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의 나를 결승선을 지나 숨을 몰아쉬는 단거리 선수로 기억한다. 패션 기업의 브랜드 디자이너로 일할 때였는데, 하반기에 필요한 작업물의 마지막 발주까지 마친 후 겨우 한숨 돌리고 있었다. 이직 제안을 받은 건 딱 이 시점이었다. 단거리 달리기를 마치고 다음 경기를 준비하며 다시 운동화 끈을 매보려 했을 때.
이직을 제안한 회사의 디자인 리더는 나의 첫 회사였던 디자인 전문 에이전시에서 고객으로 만났다. 2년 전 함께 진행한 프로젝트에서 나를 기억하고 본인이 이직하면서 팀원으로 부른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소감은 굉장히 감사하고 뿌듯했다. 2년 전 프로젝트로 야근을 정말 많이 했기 때문에 그 시간을 알아준다는 기분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예고없이 찾아온 이직 제안이라 당황했고, 당시 세워놓았던 계획을 모두 수정해야 했다.
그렇다고 다니던 회사와 제안 받은 회사를 객관적인 조건만 놓고 따져서 결정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브랜드 디자이너로 일하면 문제의 본질을 정의하고 결과값(디자인)을 위해 논리적인 흐름을 설계하는 작업을 하는데, 이직에 대해서도 일할 때처럼 접근해봤다. 내가 가진 업무 성향과 강점 역량은 무엇이고, 이직을 결정할 때 어떤 요소가 기준이 되어야 할까?
이직을 제안받은 8월 당시 다니던 회사는 첫 이직으로 가게 된 두 번째 회사였다. 이때는 디자인 전문 에이전시의 그래픽 디자이너에서 인하우스의 브랜드 디자이너로 옮겼다. 에이전시에서는 클라이언트의 업무 요청 범위에 따라 단기적 목적을 위해 여러 프로젝트를 넘나 들며 일했다. 여기서 파악한 나의 업무 성향은 한 가지 주제에 깊은 몰입력을 발휘하고, 큰 맥락 안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며 긴 호흡으로 일하는 것이다. 회사의 장단점을 따지기 이전에 에이전시라는 '직장'의 형태는 나의 업무 성향에 비교적 맞지 않았다. 반면 인하우스는 장기적인 관점으로 구성원들이 공동의 목표와 주제를 향해 병렬식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최소 3개월에서 3년 이상까지 장기적인 계획 아래 실행해보고, 회사와 브랜드가 성장하는 여정에 구성원으로 함께하고 싶었다. 업무 성향을 고려해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한 직장의 형태는 에이전시보다 인하우스가 맞을거라 예상한다.
업무 성향에 맞는 곳이 인하우스라면, 조직 내에서 내가 맡을 수 있는 역할은 뭘까?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을 하며 키워온 역량은 기획을 통해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타이포그래피와 일러스트레이션을 매개체로 활용하는 구현력이다. 기업의 브랜드 디자이너로 일해보니 강점 역량이 조금 더 뾰족하게 보이기도 했다. 분석력으로 상황과 정보를 파악하고 브랜드의 문제를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디자인과 콘텐츠를 만들어 브랜드의 장기적인 로드맵을 그릴 수 있는 연결성이 있다. 나의 역량을 온전히 발휘하려면 디자인이 기획을 구현하고 담을 수 있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콘텐츠로 작용하는 브랜드 디자인이 되어야 한다.
다니던 회사와 이직을 제안한 회사 모두 나의 업무 성향에 맞는 환경(인하우스)이고 브랜드 디자이너 직군이라는 점은 같았다. 차이점은 제안받은 자리가 나의 강점 역량을 좀 더 적극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포지션이었다. 회사 안에서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은 누구든 나를 대체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면 곧 나의 경쟁력이 된다. 이직을 제안한 디자인 리더는 함께 진행했던 프로젝트에서 나의 강점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자리를 제안했다. 강점을 알아봐 주는 리더의 팀에서 내가 좋아하고 자신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이유는 없었다.
업무 성향과 강점 역량이 이번 두 번째 이직을 결정한 가장 큰 요소였고, 부수적으로 여러 기준을 세워 제안받은 자리가 적합한지 고민했다. 몇 가지 요소를 이유와 함께 공유해본다.
평소 관심이나 경험이 전혀 없었던 업계로 이직을 제안받았기 때문에 입사하면 개념과 용어부터 익혀야 할 정도로 무지했다. 하지만 그래서 이직 결정에는 보탬이 되었다. 해당 업계에서 경력을 쌓은 사람들과 다른 시각으로 문제를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업계를 공부하면서 내가 보고 듣는 세계를 넓히겠다는 포부도 있었다.
기존 업계와는 다른 관점으로 사업을 전개하고, 나의 관심사인 '데이터'를 다룬다는 점에서 회사의 비전을 좋게 봤다. 이직을 제안한 리더를 통해 팀의 비전을 그려볼 수 있었고 일단은 확신이 들었다. 설립 3년 차의 회사와 생긴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팀은 브랜드 디자이너의 역할을 기대해볼 수 있는 환경이라 여겼다.
이번 이직으로 인해 생기는 새로운 경력이 이전 경력, 그리고 다음 경력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로 적합한지 고민했다. 예상치 못한 업계로의 이직이었지만 직무의 중장기 계획에서 빗나가는 방향은 아니었고 오히려 이번 이직의 불확실함보다 이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경력의 기회들이 더 크다고 느꼈다.
연봉과 복지, 물리적인 환경 등 현실적인 조건은 이전 회사와 비교하면 드라마틱하게 좋아진 건 아니므로 보편적인 기준을 충족하는 선에서 협의를 마쳤다. 물론 이직 결정을 망설이게 한 부정적인 요소들도 분명 있다. 내가 예상한 게 맞는지 실제로 지내면서 판단해보고, 다음 이직을 하게 된다면 그때 공유해 볼 수 있겠다.
모든 문제에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사람인 것처럼 글을 쓰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고민이 있을 때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결국 감정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직 제안을 받은 날부터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만 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감정이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면 애초에 고민을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고민할 가치도 없는 일이다'라는 말 뒤에는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된 대상에게 나의 어떠한 노력도 들이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반대로 지금 고민하고 있는 일은 내게 긍정의 감정을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에, 감정이 움직이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면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이유가 충분하다. 이직이든 아니든, 더 나은 변화를 위해 고민하는 모든 시간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