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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언어 강의를 마치며

윤여경| 2021.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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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국민대 이지원 선생과 '디자인읽기'라는 디자인담론 사이트를 시작했습니다. 게시판 하나 달랑 있었지만 많은 디자이너들이 그곳에 글을 쓰고 대화와 논쟁을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때의 인연들이 지금 디자인학교를 있게 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논쟁은 '디자인이 학문이냐 아니냐'였습니다. '디자인은 학문이다'라는 주장에 저는 디자인이 왜 학문이 될 수 없는지 논박했습니다. 논박하면서 디자인이 학문이라는 주장이 너무 빈약해 슬펐습니다. 주장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저 또한 디자이너였으니까요. 게다가 저는 디자이너라는 직업에 큰 자부심이 있습니다. 부모님과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쟁취한 직업이거든요. 그래서 프레임을 바꾸어 "디자인이 학문이 아니라면 디자인을 학문으로 만들자"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렇게 10년정도가 흐른 것 같네요.

10년전 디자인이 학문으로 도약하는 초석을 놓으려면 20년즈음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20년 동안 디자인을 학문으로 만들 수 있는 바탕을 찾아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디자인과 관련 있다 싶으면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공부했습니다.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요. 과거의 선입견과 편견은 완전히 버려야만 했습니다. 과거의 성과가 디자인을 학문으로 만들지 못했으니까요. 게다가 디자인을 학문스럽게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인용하는 분야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러던 중, 이성민 선생님을 만나 철학을 배웠습니다. 철학적 바탕은 강유원 샘의 강의녹취록과 추천책들을 어느정도 섭렵한 상황이었기에 이성민 샘의 생각을 조금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어느날 수업을 마치고 이성민 샘과 차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선생님은 '기본층위 범주'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저는 직감했습니다. 20년이 15년정도로 단축될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당연히 저는 그날 이후 레이코프와 존슨의 책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이성민 샘은 제게 또 한분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바로 최봉영이라는 학자입니다. 이 분의 학문적 깊이를 직감하신 선생님은 종종 이분의 이름을 언급했습니다. 저는 궁금했습니다. 라캉과 지젝 등 오랜 시간 현대철학을 번역해 왔기에 왠만한 학자는 이성민 샘의 성에 차지 않거든요. 그래서 최봉영 샘의 책을 사서 공부했죠. 그렇게 선생님과 저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제 글을 읽는 분들을 아시다시피 지난 몇개월 '최봉영'이란 이름으로 제 타임라인을 도배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제가 좀 이상해졌을거라 생각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쟤는 왜 국뽕이 되었지?" 실제로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이 점에 대해 한말씀 드리자면, 우리나라 국뽕은 대부분 '모범생'들입니다. 자신의 것을 얘기하지 않고, 자신이 배운 것을 얘기하는 분들이죠. 민주와 자유, 민족을 배우고 그것을 잘 실천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분들입니다. 모두 서양에서 비롯된 근현대의 사상이죠. 저는 이분들이 소유럽을 주장하는 소유럽파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조선의 선비들이 청나라가 명나라를 지배하면서 소중화를 자처했듯이죠. 저는 민주와 자유, 민족이 아니라 '한국말'과 '한국사람'을 그 자체로 주목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민주도 자유도, 민족도 없습니다. 그냥 한국말을 통해 말의 원리를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서양의 것이 서양사람들만의 것이 아니었듯이 한국말도 한국사람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것이죠. 그것이 과거 문명과 다른 현대문명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말의 원리가 언어의 원리입니다. 언어의 원리를 알면 이미지의 원리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림도 조각도 모두 일종의 언어이니까요. 언어의 원리를 알면 디자인을 학문으로 도약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5년에서 5년을 더 단축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면 올해 안에 디자인의 학문적 바탕을 마련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최봉영 선생님 덕분에 실제로 5년을 단축했습니다. 지난 두달동안 저는 A4 약 100장 분량의 글을 썼습니다. 예술과 디자인의 언어적 방법과 바탕을 규명하고, 이를 근거로 예술과 디자인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글입니다. 그리고 방금전 마지막 결론 글을 끝냈습니다.

글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쓴 글을 공개할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공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글을 통해 예술과 디자인의 학문적 의미를 다소 짐작할 수 있겠다 싶어서입니다. 물론 공개된 이 글을 포함해 비공개 된 글들은 다듬어지지 않는 초벌입니다. 이 글들을 다듬는데는 꽤나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역사는 디자인된다>의 초벌원고를 다듬는데 2년여의 시간이 걸렸거든요.

마지막으로 이성민 선생님, 최봉영 선생님 고맙습니다. 덕분에 마음의 짐을 많이 덜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납니다. 다시 한번 고맙습니다. 이 책은 전세계의 예술가와 디자이너 분들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앞으로 이 책이 세상에 나온다면 전세계의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의 답답한 심정을 작게나마 해소해 주리라 기대합니다.



강의를 마치며

1) 지구촌 현대 문명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문명은 구별이 없습니다. 도시의 야경사진을 보고 그 도시가 어떤 나라에 속하는지, 어떤 대륙과 기후대에 있는 도시인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세계 어디를 가도 공항은 모두 비슷합니다. 지역의 특수성을 반영하는 장식과 이미지, 언어들이 새로운 공간에 왔음을 느끼게 해 줄 뿐이죠. 흥미로운 점은 처음 오는 낯선 곳이지만 두렵거나 크게 불편하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내가 살던 곳과 모두 비슷하니까요. 특별히 원시문명을 유지하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같은 비상구 표지판과 화장실 기호를 공유하죠. 비록 다양성은 많이 사라졌지만 같은 문명과 문화를 공유하는 덕분에 삶의 예측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저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는 지난 200년전과 본질적으로 달라졌다는 생각입니다. 불과 200년전만에도 이런 상황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사이 도대체 무슨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수만년, 수천년을 다른 문명을 이루고 살아온 인류가 어떤 이유로 모두 같은 문명을 수용하고 공유하게 된 것일까요? 단순히 서양열강의 강요와 식민지 탓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주변을 둘러보세요. 우리는 숲이나 자연물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인공물 속에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인공물들은 세계 어딜가도 비슷합니다. 책상과 의자, 노트북과 스마트폰 같은 사물만이 아니라 미적 취향, 픽토그램, 문자, 인테리어, 건축, 도시의 경관조차 비슷한 모습이죠. 모두 디자인입니다. 그리고 이런 디자인들이 형성된 바탕에는 현대 예술의 변화가 일조했습니다. 그렇기에 현대 예술과 디자인을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시장경쟁력과 취향을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전세계가 공유하는 현대 문명과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현대 예술과 디자인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를 알기 위해 예술과 디자인이 공유하는 공통의 요소들, 추상적 이미지와 언어적 이미지 그리고 색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런 이미지들의 등장은 지난 200년전에는 없던 것들입니다. 근대 이전에는 오로지 그림과 글에만 의지했습니다. 글을 아는 사람이 드물던 중세에는 그림을 마치 글을 쓰듯 그렸죠. 중국의 종이기술이 이슬람을 통해 도입되고 활판 인쇄기술이 발달하면서 비로소 유럽사회는 그림과 글의 역할을 구분하기 시작합니다. 그림과 글을 병치시킴으로서 소통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죠. 그러다 19세기 사진 기술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급반전 됩니다. 예술가들은 사진과 다른 역할, 새로운 표현 방법을 찾다가 해체와 콜라주라는 방법을 알게 됩니다. 요소들을 분리하고 새롭게 재조합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예술 세계를 만나게 되죠. 특히 추상적 이미지와 영상은 완전히 새로운 접근이었죠. 의미요소가 전혀 없는 추상적 요소들과 정지된 사진들을 연결시킴으로서 무언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색도 마찬가지입니다. 근현대 이전의 예술가들도 색의 대비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색의 과학적 현상에 대해서는 깜깜했습니다. 그래서 근대 이전의 장인과 예술가들은 감각적 모방이나 언어적 상징에서 색을 사용했습니다. 색에서 공감각을 느끼면서도 색 자체에 공감각을 유발하는 물리적, 뇌과학적 바탕이 있다는 사실은 상상조차 못했죠. 현대 예술가들과 디자이너들은 색이 빛이자 추상적 요소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색의 의미적 편견에서 벗어나 더욱 자유롭고 풍부한 색감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축의 시대 이미지의 변화

