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클

오래 걸린 엄마의 꿈

김나훔| 2022.03.17

2000년, 내가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해. 엄마는 우리 남매를 데리고 서울에서 속초로 내려왔다. 젊었을 때도 요리 실력이 출중해 주변 사람들에게 늘 칭찬을 듣던 엄마는 그곳에서 삼계탕 장사를 준비하며 새 출발을 꿈꿨다. 경험도 자본도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과감하게 식당을 개업했고 힘든 여건 속에서 우리를 홀로 키웠다.

가게 이름은 찰 '만'에 달 '월' 을 써서, 꽉 찬 달을 의미하는 '만월'이었다. 낯선 속초로 이사를 와서 지내는 동안 방 한구석에서 한자사전을 뒤지며 좋은 상호명을 찾던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가게는 속초 조양동 골목 깊숙이에 자리한 한옥 집이었다.

지금도 솔솔 풍겨오는 닭백숙이나 삼계탕 냄새를 맡으면 예전 우리 가게의 풍경이 떠오른다. 다행히 엄마의 음식 솜씨가 좋아, 한 번 요리를 맛본 손님들은 자주 다시 찾아오고는 했다. 서울에서 속초까지 먼 걸음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오는 손님도 있었고, 대학교수나 유명인들도 찾아올 정도였다. 여름 복날에는 가게에 사람이 몰려 재료가 다 떨어져 장사를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멀리서 왔다며 재료를 사서 해달라고 으름장을 내던 사람들도 기억한다.

하지만 장사는 역시 장기전이었다. 식당이란 게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단골을 모아야 하는데 워낙 후미진 곳에서 자본도 없이 시작한 터라 계속 끌고 가기에는 신체적으로나 재정적으로 버거운 상황이 닥치고 말았다. 지금처럼 편리하고 비교적 저렴한 홍보수단인 SNS 같은 게 있던 시절도 아니었고, 열 살 안팎의 나이였던 나와 동생은 엄마를 돕기엔 너무 어리고 작았다. 결국 가게는 문을 닫았고 엄마는 절망할 새도 없이 또 다른 생계수단을 찾아 나서야 했다.

시간이 흘렀고, 우리 삼 남매는 무사히 잘 성장했다. 그 과정은 결코 녹록지 않았지만 그 거친 시간들이 더 우리 가족을 응집하게 만드는 동력이 됐다. 누나는 간호사가 되었고 여동생은 국어 선생님이 되었다. 모두 자기 일에 애정과 사명을 갖고 있다. 나 또한 이렇게 그림을 그리고 글도 쓰는 사람이 되었고 만족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길을 걸어가게 되었고 그 밑바탕에는 적성은 커녕 우릴 먹이기 위해 손에 잡히는 대로 노동을 해왔던 엄마의 희생이 있었다. 늘 마음 한 켠에는 부채감이 있었다. 부모 마음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엄마가 무엇을 잘하는지 또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에 더 이상 돈만 좇으며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일을 하며 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늘 있었다.

연금이나 용돈을 받으며 아무것도 안 하며 편하게 늙어가는 것도 좋지만, 일하면서 보람을 느끼며 가치 있게 하루하루 나이 들어가는 삶이 더 아름답다고 늘 믿고있다. 그렇게 내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자립하는 것 만큼이나 엄마의 온전한 자립 또한 내게는 하나의 꿈이 되었다.






"우리 엄마 요리 정말 잘 해"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면 보통 “다 자기 엄마 밥이 최고지~”라고 말한다. 동의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 모든 엄마가 정말 우리 엄마처럼 요리를 잘하고 또 즐긴다고?’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가끔 엄마 음식을 먹고 나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걸 나만 먹는다는 게 인류에 참 미안하네~”라고 너스레를 떨곤 했다. 그럴 때면 엄마는 그냥 웃었다. 자영업을 한다는 것, 특히 외식업에 뛰어든다는 것은 자본과 용기 그리고 운도 어느 정도 작용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난 엄마에게 몇 년 전부터 종종 가게 운영을 권유했다. 엄마는 식당일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며 늘 선을 그었다. 나도 엄마가 몸을 혹사시키며 장사를 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다만, 이제 자식들도 다 키워놨으니 오직 본인을 위해 즐기면서 손님도 만족시킬 수 있는 작은 규모의 가게를 시도해보면 어떨지를 꿈꿨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을 실행하는 것은 힘들었다.

