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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언어 4강-3

윤여경| 2021.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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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및 디자인의 언어놀이


4) 그래픽 요소들

지금까지 우리는 시각언어를 구성하는 요소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 요소들은 예술과 디자인의 공통분모입니다. 어떤 예술가와 디자이너도 이 요소들을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이 요소들로 감각하고 지각하고 생각하니까요. 만약 예술과 디자인을 요리에 비유한다면 이 요소들은 요리를 위한 재료에 해당되겠죠. 재료가 없는 요리, 상상이 되시나요? 그런것은 있을 수가 없죠.
시각언어는 사실적 경험에서 비롯되고 시작됩니다. 사실적 경험을 의식하는 순간 아이콘적 그림이 떠오르죠. 그 그림은 글과 함께 기본층위 범주를 형성합니다. 이 그림과 글을 추상화시키면 구, 입체, 면, 선, 점으로 이어지면서 생각의 기반이 되는 의미요소가 점차 사라지고 감각과 지각적 느낌만 남게 되죠. 점이 되면 그 느낌조차 증발되어 버립니다. 색은 형태, 언어와는 다른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는 시각언어 요소입니다. 형태와 언어가 위아래, 앞뒤,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를 제공한다면, 색은 이 경계의 대비와 관계를 알려줍니다. 배경과 전경, 배경들끼리, 전경들끼리의 경계과 관계가 형태와 색에 의해 구성됩니다. 그리고 이 구성은 언어적 맥락에 따라 재구성되죠. 사람들은 언어놀이를 통해 이 재구성을 즐기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예술과 디자인을 통칭해 '언어놀이'라 말합니다. 이 언어놀이는 언어적 바탕에서 이루어지는데, 재밌는 점은 언어놀이가 언어바탕을 계속해서 바꿉니다. 예술과 디자인 안에서 언어놀이과 언어바탕이 함께 어울리는 것이죠. 이 어울림을 한자어로는 편집 혹은 프랑스말로는 콜라주(몽타주)라고 부릅니다. 편집은 글을 연상시키고, 그림에 있어 콜라주와 몽타주는 목적이 없거나 있다는 점에서 다소 다르지만 분해와 조립이라는 측면에서 모두 같은 맥락입니다.



이 놀이는 인류가 문화를 형성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4만년전 동굴에서 발견된 조각을 보면 머리는 사자이고 몸은 인간인 독특한 형상이 있습니다. 구석기 동굴에 살던 사람들이 사자와 사람을 의미와 형태요소로 분해해 재조립한 형상이죠. 물론 당시에 이런 동물이 있을지 모른다고 주장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상당히 희박합니다. 사람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죠. 동물과 사람의 의미요소가 합쳐진 반인반수의 형상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간 문명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됩니다. 이집트와 앗시리아 문명에서도 흔하게 찾아 볼 수 있죠. 이집트의 신들은 대부분 머리가 동물입니다. 반면 앗시리아의 라마수는 머리가 사람이죠. 라마수는 더욱 특이하게 사람과 사자와 새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 조합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실적 지각경험을 생각으로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행위는 데카르트만의 특별한 생각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행위는 데카르트가 발명한 것이 아니라 재발견한 것이죠. 이런 시각으로 인류문명의 미술작품들, 생활유품들을 보면 대부분 이런식으로 분해-조립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프리카의 가면이나 귀족들의 문장, 종교적 상징들은 모두 해체-콜라주의 방법으로 재구성되어 있습니다. 다만 현대와 다른 점은 그림과 글이 따로 분리되는 경향성이 강하다는 점이죠. 그래서 20세기 이전의 예술이나 생활양식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대부분 보편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언어적 요소들이 많습니다. 때문에 이 작품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요소들의 언어적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죠.
지중해를 대표하는 미케네 문명과 미노스 문명은 거의 같은 시기에 공존합니다. 미케네 문명의 상징은 사자였고, 미노스 문명의 상징은 소입니다. 미노타우로스의 모습을 보면 머리는 소, 몸은 사람이죠. 사자요소의 경우 '용맹함'을 상징합니다. 전투와 약탈로 살아가는 문명과 민족들이 주로 이 요소를 좋아했죠. 이를 통해 미케네 문명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자와 소만이 아니라 늑대와 양, 독수리와 비둘기 등의 상징적 대비를 통해 우리는 어떤 문명이 어떤 성향을 추구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단군신화에 호랑이와 곰이 등장합니다. 즉 이 땅에 살던 민족들이 호랑이와 곰처럼 용맹하고 강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죠. 그런데 단군신화에서 사람이 되는 동물은 참을성 많은 곰입니다. 이 신화를 통해 한국사람들의 문명과 성격을 즉각적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상징이 일종의 언어적 역할을 하는 것이죠.