이런 극적인 변화는 2500년전 고대 그리스에서도 있었습니다. 에게해에 분산되어 있던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문명은 지중해에서 별로 주목받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동쪽으로는 앗시리아와 페르시아 제국이 있었고, 남쪽으로는 이집트, 동쪽으로는 로마와 페니키아가 있었습니다. 기원전 7세기 고대 그리스의 조각을 보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그리스 조각과 많이 다릅니다. 아주 단순하고 소박하죠. 조각의 전체 모습도 이집트나 페르시아의 정적인 모습을 모방했습니다. 기원전 5세기로 넘어오면 그리스 조각은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특히 청동상을 보면 역동성을 갖춘 사실적인 묘사에 감탄하게 되죠. 불과 100년만에 조각기술이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그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페르시아 제국은 서쪽 에게해 도시국가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고대 그리스 도시들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죠. 어리석게도 고대 그리스 도시에 살던 사람들은 항복하지 않고 연합해서 대항합니다. 누가 봐도 질것 같은 무모한 전쟁이었는데 페르시아의 매서운 공격을 몇차례 막아냅니다. 천운도 많이 따라 주었죠. 물론 이들의 어리석음과 무모함이 오만으로 이어져 고대 그리스는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승리 후 100년의 시간동안 엄청난 변화를 거듭합니다.
거대 제국에 승리한 고대 그리스 사람들에게 엄청난 자존감이 생겼습니다. 이 자존감이 고대 그리스 사람들에게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더이상 이집트나 페르시아의 눈치를 보지 않고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스사람들은 전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신전을 짓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입니다. 이 신전에 들어갈 각종 조각과 그림들이 만들어지죠. 이 공사에 참여한 예술가와 장인들은 과거 페르시아와 이집트에서 거대 신전이나 궁전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의 경험과 솜씨를 맘껏 발휘해서 전혀 새로운 접근으로 건물을 짓고, 조각을 하고, 그림을 그리죠.
이때 만들어진 건축과 조각, 회화를 우리는 그리스 '고전 미술'이라 말합니다. 그리스 고전 미술은 알렉산더의 말을 타고 인도 서쪽까지 전파됩니다. 로마 제국이 들어서면서 이미 여러곳에 자리잡은 그리스 고전 문명을 수용하면서 그리스의 고전미술은 '그리스-로마 고전미술'이 되었습니다. 이 고전미술은 중세 기독교사회에서 다소 주춤했다가 15세기 유럽 르네상스 이후 화려하게 부활합니다. 이 부활은 19세기 사진이 발명되기 전까지 이어지죠. 즉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의 고전 미술이 약 2300년 동안 이어진 것이죠.


