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클

님아 이런 스타트업 가지 마오

박지수| 2022.06.16

나는 “실무에서 진짜 UX"를 하고 싶었고, 그걸 바탕으로 제품을 성공시키는 경험을 원했다.
그 경험을 하려면

1. 회사가 제품을 만드는 중인데
2. 내가 그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고
3. 팀원들도 고객의 중요성을 공감하는 곳

이어야 했다.


이 조건에 (일부라도) 맞는 회사는 엄마가 가지 말라고 하는 이름 모를 작은 스타트업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실상은 나의 기대와 많이 달랐고 시행착오는 끝이 없었다. 그럼에도 끝끝내 제품을 성공시키는 경험은 얻어냈다.

그 지난한 과정 속에서 수많은 회사와 사람들을 직간접적으로 만나고 나니, 나의 성공 경험의 8할은 운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인생의 굵직한 결정을 충동적으로 결정하는 편인 나는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봐야 정신을 차리는 타입인데, 그런 무식한 결정의 결과로 성공 경험을 얻어냈다는 건 기적에 가까웠다.물론 그 덕에 스타트업을 판단하는 기준과 보는 눈은 생겼다. 그 기준으로 선택한 지금의 회사는 제법 만족하고 있으니 과거의 나의 선택과 경험들을 애써 미화하며 지내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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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스타트업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뭘까?
비전, 시장성, 사업 아이템?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 대단한 일을 “누가” 하고 있느냐가 핵심이다.


문제는 모-든 스타트업이 “우리 회사는 엄청난 인재들이 엄청난 혁신을 만들고 있습니다!”라고 외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채용 공고에 쓰인 회사 소개 멘트를 그대로 믿진 말자. 당신을 꼬시는 그 말들은 실제 그들의 모습이라기보다 그들이 "원하는" 모습에 가깝다. 심지어 원하지도 않을 수 있다. 그럼 어떻게 좋은 스타트업을 판단할 수 있을까?


내가 추천하는 스타트업을 판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면접”을 보는 것이다. 면접은 지원자만 일방적으로 평가받는 자리가 아니다. 채용 공고, 면접 응대, 면접 진행, 그리고 결과 발표까지 전 과정을 경험해보면 그 회사의 수준을 알 수 있다. 특히 회사 임직원과의 대화는 그들의 내부 사정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시간이다.
나는 퇴사 후 새로운 회사를 찾을 때 평소 관심 있었던 회사는 무조건 면접을 봤다. 그리고 몇몇은 최종 합격을 전달받았음에도 입사를 포기했다. 모두 앞으로 소개할 "믿거 체크리스트"에 걸리는 회사들이었다.

만약 면접이 부담스러운 경력자라면 링크드인 등을 통해 (인사 결정권이 있을 법한) 주요 구성원이나 인사담당자 또는 채용담당자에게 가벼운 미팅을 제안할 수 있다. 대기업과 달리 스타트업은 인력난이기 때문에 생각보다 적극적으로 응해줄 것이다. 만약 그들과 연락이 닿았다면 조직 규모나 문화에 따라서는 대표를 바로 만나볼 수도 있다. 대표와의 미팅은 회사의 캐릭터를 파악할 수 있는 숏컷이다.
*현재 스타트업 재직자라면 우리 회사에 대입해보자. 만약 한 개라도 있다면 이력서를 준비할 것을 감히 권해드린다.



믿거 스타트업 체크리스트

1. 사회 초년생이 많다.

사회 초년생은 대체로 의욕이 넘치고 성장지향적이다. 그들은 하얀 도화지 상태이기 때문에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올바른 그림을 그려줄 양질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스타트업은 주니어를 키울 시간과 역량이 부족하거나, 없다. 따라서 스타트업의 주니어 비율은 10퍼센트를 넘지 않는 게 좋다. 이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스타트업은 순수한 주니어들을 대거로 뽑아두고, 그들의 커리어 패스에는 관심 없지만, 그들의 말도 안 되는 시행착오를 받아주느라 불필요한 에너지를 쓰고 있을 확률이 높다.


“왜 지각하면 안 되는가"에 대해 몇 시간 동안 열띤 토론이 벌어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아직 매출이 없는 회사에 본인의 업무 효율을 위해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이나 책상 밑 발판을 요구하는 신규 입사자를 달래는 일은 또 어떤가. 과장된 예시라면 좋겠지만 나는 이런 에피소드를 소설로 쓸 수 있을 만큼 많이 겪었다. (대체 왜 견뎠는지 모르겠다.)


