순간들이 있어요. 기록은 강에서 사금을 찾아내는 일과 닮았습니다. 매일이 흐르는 기억의 강에서 흘러보내야할 것을 놓아주고, 반짝이는 순간이 사라지지 않도록 건져올립니다. 언젠가 오랜 시간이 지나 지난 삶을 돌아보았을 때 세상은 참 찬란했다,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요.
이만 오늘 편지를 줄이려 합니다. 그림 속의 빛처럼, 당신의 하루에도 빛나는 조각이 있기를 바랍니다.
에펠탑의 기억을 담아 가울 드림
매달 그림과 글을 한 편의 레터로 엮어 발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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