3) 축의 시대 말의 변화

고대 그리스 고전미술이 자리를 잡을 즈음, 여러 철학자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주로 자연현상이나 세상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떻게 변화하는지 궁금했습니다. 더불어 정치적 권력을 잡기 위한 화술이 중요했죠. 철학에서는 전자를 자연철학자라고 말하고, 후자를 소피스트들이라 말합니다. 사실 자연철학자도 소피스트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아고라'라는 시장 겸 광장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 받습니다. 이렇게 약 100년이 지나자 위대한 사람이 한명 등장합니다. 인류의 4대 성인으로 여겨지는 소크라테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책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가 살던 시대는 글이 아니라 주로 말로 소통했기 때문입니다. 페니키아에서 발견되어 이어져온 표음문자 체계는 갖추고 있었지만 흔하게 사용되진 않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청년들에게 일상의 말로 질문을 퍼부었습니다. '정의가 무엇이냐?' '올바름이 무엇이냐?' 등등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통해 자신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도록 독려했습니다.
그가 주로 질문한 내용들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의 의미입니다. 일상에서 흔히 쓰는 말의 의미를 잘 모른다 것을 통해 자기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죠. 그래서 그의 유명한 조언이 "네 자신을 알라"입니다. 당시 이 말은 그리스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델피 신전의 격언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이 공공적인 격언을 사용합니다. 다만 델피 신전에서 이 문구의 의미는 "네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라"는 인간의 한계를 지적한 것인데, 소크라테스는 이를 살짝 틀어 "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라"로 사용한 것이죠.
소크라테스는 이 일로 재판에 넘겨져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그의 친구들과 제자들은 통곡을 했죠. 그 제자들 중에 플라톤이 있었습니다. 고전학자 에릭 헤블록은 <플라톤 서설>에서 플라톤을 교육철학자라고 말합니다. 그는 말로 하는 교육이 아닌 기하학과 문자로 하는 교육을 추구했죠. 문자의 시대를 살았던 플라톤은 제자들과 나누었던 많은 대화를 글로 남겼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의 대화록 화자가 플라톤 자신이 아닌 소크라테스입니다. 자신이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이어간다고 생각해서였겠죠. 선생님의 입을 빌려 자신의 이야기도 슬쩍 넣었을 것입니다.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 대화록을 쓴 사람이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플라톤이란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플라톤에게 유명한 제자가 한명 있었습니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선생이기도 했던 그는 플라톤만이 아니라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의 말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시대를 알 수 있는 것이죠.
표의문자가 아닌 표음문자는 소리를 기록할 수 있는 기술입니다. 말소리를 기록할 수 있다니... 당시로서는 최신 기술이었죠. 이 기술을 알고 있으면 시공간을 초월해 생각을 전할 수 있고, 소통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구시대 사람인 소크라테스는 문자가 아닌 말을 택했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원고지에 연필을 꾹꾹 눌러 글을 쓰는 사람처럼요.
중요한 것은 기술에 앞선 내용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연철학자(소피스트)들의 질문을 바꿉니다. 그는 세상의 물질이나 권력에 주목하지 않고, 내 자신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합니다. 물론 정의롭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윤리적 기준이 필요합니다. 비록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며 그리스사람들의 결정을 받아들였지만 법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믿었던 것은 '다이몬'이라는 신입니다. 그는 종종 자신 안에 있는 다이몬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말했습니다. 예상컨대 그 목소리는 '그리스말'이었을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윤리적 기준으로 주목한 것은 '그리스법'이 아니라 '그리스말'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청년들에게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독려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우리가 공공적으로 쓰는 말을 이해하고 그 말의 의미를 잣대로 삼아 나의 윤리적 줏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즉 플라톤이 문자교육 혁명가라면 소크라테스는 말의 혁명가입니다. 플라톤은 이 '말의 혁명'을 교육하고 문자로 옮긴 것이죠.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시대를 '축의 시대'라 말합니다. 이 시대에 여러 문명에서 동시에 기술혁명이 일어나고 말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4대 성인, 붓다와 공자는 모두 축의 시대 사람입니다. 붓다는 카스트라는 계급으로 분리된 인도지역에서 계급철폐에 앞장섰습니다. 비록 그는 최상위 계급에 속했지만 스스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모든 계급의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죠. 그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주장을 합니다. 이 주장을 하기 위해 죽음의 문제를 피할 수 없습니다. 붓다는 힌두교의 윤회론을 반박해 불교라는 종교를 낳았습니다. 평등을 주장한 붓다는 기득권의 말이 아니라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말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공공의 말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했겠죠.
공자는 14년 동안 중국 전역을 다녔습니다. 다니면서 그 지방의 노래와 말을 모았습니다. 공자는 정치를 말했는데 그가 말한 정치는 모든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로움은 바로 말에서 비롯되죠. 그가 주목함 말은 '仁'입니다. '仁'이란 공감을 의미합니다. 공감하려면 서로의 말을 이해해야 합니다. 말이 곧 속마음이니까요. 공자의 제자들도 플라톤처럼 <논어>라는 대화록을 남겼습니다. <논어>에는 중국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지혜가 가득합니다.
다소 늦었지만 로마 식민지였던 중동지방에서 마지막 성인 예수가 등장합니다. '예수'라는 말은 당시 유대인의 선지자, 즉 메시아를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현대 인류의 약 1/3이 이 메시아 예수의 말씀을 윤리적 기준으로 따릅니다. 예수는 마굿간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곳이 마굿간이란 것은 아주 큰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마굿간은 아기가 태어나기에 가장 열악한 장소였기 때문이죠. 가장 밑바닥에서 태어나 보통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 예수는 타락한 유대교 기득권에 저항해 말과 행동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습니다. 그는 말만이 아니라 행동까지 솔선수범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앞선 성인들이 말한 지행합일, 말과 행동이 일치한 삶을 살았죠. 그는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신뢰하기 시작합니다. 이를 두려워한 기득권 유대인들은 예수를 로마제국에 고발합니다. 예수는 소크라테스처럼 의연하게 벌을 받아드립니다. 사람들의 배신과 죄를 용서하고 감내하죠. 예수는 같은 민족만이 아니라 함께하는 모든 존재를 사랑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민족종교인 유대교에서 벗어나 보편종교로 나아갑니다. 이 종교가 우리가 아는 기독교입니다.
이렇듯 축의 시대를 대표하는 성인들은 대부분 일상의 말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소통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윤리적 기준을 통치자의 법이나 종교적 교리가 아니라 일상의 말에서 찾았습니다. 말은 오랫동안 이어져온 집단지성입니다. 그래서 말에는 공공적 잣대가 담겨있습니다. 축의 시대 성인들은 이 공공의 말을 잣대로 삼아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윤리적 기준을 세웠습니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의 잣대를 자신의 윤리적 줏대로 삼았죠. 이 줏대들이 우리가 아는 철학 고전들과 종교 경전들입니다.