물론 경력자가 많다고 무조건 좋은 회사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스타트업은 "자유"와 "방종"을 혼동하기 쉬운 환경이기에 주니어 비율이 높은 곳은 이런 비상식적인 일이 발생하기 쉽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대기업만치 빡빡한 규정은 스타트업에선 오히려 비효율적이다. 그래서 일단 각자 알아서 일하라고 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어디까지나 “회사의 성장을 위해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수준의 자유"다. 여기서 "회사의 성장을 위해서"라는 포인트는 모두가 외면하기 딱 좋은 포인트다.
따라서 각자의 자유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에 대한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처신과 대화가 통하는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있지 않으면, 회사 곳곳에서 이상한 일들이 발생할 것이다.



2. 대표가 이상하다.

스타트업은 구성원 모두의 주인의식을 요구한다. 하지만 인정하자. 스타트업 이꼴 대표, 대표 이꼴 스타트업이다. 나 역시 처음부터 이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세 번째 스타트업에 와서 다시금 확신했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다.


조직문화는 그 조직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 자체다.
모든 스타트업은 대표의 지인, 대표가 비즈니스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심지어 그의 개인적인 선호에 의해 선발된 5명 내외의 창업 멤버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이 주축이 되어 자신의 입맛에 맞는 내부 기준에 맞는 사람들로 몸집을 불려 간다. 즉, 대표 = 조직문화의 근간인 셈이다.


대표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해보는 방법 또한 간단하다. 그와 대화를 나눠보는 것이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것은 곧 해당 스타트업을 파악하는 것과 같다.만약 대표를 만나는 것이 죽어도 부담스럽다면, 실무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대표는 어떤 사람인지 왜 그와 일하고 있는지, 좋은 점은 무엇인지 등을 물어보자. 만약 그들이 쉽게 답을 하지 못하거나, 묘한 표정을 짓는다면 "뭔가" 있긴 있는 거다.


나는 이직을 고민하던 과정에서 20명 남짓한 IT스타트업의 A대표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1시간가량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와 일하고 싶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수학을 못하는 사람들이 주로 그런 식으로 의사결정을 하곤 하죠.(무능하다는 듯)", "사실 우리 회사에도 몸이 불편한 분이 있어요.(가십을 말하듯)"라는 식의 커뮤니케이션을 했다. 이런 스쳐 지나가는 표현 하나하나가 몹시 불편했다. 초면인 나를 대하는 태도도 이런데 함께 일하는 직원들에게는 어떠할지 안봐도 비디오가 아닌가. 회사 비전이 암만 좋다 해도, 이런 리더가 이끄는 회사에서는 일하고 싶지 않았다.


3. 대기업처럼 일한다.

열명도 안 되는 인원이 모인 회사에서 너무 많은 페이퍼 워크나 결재 절차를 고수하고, 모두가 대리, 실장, 과장, 차장 등을 노나 먹는 곳이 있다. 만약 당신에게 부장쯤 준다고 해도 도망쳐라. 그냥 직급 달려고 스타트업 시작한 사람들이다.


대기업에서 조차 탈피하려고 하는 구식 시스템을 따르는 스타트업은 구성원들에게 의미 있는 경험을 제공하지 못한다. 특히 디자이너 직군에 대한 이해력, 통찰력이 없기 때문에 디자이너를 마치 본인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주는 포토샵 기능사 또는 외주 인력쯤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면 웹, 앱을 만들려면 UX/UI 디자이너라는 직군이 필요하다고 하니 뽑긴 뽑는다. 그리고 나름 기획자 역할을 하는 실장이나 과장 등 뭔가 직급이 있는 자가 말도 안 되는 와이어 프레임을 던져준다. 그리고 기획에 대한 피드백은 쿨하게 받지 않는다. 디자이너는 GUI만 입혀주면 된다. (아마 그들은 "예쁘게" 만들어 달라고 할 것이다) 이런 스타트업에서 GUI를 10년 해봤자 연봉 5천도 받기 힘들어지는 현실에 현타가 올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런 환경에 처해있고 커리어와 연봉에 욕심이 있다면 당장 도망쳐야 한다. 대체 이런 환경에서 어떤 디자이너가 제품에 대한 주인의식과 애정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시장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어야 스타트업을 선택한 개인이 최소한의 의미를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살아남기 위해 “해야 되는 일”을 해야 하는데, 이런 곳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또는 "하고 싶은 일"을 나열하기 바쁘다. 그리고 N개년 로드맵을 짜기 위해 많은 시간과 비용을 허비할 것이다. 내년에 회사가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4. 고객에게 관심이 없다.