시간이 흘러 엄마는 강릉으로 이사를 왔다. 이유는 그냥 강릉이 좋았기 때문. 그 후로 1년 뒤 나도 같은 이유로 강릉에 이사를 왔다. 우리를 키우는 방식이 늘 그랬듯 엄마는 거처를 옮기면서 동시에 먹고 살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이런 저지르고 수습하는 방식, 너무 익숙하다... 난 엄마를 닮았구나.)

몇 번의 이직과 방황이 계속됐다. 취업난이라고들 하는데 지방이면서 관광지인 이 곳에서 엄마 나이에 정당한 보수와 일자리를 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 동안 우린 심난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몇 번의 가족회의 끝에 거창하진 않아도 작게나마 엄마가 잘할 수 있는 요리로 식당을 해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모두 찬성했다. 엄마는 일손이 많이 가지 않으면서 본인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얼마 후 가족들에게 메뉴를 단팥죽으로 정했다고 했다. 여러 번의 테스트를 거쳐 맛있는 단팥죽을 포함한 몇 개의 죽이 탄생했다. 역시 맛있었다. 하지만 난 단팥죽을 먹어본 일이 몇 번 없어서 그 맛의 시장가치랄까…그런 걸 책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양한 의견을 묻기 위해 강릉에서 외식업을 하는 분들에게 평소 감사의 인사도 드릴 겸, 시식 단팥죽을 돌렸다.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강릉의 유명한 카페에 한 대표님은 서울에 유명한 단팥죽집들보다 맛있어서... 울뻔했다고- 까지 말을 하셨다. (자화자찬하는 것 같아서 좀… 고민하다가 내 칭찬은 아니니 그냥 쓴다.) 본인 가게에서 장사해보지 않겠냐는 파격적인 제안도 해주셨으며, 얼마 후엔 단팥죽 포장 10인분을 좀 살 수 있냐는 연락도 주셨다. 기쁘고 감사했다.

덕분에 엄마는 큰 자신감을 얻었다. 그리고 작년 11월. 네 평 남짓의 좁은 가게 자리 하나를 얻었다. 월세가 싼 만큼 가게 자리라고 하기에도 뭐한 좁은 공간이지만 엄마의 소박한 꿈을 펼치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원래 작은 창고로 방치되어있던 공간이다.



손님은 바 형식으로 7인 정도의 손님을 받을 수 있다. 디자인, 인테리어 같은 것들은 최대한 지출 없이 자력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늘 아낌없는 조언과 격려를 해주는 인혁이형과 내 정신적 지주 성경이가 작업을 흔쾌히 맡아주었다. 엄청난 능력자들... 너무 고맙다. 상당부분은 셀프시공을 해야 했는데, 목수가 만들어 놓은 가구에 색을 입히는 과정이 가장 힘들었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손님이 앉아서 먹을 테이블이라 나름 심혈을 기울였지만 역시 엉성하다… 어쨌든 배울 점이 있었다.

주장 강한 우리는 때론 의견 충돌로 티격태격했지만 협의를 거쳐 좋은 결과를 낳았다. (고맙게도 과하게 힘이 들어간 아들놈에게 대부분 양보를 해주었다.) 상호는 ‘모락모락 단팥죽’. 모락은 어미 ’모’ 즐길 ‘락’을 넣어, ‘엄마가 즐거워서 하는 가게’라는 의미를 넣었다.

오늘. 블라인드 설치까지 모든 작업을 완료했다. 2월 10일 월요일, 가오픈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작년 말부터 내 일도 재껴두고 이렇게 여기에 매달려 있는 데에는 그만큼 큰 사명과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대관령 풍경의 커다란 단팥죽 그림을 그렸다. 가게는 작지만, 크고 작은 사람들의 손길이 하나하나 담긴 공간이다.

내가 창작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불안해도 묵묵히 이 길을 가기로 정한 것처럼, 엄마도 이 가게에서 본인의 재능을 펼치면서 삶을 재미있고 가치 있게 다져갈 수 있으면 좋겠다. 물론 급한 마음 갖지말고 먼 곳을 바라보며 천천히...






간판에 불을 켤 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커다란 팥죽 일러스트를 그려서 커튼을 만들었다.




좋아요 13
공유하기

김나훔

[뭐]저자
사진과 글, 그림을 그리는 김나훔입니다.
목록으로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