4) 근현대의 시작

앞서 살펴본 기원전 6-5세기 고대 그리스와 유사한 흐름이 19-20세기 근현대에도 일어납니다. 서양문명은 15세기부터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몽골 및 이슬람과의 전쟁, 흑사병, 종교전쟁, 신대륙 발견으로 인해 기독교의 말, 즉 성경 교리 중심의 윤리적 기준에 금이 갑니다. 17세기부터 갈릴레이, 윌리엄 하비, 뉴턴과 같은 걸출한 과학자들이 등장합니다. 영국에서는 프랜시스 베이컨이 실험과 관찰이라는 경험적(귀납적) 방법론까지 주장하죠. 지식인들 사이에서 조금씩 수학과 과학이 종교의 믿음을 대체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데카르트가 이런 말을 하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유명한 말은 <방법서설>에 쓰여 있습니다. 책의 제목처럼 데카르트는 새로운 생각 방법론을 주장합니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존재 근거를 '생각'에 둡니다. 신과 전통의 가르침에 의지하던 기존의 '생각'이 아닌 자신의 경험에 의지하는 '생각'을 주장합니다. 주관적인 관점이 탄생한 것이죠. 생각은 주로 말로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책으로 쓸때 라틴어가 아닌 자신의 일상어인 프랑스어로 씁니다. 물론 당시 갈릴레이와 같은 종교재판이 두려워서였기도 하고요. 새로운 생각을 세상에 꺼내 놓는 것은 늘 위험하니까요.
'생각'을 강조한 데카르트는 경험적 방법론을 제안합니다. 어떤 대상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단순하게 감각만 믿어서는 안됩니다. 그 대상의 요소들을 최대한 분해해서 그 요소들간의 인과관계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기계론적 사고관'이라고 말하죠. 실제로 데카르트는 사람의 정신은 신이 주신 것이지만, 몸은 기계와 같은 사물이라 여겼습니다.
서양사람들의 믿음이 종교에서 과학으로 빠르게 전환되면서 모든 분야의 구조가 바뀌게 됩니다. 교황와 황제, 주교와 봉건 영주의 연정이 사라지고 종교과 정치 권력을 통합한 절대왕정이 등장합니다. 절대왕정은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도시민들의 혁명에 의해 무너지죠. 18세기말 프랑스 대혁명이 대표적 사건입니다. 도시민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농촌중심의 농업생산은 도시중심의 산업생산으로 전환되고, 이 생산물을 유통하기 위한 상인들과 더불어 자본가들이 권력을 차지합니다. 이를 산업혁명이라고 합니다. 산업혁명으로 농노들의 노동에 의지하던 가내수공업은 사라지고 공장식 기계생산이 등장합니다. 자본가들은 귀족권력을 견제하고 노동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농노와 노예를 해방합니다. 기계와 상권을 차지한 자본가들은 해방된 농노과 노예들을 노동자로 고용해 기계를 돌리죠. 귀족과 농노(노예)를 대체한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새로운 계급관계가 형성됩니다.
19세기 이런 흐름이 연속적인 혁명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에릭 홉스본은 18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를 장기 19세기라 말하고, 19세기 중반까지를 '혁명의 시대'라 이름 짓습니다. 이 혁명의 시대에 새로운 지식혁명이 일어납니다. 경전을 강조하는 사제들의 말을 부정하고 과학과 경험을 중시하는 계몽주의가 등장합니다. 종교적 믿음보다는 '이성'의 중요성이 대두됩니다. 영국의 경험론자 흄은 경험적 이성으로 기존의 인과관계를 의심합니다. 독일의 관념론자 칸트는 합리적 이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윤리 기준을 내놓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자유'와 '개인' 개념입니다. 현대 민주주의의 기반인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는 칸트가 제시한 우리 시대의 윤리적 기준입니다.
19세기 중반 영국의 다윈은 신대륙 여행에서 원시 자연을 관찰하고 '창조론'을 대체하는 '진화론'을 내놓습니다. 인간은 신에 의해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여타 생명체들처럼 진화된 존재라고 주장합니다. 그의 주장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지만 갈릴레오처럼 재판에 넘겨지지는 않았습니다. 종교는 이미 상당히 초라해졌습니다. 반면 과학은 도약을 거듭합니다. 다윈의 생물학만이 아니라 물리학과 천문학, 의학 등에서 인류는 엄청난 과학적 발견이 있었습니다. 이 과학적 성과들이 기술과 결합되면서 세상은 엄청나게 변하기 시작했죠.
사회가 크게 변하면서 자본가와 기계 중심의 정치에 대한 반감이 생깁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칼 마르크스입니다. 마르크스는 20세기에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상가로 평가됩니다. 마르크스는 기계에 의해 노동에서 소외된 노동자들의 형편을 보고 분노합니다. <공산당 선언>을 하고 '자본'을 분석해 노동의 가치를 재조명하죠. 분노로 쓰여진 그의 저서들은 사회주의라는 거센 물결을 이끌어냅니다. 디자인의 아버지라 불리는 영국의 윌리엄 모리스도 이 물결에 합류한 노동사상가이자 예술가입니다. 모리스는 타락한 예술, 자위적인 예술을 부정하고 '예술공예운동' 주도합니다. '예술공예운동'이란 예술의 공예화를 의미합니다. 모리스는 예술가들이 중세의 공예가처럼 공동체를 이루고 생활에 기반이 되는 사물들을 생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공예회사를 만들고 운영했습니다. 마르크스와 모리스를 따르는 혁명적 예술가들은 후일 '바우하우스'라는 학교를 설립합니다. 서론에서 언급했듯 이 학교에서 현대의 디자인 개념이 만들어졌죠.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프로이트도 인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프로이트는 19세기 말에 중요한 발견을 합니다. 바로 무의식이죠. 인간의 위대함을 지탱하던 마지막 보류인 '의식=이성'이 무의식에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습니다. 이 무의식을 근거로 '정신분석'과 '심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형성됩니다. 무의식 발견은 많은 철학가와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관점을 주었습니다. 빈의 살롱에서 무의식의 존재를 알았던 예술가들은 완전히 새로운 방법으로 작품을 만들고 예술을 교육하죠. 이 흐름의 일부가 현대 예술로 이어집니다. 또 다른 일부는 바우하우스에 합류해 현대 디자인의 형성에 기여합니다.


5) 현대 예술과 디자인

19세기의 혁명적 변화들은 20세기 예술에 거대한 전환을 이끌어 냅니다. 데카르트의 방법론을 깨닫고 다윈과 마르크스, 프로이트의 영향을 두루 받은 20세기 초의 예술가들은 완전히 새로운 접근을 시도합니다. 소묘와 원근법에 근거한 고전예술과 단절합니다. 사진이 발명되면서 미술가들은 더이상 대상을 그대로 모방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요. 세잔과 피카소, 마티스 같은 선구적 미술가들은 대상의 형태와 색을 해체하고 콜라주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조형성을 만들어냅니다. 지금까지 예술에 있어 기술적 변화는 몇차례 있었지만 방법적인 변화는 흔치 않았습니다. 더구나 대상의 재현이 아닌 편집, 즉 작품의 이미지가 감각되는 대상과 멀어진 경우는 아주 드물었습니다.



해체와 편집을 주도한 마티스와 피카소까지는 여전히 의미요소가 남아 있습니다.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형태와 색의 해체는 극단으로 치닫습니다. 장식을 제거하고 단순화 되면서 결국 마지막 보루로 여겨졌던 의미요소들 마저 모조리 생략되죠. 원통, 원, 네모, 세모 급기야 선과 점이라는 모호한 개념까지 나아갑니다. 색 또한 빛의 기본색인 파랑과 녹색, 노랑의 기본 3원색만 남깁니다. 이렇게 형태와 색을 극단적으로 해체하는 것을 '추상화'라고 말합니다.
앞서 제가 의미요소가 완전히 제거된 것이 '추상'이고, 의미요소를 유지한 채 단순화 되는 것은 '보편'이라 말했던 것을 기억하시죠. 과거 미술에서 보편화는 흔한 현상이었지만, 의미요소가 완전히 제거된 '추상'는 20세기 독특한 현상입니다. 추상은 아주 드문 형태입니다. 사람들은 의미가 없는 추상요소를 두려워했기에 보편적으로 활용하지 않았거든요. 아니 못했습니다. 아래 그림은 18세기 잠바티스타 비코의 <새로운 학문>에 나오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서 오로지 신만이 추상적인 '삼각형'으로 표현됩니다. 기독교에서 삼각형은 삼위일체를 의미하고 십자가는 예수=신을 상징합니다. 이처럼 추상적인 요소는 거대한 종교의 상징이나 신을 지칭하는 기호로만 주로 쓰였죠.



