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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으로 기생충을 퇴치할 수 있을까?

반딧| 2021.09.08

영화 '기생충'으로 남의 몸을 숙주 삼아 살아가는 '기생충'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졌다. 하지만 나는 기생충 하면 사실 영화 '클래식'이 먼저 떠오른다. 영화 클래식의 배경이 1960년대라 당시의 학교 생활이 비치는데, 재밌는 장면이 있다. 학교에서 단체로 대변 검사를 해 학생들의 채변봉투를 수거해가고 선생님이 구충제를 나눠주는 장면이다.


채변봉투에 소똥을 담는 주인공들 (사진 출처: 유튜브 영화 클립)


여기서 주인공 준하는 꾀를 부려 길에서 발견한 소의 그것을 채변봉투에 담아 가는데... 결국 사고를 치고 만다. 구충제를 무려 서른두 알 처방받은 것이다. 그리고 선생님은 회충, 촌충, 십이장충, 민촌충, 갈고리촌충 없는 게 없다며 대체 뭘 먹었냐고 혼도 낸다. 준하 덕분에 학교에서 제일 기생충 많은 반으로 뽑혔다며...


서른두 알을 손수 세주시는 선생님 (출처: 유튜브 영화 클립)


이 시대에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기생충 박멸 운동으로 불리며 학교를 중심으로 검사, 투약을 진행했다. 당시 기생충병뿐 아니라 전반적인 국민 보건,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1963년 전북의 9살 소녀가 복통으로 병원에 왔는데, 장에서 회충이 발견되었다는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 회충이 1063마리에 육박했고, 결국 소녀는 장폐색으로 숨지게 되어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리하여 정부 주도로 대대적인 표본조사와 박멸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1960년대에는 무려 90% 감염률을 기록하였으나 연 2회 기생충 검사와 무료로 약을 나눠주는 사업을 진행해 1980년대에 절반 정도, 1997년에는 3% 이하로 감염률을 줄였다. 그렇게 퇴치 판정을 받아 기생충 박멸 사업이 종료되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있었다.
(참고 기사) '기생충은 살아있다' , '기생충 박멸사... 40여 년 전만 해도 한국은 감염률 세계 1위 국가였다!


지난 2년간 내가 몸담은 프로젝트의 목표는 주혈흡충 (Schistosomiasis)라는 기생충을 퇴치하는 것이었다. 하고 많은 병 중에서도 기생충, 그중에서도 이름부터 생소한 주혈흡충이라니. 굳이 이 기생충을 고른 이유가 있다면... 일단 개발도상국에서는 아직도 기생충 감염이 흔하다. 기생충에 감염되는 것도 문제지만, 감염이 되어도 모른다는 것이 문제다. 내가 감염이 되었는지도 모르고 있으며, 정부에서도 어느 지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염이 되었는지 정확히 파악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감염률, 감염 지역을 파악하기 힘들다는 것은 그만큼 심각성이 부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위급한 전염병은 매일 감염률, 환자 수, 동선, 치사율 모든 정보를 업데이트하고 공유한다. 하지만 기생충 병, 특히 그중 주혈흡충증은 그렇게 심각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예상되는 피해 규모에 비해 비교적 조명도 덜 받고 있으며, 따라서 검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세계 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에서 소외된 열대성 질병 (Neglected Tropical Disease)라고 정의하며 관심을 더 기울일 것을 촉구했다.


주혈흡충 (출처: Global Schistosomiasis Alliance)

주혈흡충증은 깨끗한 물과 화장실에 접근하기 힘든 지역에서 흔하다. 기생충은 보통 물가의 달팽이를 숙주로 기생하고 있다. 그러다 사람들과 접촉하게 되면 체내에서 기생하기 시작한다. 보통 낚시를 하거나 씻고 물을 마시는 등의 일상에서 전염된다. 특히 한 커뮤니티에서 감염이 시작되면, 주변 사람들도 쉽게 감염된다. 소변으로 기생충 알이 퍼지고 또 다른 유충들이 증식하기 때문이다. '유명하지 않아서 더 유명한' 이 병에 감염되면 사람들의 삶은 큰 영향을 받는다. 이 병에 걸린다고 죽지는 않는다.


장기에 주혈흡충증이 감염된 아이 (출처: Imperial College London)

하지만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하면 치명적인 결과가 따른다. 특히 어린아이들이 감염에 노출될 경우 지적 능력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장애를 갖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병에 노출된 사람들 대부분이 가난하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 병으로 인해 생산성이 저하되고 교육에도 영향을 주어,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악순환을 겪게 된다.


그렇다면 디자인은 여기서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외지고 낙후된 커뮤니티까지 그 손길이 닿을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기생충 박멸은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다. 우리나라처럼 정부 주도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 효과적이겠지만, 나라 규모도 크고 시스템이 덜 자리 잡은 곳에서는 이렇게 하기 힘들다. 그리고 경제적인 제약도 따른다. 현재 자본이 충분치 않으면 이런 프로그램을 장기로 운영하기 어렵고 외부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약만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기생충에 감염된 물 정화, 화장실 보급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계속해서 기생충에 노출될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정부에서 나서서 이런저런 사업을 해도 사람들의 인식과 행동이 바뀌지 않으면 변화를 가져오기 힘들다. 각자의 삶의 터전에서 위생을 개선하고 예방 수칙을 잘 지켜야 다시 감염되지 않을 수 있다.


작년 현지 조사차 방문한 커뮤니티에서 마을 사람들은 이 개울에서 빨래, 요리를 위한 물을 길어갔다.


이렇게 얽히고설킨 문제들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 이 때 디자인은 그 해결을 위한 첫 단계, 큰 그림을 그리게 해 준다. 현재 어떤 기관들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고, 어떤 제약점이 있는지. 각 커뮤니티에서 문제가 되는 상황들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서로 연결이 되어 있는지. 이런 그림을 그리다 보면 문제들의 우선순위를 파악하고 문제들끼리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기 쉽다. 그리고 여기를 출발점으로 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조금씩 찾아갈 수 있다. 그리고 의료 시스템, 기생충학, 보건 위생 관련 등의 다양한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큰 그림을 두고 세부적인 내용을 의논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시스템 디자인 매핑 참고)


포스트잇을 대거 동원한 시스템 매핑 과정


콘텍스트, 스테이크홀더, 현재 시스템을 한자리에 매핑한 지도 (시각디자인: M. Sluiter)


우리 프로젝트에서도 다양한 요소와 관계성을 담은 지도(맵을 여러 버전으로 만들었다. 세세한 부분까지 담을 순 없지만 팀원들과 전체적인 그림을 함께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현지 조사를 가서도 현지 전문가들과 소통에도 유용한 매개체로 우리가 알고 싶은 것, 해결하고 싶은 것들을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이 지도를 계속 업데이트해갔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어떻게 주혈흡충 박멸에 한걸음씩 다가갔는지, 다음 글에서 이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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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

지속가능성을 위한 디자인과 리서치를 하고 있는 반딧입니다.
네덜란드에서 인터랙션 디자인 석사 과정을 마치고 3년차 직장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디자인으로 어떤 이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지 고민의 과정을 기록하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더불어 공대 출신 디자이너로써 느끼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 해외 생활을 하며 느낀 점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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