많은 스타트업이 제품이나 서비스를 통해 비즈니스를 성공시키려 한다. 따라서 우리 제품을 구매하거나 사용할 고객이 누구인지 연구하고 이해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돈가스집에 돈가스가 팔려야 먹고살 것이 아닌가.


고객에 대한 관심은 회사 차원에서, 즉 대표가 그 중요성을 피력하는 곳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대표부터 고객에게 관심이 있어야 한다. 개발부터 마케팅, 세일즈, CS까지 제품에 관여하는 모든 이들이 고객 경험을 만드는 당사자들이기 때문에 전사적인 공감대를 (억지로라도) 형성해두지 않으면 좋은 제품이 나올 수 없다. 고객이 외면하는 제품은 살아남을 수 없고, 살아남는다 해도 금방 성장에 한계가 올 것이다. 결과적으로 당신의 이력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있었던 첫 번째 스타트업 대표는 "내가 만들면, 누군가가 쓸 것"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시장성과 고객 니즈 같은 건 본인 머릿속에 있는 정보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실무진은 대표의 뇌내 가이드를 기준으로 제품을 만들어나갔다. 당연히 실패했다. 당시 가진 건 객기 밖에 없는 신입이었던 내가 "이거 아무도 안 쓸 거 같은데 다른 아이템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다가 "넌 그냥 그림이나 그려"라는 소릴 듣고 그 길로 퇴사했다. 뭐 그림을 그려도 될 것 같은 그림을 그려야지.
예상대로 그 회사는 세상에 존재했는지도 모르게 망했고 그나마 내가 참여했던 몇 개의 앱들도 모두 스토어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회사와의 만남은 나에게 아무짝에 쓸모없는 이력이 되었다.


5. 재무회계 담당자가 없다.

완전 초기 단계의 스타트업에는 재무회계 담당자가 없을 수 있다. 관점에 따라서는 필요성을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회사를 위해서도 직원을 위해서도 그들은 "있으면 좋은 게"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존재들이다.


스타트업은 투자금을 받으면서 크게 성장한다. 투자를 받기 위해서는 VC에게 회사의 재무상태와 경영실적을 전달해야 한다. 투자시기에 부랴부랴 준비하려면 너무 늦다. 평소에 관리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투자 라운드를 돌기 시작하면, VC에게 어떤 데이터를 전달할지 그가 대표에게 제안하고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이 과정에서 실수가 있다면, 이를 수습하기 위해 굉장히 많은 비용이 필요할 것이다. 최악의 경우 투자유치에 실패해 회사 운영에도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
반드시 재무회계팀이라는 이름의 부서나 직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회사의 자금 운영과 관련해 능숙하게 핸들링할 수 있는 프로페셔널이 최소 1명은 필요하다는 뜻이다.


사실 개인에게 있어 그들이 필요한 이유는 따로있다. 스타트업에 합류한 우리는 "스톡옵션"을 부여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스톡옵션은 말 그대로 주식을 살 수 있는 선택권이고 이 스톡을 살 수 있는 시기는 법률상 2년 뒤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손꼽아 기다리던 2년이 지나 스톡을 살 수 있는 시기가 와도 회사가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행사를 할 수가 없다. 만약 뒤늦게 필요성을 깨달았다고 해도 당장에 이를 처리할 능력이 있는 전문 인력이 없으면 나의 권리를 행사할 시기가 차일피일 미뤄질 수 있다. 그러니 스톡옵션을 부여받는 것에만 집중하지 말고, 회사가 이를 핸들링할 능력이 되는지도 꼭 살펴보자.


세상에 완벽한 회사, 완벽한 스타트업은 없다. 조직은 “불완전한 인간들의 집합소”이니, 때로는 타협을 해야 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 소중한 평일의 반나절을 써야 하는 곳이니 이것 만큼은 참을 수 없다는 나만의 체크리스트는 필요하다. 이 글이 본인의 기준을 세우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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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수

인턴 디자이너에서 제품총괄까지, 스타트업 A to Z를 경험했습니다. 현재 아웃앤아우터 대표이자 프로덕트 코치, 스타트업 랜선사수, 그리고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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