이성의 시대를 지나면서 추상성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던 걸까요. 추상예술가들은 감각 대상에서 과감하게 의미를 제거합니다. 아무 의미가 없는 추상적 형태와 색을 맘껏 가지고 놀죠. 추상적 형태는 느낌만 있고 의미가 없으니 무슨 의미를 갖다 붙혀도 이상할 것이 없었습니다. 이 새로운 예술접근은 사람들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과거 예술은 의미를 내포한 이미지, 즉 언어적 이미지만을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어느정도 그림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반면 20세기 초 예술은 의미가 없는 이미지, 즉 점선면과 같은 추상적 요소들로 표현되었기에 사람들은 그림을 의도를 전혀 알 수 없었죠. 물론 자유롭게 만든만큼 멋대로 해석할 자유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쉽나요. 작가의 의도를 모르는 한 맘대로 그림을 해석하기 난감했죠.
미술사가들은 이런 예술을 추상표현주의라 말했습니다. 비평가들은 추상이 등장한 배경을 파악하기 보다는 작가의 의도를 전달하기 급급했죠. 하지만 작가조차 자신이 왜 이렇게 그렸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상당수의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은 그저 유행을 따른 것이니까요. 과거 중세 장인들이 선배들의 표현을 감각적으로 모방했듯이요. 지금도 추상의 본질을 모른채 추상적 형태를 활용해 작품활동을 하는 예술가와 디자이너가 많습니다.
'샘'으로 유명한 마르셀 뒤샹은 해체와 콜라주 그리고 추상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던 드문 예술가입니다. 그가 미술관에 놓은 변기는 추상의 본질을 모르고 그저 유행을 쫓는 미술계의 우회적 비판입니다. 그는 지속적인 해체를 시도합니다. 조각과 회화라는 전통 미술 분야를 조롱하더니 급기야 '예술가'로서의 은퇴를 선언하고 '예술가'라는 직업을 조롱합니다. 뒤샹은 극단적 형태 해체로 더이상 예술의 언어적 의미가 없어진 상황이니, 예술가라는 직업조차 해체하려 했던 것이죠. 작품 형식과 분야, 직업까지 기존 예술적 의미를 모조리 해체한 것이죠. 미술사에선 이런 접근을 개념예술이라 말하며 새로운 예술 장르로 여깁니다. 뒤샹의 의도와는 다르게 갔죠.



그의 조롱은 1919년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수염을 그려넣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같은 시기 독일 바이마르에 모리스의 '예술공예운동'처럼 예술과 공예를 함께 가르치는 '바우하우스'가 설립됩니다. 바우하우스의 교사들도 대부분이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뒤샹과 다른 길을 갑니다. 의미해체가 아닌 의미조합을 시도합니다. 추상적인 요소들을 조합해 규격화된 생활도구들을 만들어냅니다. 생활도구는 생활속에서 경험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들이 만든 생활도구들이 대량생산되면서 사람들은 추상을 생활속에서 경험하게 되죠. 추상적 형태와 색이 일상에서 경험되면서 추상은 점점 언어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추상적 생활도구가, 추상적 생활양식을 낳은 것이죠. 초창기에는 이런 생활양식이 다양한 맥락속에서 쓰였기에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었습니다. 공통 경험이 축적되면서 다양한 의미는 하나의 보편적 의미로 귀결되고 추상적 생활양식은 하나의 태도가 됩니다. 추상적 요소에서 비롯된 추상적 도구가 축적되어 추상적 양식을 낳고, 추상적 생활양식이 추상적 태도를 형성한 것이죠. 이 흐름이 바로 모더니즘 디자인입니다.



모더니즘 디자인이 보편적 의미를 갖게 되면서 유럽과 미국에서 추상은 새로운 장식 혹은 하나의 양식이 되었습니다. 이를 '아르데코'라고 말합니다. 한국말로 하면 '새로운 예술 장식'이죠. 미국과 유럽을 모방하고 싶었던 많은 나라들이 추상적인 아르데코가 현재와 미래를 대변하는 태도로 여겼습니다. 너도나도 이 양식을 수용합니다. 추상은 의미가 전혀 없으니 수용할 때 거부감도 덜했습니다. 덕분에 전세계가 같은 생활양식을 수용하게 되었죠. 모더니즘 디자인이 시대의 보편성을 획득한 것이죠.


6) '플라톤의 각주'에서 벗어나다

20세기 초 철학 및 과학 사상가였던 알프레스 노스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에서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다"라는 말을 합니다. 서양철학을 조롱한 것은 아니고 플라톤 철학의 보편성을 높이 산 것입니다. 그래도 뭔가 부정적인 뉘앙스가 느껴집니다. 비슷한 시기 서양철학의 한계를 느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비트겐슈타인입니다. 항공기술을 전공한 그는 버트란스 러셀의 언어학을 읽고 감명받아 캠브리지에서 러셀에게 철학을 배웁니다. 러셀은 금방 비트겐슈타인의 천재성을 파악합니다. 오히려 러셀이 그의 전폭적인 지지자가 되죠. 비트겐슈타인은 1차대전에 참전하면서 <논리철학 논고>를 씁니다. 이 책은 오스트리아 논리실증주의 학파의 형성에 기반이 됩니다. 재밌는 점은 바우하우스 예술가들은 이 논리실증주의 철학을 좋아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책의 말미에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자"고 말합니다. 이 말은 서양철학은 말할 수 있는 것만을 얘기해 왔다는 의미입니다. 화이트헤드가 지적했듯이 어쩌면 서양철학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것들 속에서 뱅뱅 돌았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불교와 유교가 붓다과 공자의 말 속에서 뱅뱅 돌았듯이요.
비트겐슈타인은 2차 대전에도 참전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철학적 탐구>를 집필합니다. 이 책에서 그는 '언어놀이'와 '가족유사성'을 주장합니다. 언어놀이란 추상예술가들이 추상적 형태과 색을 갖고 노는 놀이와 유사합니다. 하지만 언어는 의미가 있기에 추상적 요소처럼 맘껏 놀 수가 없습니다. 어느정도 소리와 의미의 유사성을 의식해야만 하죠. 마치 가족이 서로 닮음을 의식하듯이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와 가족유사성 개념은 20세기 후반 신경언어학자 레이코프와 존슨에 의해 새롭게 조명됩니다. 당시 언어학계는 촘스키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촘스키는 소쉬르에 이어 기호적인 말은 보편적 생성법칙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현재 수많은 언어가 있지만 그 근본에는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언어의 바탕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죠. 일종의 수학적 법칙과 비슷한 원리가 언어에도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촘스키의 주장은 레이코프와 존슨에 의해 부정됩니다. 이들은 언어는 '인생은 마라톤'처럼 말과 말의 상호 은유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주장합니다. '인생'을 어떤 대상과 비유할때 보편법칙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인생은 전화기' '인생은 우주' '인생은 방구' 등등 말과 말의 은유는 무작위적이고 때론 무의식적입니다. 그러나 모든 언어에 공유되는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언어가 소통될때 몸의 경험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레이코프와 존슨은 언어 중 유독 소통이 잘 되는 단어와 문장이 있다고 말합니다. 주로 경험에 근거한 말인데, 이를 '기본층위 범주'라 이름 짓습니다. 어려운 말은 주로 이 기본층위 범주의 말들로 은유되죠. 가령 우리는 "시간이 지났어"라고 말합니다. 마치 시간이 어떤 사물이 내 옆을 지나간것처럼 여기죠. 이 여김(은유)를 통해 우리는 '시간'이란 말의 의미를 짐작하게 됩니다. '시간'이란 어려운 개념이 '지났어'라는 쉬운 말로 해석된 것이죠. 우리는 앞서 '기본층위 범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세하게 살펴보았기에 더이상 설명하진 않겠습니다.



레이코프와 존슨의 주장은 2세대 인지과학이 증명합니다. 가령 로봇팔이 있다고 상상해 보죠. 팔을 잃은 장애인이 생각으로 로봇팔을 움직여 컵의 물을 마시는 영상을 본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생각으로 로봇팔을 움직인 것일까요? 레이코프와 존슨의 은유언어학이 여기에 답을 줍니다. 사람은 말을 배울때 경험과 함께 합니다. 컵을 들고 마시는 동작을 하면서 '컵을 잡는다' '물을 마신다' 등의 말을 배우죠. 그러면 '컵' '잡는다' '마신다'의 말이 근육과 뇌에 신경패턴으로 새겨집니다. 그래서 말은 신경패턴을 압축한 기호로 작동합니다.
인공로봇팔 실험설계자는 이 원리를 활용합니다. 먼저 장애인에게 손으로 컵을 잡고 물을 마시는 영상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영상의 동작들을 소리내어 말하게 하죠. 피실험자가 그 동작들을 말할때 신경패턴의 흐름을 파악하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 기록을 로봇팔에 적용해 그 신경패턴이 활성화 될때 로봇팔이 명령을 수행하도록 조치하죠. 덕분에 장애인이 생각으로 로봇팔을 움직여 물을 마실 수 있는 것입니다. 경험적 말이 신경패턴과 연결되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로서 말과 몸이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는 레이코프와 존슨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죠.


7) 바탕치기

20세기 초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에서 이미지의 추상을 발견했습니다. 대서양을 건너 20세기 중후반 아메리카 대륙의 레이코프와 존슨은 언어가 몸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다시 태평양을 건어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 한국에서 언어는 몸과 물질세계의 상호성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종종 언급되었던 최봉영 선생님입니다. 레이코프와 존슨은 의미 보편성이 높은 말들이 기본층위 범주의 말들로 은유되어 소통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최봉영 선생님은 이 기본층위 범주의 말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과정을 알아 냈습니다.
최봉영 선생님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 '말차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신체경험과 더불어 말을 배웁니다. 복합적인 경험을 신경패턴에 새기고 다시 이를 단순한 말소리로 바꾸어 기억합니다. 이것이 '말차림'입니다. 그래서 말의 본래 의미를 살피면 사람들의 지혜와 세상을 보는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발견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추상이 발견된지 약 100여년이 지난 21세기 초입니다.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의 고전 미술이 만들어지고 100년만에 소크라테스가 일상의 말에 윤리적 잣대가 있음을 알았던 것처럼요. 하지만 과거 축의 시대 변화와 현재의 변화는 다릅니다. 과거 축의 시대는 그리스, 인도, 중국, 중동지역에서 따로따로 일어났다면, 지금은 여러 대륙, 지구 전지역이 역할을 달리해 함께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추상 발견과 언어학을 서양사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최봉영 샘의 말차림도 한국사람의 것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것입니다. 이 발견들 모두가 앞으로 태어날 미래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이죠.
보통 말의 본래 뜻을 찾는 과정을 '어원찾기'라고 말합니다. 어원은 주로 기록된 글에 의존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본격적인 기록이 시작된 것이 2500년전 고대 그리스인데, 그 전에도 말은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했던 말을 플라톤이 기록했던 것처럼요. 그래서 기록된 글에 의지한 어원찾기만으론 말의 형성과정을 파악하기 불가능합니다.
최봉영 샘은 말들이 만들어지는 과정, 최초의 말이 어떤 경험과 연결되어 있는지 파악하는 과정을 통틀어 '바탕치기'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바탕치기는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집니다. 경험을 이미지로 옮기는 새김 바탕치기, 이미지를 말로 옮기는 여김 바탕치기입니다. 새김 바탕치기는 감각과 지각에 의해 '그림'으로 기록되고, 여김 바탕치기는 생각에 의해 '말'과 '글'로 기록됩니다. 구전으로 지혜를 전승하던 시절에는 '말'을 외워 기록했는데 문자가 도입되면서 '글'로 기록되었습니다. 왜곡될 우려만 없다면 '말'보다 '글'이 보관하기도 좋고, 지속성도 뛰어났으니까요.
개별경험은 너무 개인적이라 소통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김 바탕치기를 통해 그림을 그려 경험을 공유합니다. 사람들은 오랜시간 경험을 그림으로 기록하고 말을 덧붙혀 생각을 공유해 왔습니다. 문자가 없던 시절의 역사책은 모두 그림으로 그려졌겠죠. 글이 없는 그림책을 상상하시면 됩니다. 사람들은 경험을 단순한 그림으로 그리고 이를 말로 풀어냅니다. 이 과정이 여김 바탕치기입니다. 여김 바탕치기를 통해 이미지는 말이 됩니다.


글자가 없는 그림책을 볼 때는 상상력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이 상상력이 바로 여김 바탕치기의 동력입니다. 상상력을 통해 이미지가 말이 되면서 그림과 말은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됩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글자 없는 그림책을 읽어주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아이는 그림을 보며 부모의 말을 듣습니다. 그렇게 그림과 연결된 말을 배우죠. 기본층위 범주의 말이 공공성을 획득하는 순간입니다. 과거 문자 이전의 문명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역사가 기록되고 지혜가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방식으로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부모들이 많이 있습니다.
표음문자가 생긴 이후 사람들은 말 소리를 그대로 글로 기록할 수 있었죠. 글이라는 새로운 이미지가 탄생한 것이죠. 문자가 발명된 이후부터는 글이 말의 역할을 대신합니다. 그림과 더불어 글이 함께 소통됩니다. 이렇듯 여김 바탕치기는 늘 경험치에 의한 새김 바탕치기에 기반해 말해지고 글로 쓰여졌습니다. 글을 배우면 누가 그림을 읽어주지 않아도 됩니다. 스스로 글을 읽으며 그림을 보면 되니까요. 글은 말의 수고를 많이 덜어주었습니다.
글이 발명되면서 여김 바탕치기는 나름의 독자성을 획득합니다. '그림과 글'이 아니라 '글과 글'로서 여김 바탕치기가 가능해졌죠. 덕분에 의미 보편성이 높아집니다. 코끼리보다 상위 범주인 포유류, 동물, 생명 등 새로운 말을 만들어낼 수 있었죠. 이렇게 만들어진 말은 이미지 경험보다 말 경험에 근거합니다. 의미 보편성이 높은 말은 여러 말을 동시에 묶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죠. 물론 단점도 있습니다. 경험에 근거하지 않다보니 아무렇게나 말해놓고 그것이 진실인양 사기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렇지만 이 사기는 금방 들통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말의 지속성이 떨어지죠. 위 그림에 있는 '노속치기'가 바로 사기치기입니다.
'바탕치기'는 인문학의 조건이자 본질입니다. 과거 축의 시대 장인들은 경험을 그릇과 그림으로 바탕치기를 했습니다. 성인들은 경험을 말과 글으로 바탕치기 했습니다. 20세기 이후 예술가와 학자들도 똑같이 그림과 글로 바탕치기를 합니다. 그림과 글에는 모두 '그'라는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한국말에서 '그'는 무언가를 담을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실체성이 없는 '기억'이라고 할까요. '그'에 실체성을 담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면 '그릇'이라 말합니다. 그래서 실체를 담으려면 '그릇'을 만들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미지를 담으려면 '그림'을 그려야 하고, 뜻을 담으려면 '글'을 써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릇과 그림과 글을 만들어 '그것'을 담을 수 있습니다. '것'은 모든 존재를 의미하기에 '그것'에는 무엇이든 담을 수 있죠. 추상적 요소들로 하는 '언어놀이'가 바로 '그것놀이'입니다.


그것과 그릇, 그림, 글을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크게 대사과정에 기반해 감각, 지각, 생각을 갖춘 존재라 말씀드렸습니다. 대사과정이 진행되는 존재는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는 존재에 신경이 생기면 감각이 가능해집니다. 그릇은 몸의 감각이 모두 자극되는 실체를 담습니다. 이렇게 담긴 실체는 지각적 반응을 일으킵니다. 이 반응을 표현한 것이 그림입니다. 그림은 경험이 단순화 된 이미지입니다. 사람들은 단순화 된 그림을 통해 구체적인 이미지를 상상하게 되죠. 지각적 반응은 '그것놀이=생각'을 거쳐 글이 됩니다. 글 역시 이미지입니다. 그림과 역할을 달리해 의미보편성이 높은 뜻을 담는 역할을 하죠. 이 글은 다시 지각적 상상력을 불러옵니다. 글 역시 경험적 이미지에 기반하니까요.
레이코프와 존슨은 '그릇=실체경험'이 그림과 글로 연결된다는 점을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그것'과 '그릇'이 소통되려면 그림과 연결성이 높은 글, 즉 기본층위 범주로 은유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최봉영 선생님은 레이코프와 존슨이 언어의 근거로 여긴 '몸'보다 더 깊이 들어가 몸과 상호작용하는 물질세계의 바탕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언어는 사람의 일방적인 경험이 아니라 몸과 물질세계의 상호적인 경험을 담고 있습니다.


8) de+sign

언어가 몸과 물질세계의 상호성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말에 그 사람이 물질세계를 어떤 관점으로 보았는지 기록되고 저장됩니다. 이 말이 공공성을 갖게 되면 말에 그 말을 쓰는 집단의 관점이 기록되죠. 그래서 흔히, 자주, 늘 쓰여지는 공공적인 말에는 집단지성이 녹아 있습니다. 그렇기에 바탕치기를 통해 이 말의 바탕을 살피면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이 물질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또 물질세계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았는지를 알아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물질세계 속을 살아가는 사람의 정체성입니다.
각 개인은 저마다 물질세계를 다른 관점으로 바라봅니다. 소통을 위한 공공적인 말은 이 다른 관점을 소통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들이 일상에서 소통하는 말을 알면 그 사람들이 세상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가령 한국사람은 '한국'이라는 영토국가에 살고 있는 국민이 아닙니다. 한국말을 쓰는 사람 모두를 의미합니다. 수천년, 수백년 전에 살았던 사람도 같은 한국말을 썼다면 한국사람이고, 다른 대륙 혹은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도 한국말을 쓰면 한국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시공간을 초월한 한국사람들의 바탕과 정체성을 알려면 '한국말'을 알아야 합니다. 이 한국말에 한국사람들이 경험과 관점이 축적되어 있으니까요.
현대에 들어오면서 서양의 많은 학자들이 말을 연구했습니다. 그들이 말을 연구한 이유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들은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어원을 찾고, 문법을 정리하고 언어의 구조를 연구했습니다.
20세기 초 예술가들은 언어학자들이 연구한 말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소통 기호를 주목했습니다. 바로 새김 바탕치기로 형성된 그림이죠. 그림은 말과 글보다 소통 보편성이 훨씬 높습니다. 현대 예술가들과 디자이너들은 그림의 의미요소를 모두 지웁니다. 과거 문명이 쌓아올린 그림의 성과, 즉 고전 미술의 아우라를 모두 부정하고 과감하게 추상으로 나아감으로서 새로운 문명, 새로운 세상의 이미지 바탕을 만들어내죠. 진정한 design, 구체적으로 말해 de+sign을 한 것이죠. 이를 현대 미술에서 데스틸(더스타일), 구축주의, 구성주의라 말합니다.
이 노력 덕분에 전 인류가 하나의 문명적 이미지를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현대 인류는 비록 말과 글이 다르지만, 같은 이미지 속에 살아갑니다. 즉 새김 바탕치기의 공통경험을 갖고 있죠. 새김 바탕치기로 형성된 그림언어의 바탕위에서 말과 글이 다른 사람들이 다양한 언어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해 보지 못했던 현상이죠.
이제 20세기 초 예술가들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 상상이 되시나요? 바로 새김 바탕치기입니다. 이 바탕치기가 바로 design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여김 바탕치기'입니다. 축의 시대 4대 성인이 했던 바로 그 언어놀이 말입니다. 이분들은 언어놀이를 통해 시대를 대표하는 윤리적 바탕을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할일이 바로 이것이죠. 이 언어놀이를 제대로 하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언어적 바탕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힘들게 현대 예술과 디자인, 현대 기호학과 언어학을 연결해 우리가 공통으로 공유하는 언어적 바탕을 규명한 것이죠.


20세기 철학을 '구조주의'라고 말합니다. 이 구조주의의 기초를 놓은 사람이 스위스 언어학자 페르디낭 뒤 소쉬르입니다. 앞서 우리가 배웠던 기호, 기표, 기의의 관계를 처음 발견한 사람이 바로 이 분입니다. 기호학의 창시자라고 할까요. 사람들은 소쉬르의 기호학을 구조언어학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이 언어학 덕분에 구조주의라는 개념이 생길 수 있었습니다.
구축, 구성, 구조라는 말에 모두 '얽을 構'자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조주의라는 것은 기호로 쌓은 집을 의미합니다. 구조가 집이라면 기호는 벽돌입니다. 벽돌이 제대로 되어야 집이 튼튼하기 때문에 벽돌을 잘 만들어야 합니다. 벽돌을 잘 만들려면 속을 알차게 하고 겉을 단단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기호도 마찬가지입니다. 기호는 기표와 기의로 만들어집니다. 겉보기가 기표이고 속들이가 기의라고 말씀드렸듯이, 기표가 겉이고 기의가 속입니다. 겉보기 기표와 속들이 기의를 제대로 만들려면 바탕치기가 잘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속이 알차고 겉이 단단한 좋은 기호가 만들어지겠죠.
그림과 글로 만들어진 기호는 본래 말입니다. 좋은 기호=벽돌로 구조=집을 쌓는 과정이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이란 '말쌓음'을 의미합니다. 말을 제대로 쌓으려면 먼저 기단을 잘 놓아야 합니다. 이 기단이 말의 바탕입니다. 문법으로 말하면 subject(곧이말)에 해당되겠죠. 이 기단위에 집을 짓듯 object(맞이말)와 verb(풀이것말)을 쌓아 올리는 것이 바로 말쌓음=말씀입니다. 말을 쌓을때 말벽돌이 무르거나 제대로 쌓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말씀이 붕괴됩니다.
요한복음 첫 구절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입니다. 여기서 말씀은 logos의 번역입니다. 이 logos는 '논리'라고도 번역됩니다. 우리는 "논리를 쌓아간다" 혹은 "논리가 무너졌다"라고 말하면서 논리를 마치 집짓기처럼 은유합니다. 그 이유가 논리=logos=말씀이 모두 집을 짓는 행위에서 바탕치기 되어 있기 때문이죠. 이 논리=logos=말씀을 제대로 쌓은 집이 구조가 튼튼한 집입니다. 구성주의가 원하는 것은 튼튼한 이미지의 집이고, 구조주의가 원하는 것이 튼튼한 말의 집입니다. 튼튼한 집을 쌓기 위해서는 먼저 이미지벽돌, 말벽돌이 튼튼해야 합니다. 즉 언어적 기호가 튼튼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호만들기=언어놀이=de+sign이 중요합니다.

이 책을 제대로 읽어 내신 분은 언어적 바탕에 대한 이해가 생겼을 것입니다. design이 무엇인지 바탕을 아셨을 것입니다. 이제 그 바탕을 믿고 언어놀이를 하면 됩니다. 언어놀이란 곧 '말쌓기 놀이=logos'를 말합니다. 태초에 누군가 말의 기단을 놓았습니다. 이후 인류는 그 위에 계속 말을 쌓고 있습니다. 약 이천년간 따로따로 말을 쌓아오다가 지난 100년전부터 함께 쌓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축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죠.
2500년전 축의 시대의 가장 큰 기술변화는 '문자'의 등장입니다. 문자가 보편화 되면서 생각의 구조가 달라졌죠. 문자 이전에는 말로서 생각을 했다면, 문자 이후부터는 말과 글을 동시에 사용하게 됩니다. 말은 금방 증발되었지만 글로 써놓은 것은 증발되지 않고 오래 유지되었죠. 우리가 지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공자와 붓다, 예수의 말을 읽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문자 덕분입니다.
2500년이 지난 새로운 축의 시대인 우리시대 가장 큰 기술변화는 '디지털'입니다. 디지털 세상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글쓰기가 아니라 키보드로 글을 타이핑하는 '글치기'로 바뀌었습니다. 손으로 쓰는 글쓰기는 한번 쓴 글을 고치기 어렵습니다. 지우고 다시쓰려면 불편하기에 말을 계속 주욱 이어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글은 설명적이고 호흡이 긴 만연체가 많습니다. 반면 화면에 글치기할때는 지우고 다시쓰기가 수월합니다. 여기저기의 문장을 복붙(복사, 붙혀쓰기)하면서 생각을 이리저리 편집 할 수 있죠. 쉽게 말해 분해+조립, 해체+콜라주가 수월합니다. 디지털 세상은 글만을 단독으로 다루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글과 그림을 동시에 다룹니다. 아예 말과 글, 그림이 어우러진 영상으로 편집해 소통하죠. 디지털 세상과 연계된 3D프린터가 발명되어 '그릇'을 만드는 과정도 급격한 변화를 예고합니다. 본인이 직접 그릇 이미지를 디자인해 실제 그릇으로 프린트하죠. 이 과정이 활성화되면 공장기계에 의한 생산 방식도 바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생산자와 소비자'라는 관계,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계급도 바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와 단절된 완전히 다른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과거 성인들과 학자들의 지혜는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과거 훌륭한 분들을 업적과 성과를 폄하해서는 안되지만 '나'를 그 분들에 빗대어 주눅들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존감'과 '자신감'입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그랬듯 자존감을 가지세요. 데카르트가 말했듯 '디자인 되는 인간'에서 '디자인 하는 사람'으로 거듭나십시오.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람'입니다. 객관적인 '인간'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 면에선 여러분은 고대 그리스사람들이나 데카르트, 20세기 예술가와 언어학자들보다 훨씬 더 좋은 여건을 갖고 있습니다. 디지털 정보혁명으로 우리는 모두의 지혜를 언제어디서든 공유할 수 있으니까요.
여러분은 이미 머리속에 섬세한 '말차림=언어바탕'을 갖고 계십니다. 이 말차림을 믿고 새로운 축의 시대를 이끌어 가시면 됩니다. 자신감을 갖고 디자인design 하세요. 디자인을 통해 우리의 언어바탕을 더욱 크고 참되게 키우길 바랍니다. 긴 글 읽고 생각해주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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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경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디자인 저술가, 이론가, 교육자다. 저서로는 『런던에서 온 윌리엄 모리스』(지콜론북, 2014), 『역사는 디자인된다』(민음사, 2017), 『아빠 디자인이 뭐예요』(이숲, 2020)가 있으며 『디자인평론』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국민대학교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하고 그린디자인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경향신문 정보 그래픽 디자이너, 국민대학교 디자인 대학원 겸임 교수로 재직한다. 2017년부터 디자인대안학교 디학(designerschool.net)을 운영하며, 한국말 공부 모임 ‘묻따풀 학당’에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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