20세기를 넘어서면서 세계의 모든 문명이 어울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로 어울리려다 보니 오래된 전통적인 의미요소들이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이 의미요소를 지우려는 노력이 이어집니다. 오스트리아 출신 건축가인 아돌프 로스는 "장식은 범죄다"라는 막말을 하기에 이르죠. 과거를 부정하려면 지금까지 축적된 모든 의미요소를 지워야 새로운 문명을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가능하죠.
20세기 이전과 달리 20세기 이후의 생활양식은 대부분 추상적인 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의미요소를 완전히 제거한 느낌요소만을 활용합니다. 과거가 어쨌든 혁명적 예술가들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로스의 주장에 공감해 의미요소를 완전히 지워 버립니다. 의미와 형태를 해체해 새로운 예술적 모험을 감행하죠. 뒤샹은 예술적 가능성 확대를 위해 나아갑니다. 뒤샹을 따르던 예술가들은 현대 예술가라 불렸습니다. 또 다른 그룹은 바우하우스입니다. 이들은 형태를 해체해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대중적인 보편양식을 추구하죠. 과거의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철저하게 변화시켰죠. 요즘 우리의 환경은 이런 노력이 축적된 결과입니다.
현대인은 옷이며, 먹거리며, 주거까지 모두 과거와 크게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특히 옷과 공간의 경우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젠 어떤 문명적 특성조차 찾기 어려워졌죠. 유럽과 아시아, 아메리카, 인도, 아프리카, 호주 심지어 태평양의 섬들에서조차 우리는 같은 생활양식을 공유합니다. 기존 문명에서 이어지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그것은 유희적 장식일뿐 세계 문명의 생활양식은 거의 동일하게 재편되었습니다. 아래 보시는 사진들을 보시면 이 인테리어와 건물, 도시에서 특별히 어떤 지역적 특성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아메리카나 유럽, 아시아 등 어디에도 이런 도시는 있으니까요.


인테리어와 건물, 도시는 모두 점선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도시는 건물이라는 점과 도로라는 선, 공원이나 강 등의 면이 조합되어 도시라는 하나의 입체를 형성합니다. 인테리어와 건물도 이런식으로 분류해서 살펴볼 수 있겠죠. 이것은 일종의 관점입니다. 과거 20세기 이전에는 하나의 의미요소를 통채로 가져와 사용했다면, 20세기 이후부터는 의미가 없는 추상화된 요소들를 갖고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니까요. 언어놀이에 있어 큰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죠.
어릴때 프뢰벨이나 몬테소리와 같은 유치원 교육을 받은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가지고 놀던 사물들 대부분이 점선면으로 구성된 요소들입니다. 유아단계부터 의미요소가 아닌 느낌요소를 줌으로써 디자인 '되는' 사람이 아니라 디자인 '하는' 사람을 지향하도록 장려하는 것이죠. 동시에 언어교육도 이루어집니다. 언어적 바탕이 있어야 예술과 디자인을 소통할 수 있으니까요. 이런 교육이 바로 '근대인'을 만드는 것입니다.




5) 예술가와 디자이너

사실 모든 문명의 성과 앞에는 예술과 디자이너들의 선제적인 노력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새김 바탕치기를 통해 사실적 경험을 그림(이미지)로 환원시켜야 비로소 사람들은 여기에 언어적 의미를 부여하게 되니까요. 그래서 예술와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전위적 활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빈티지 패션에 전문성을 갖춘 한 후배가 패션 힙스터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습니다. 패션의 유행에도 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맨처음 어떤 사람이 특이한 조합을 하고 나타납니다. 가령 수염과 머리를 길게 기른 사람이 후질근한 체육복을 입고 한 손엔 소주병을 들고, 다른 한 손에 경영학책을 든 사람입니다. 평상시에 볼 수 없는 조합이죠. 보통은 이런 사람을 이상한 시선으로 보지만 새로운 패션에 관심 있는 사람은 이 사람의 특이한 조합에 주목합니다. 그래서 이상하게 보이는 요소들을 생략하고 세련되게 보일 수 있는 요소들을 부각시켜 트랜드한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이 트랜드는 새로운 유행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됩니다. 패션에 민감한 사람들이 이 조합을 조금씩 사용하면서 대중적인 유행으로 이어집니다. 수염과 체육복, 소주와 경영학책이라는 묘한 조합이 하나의 트랜드가 될즈음 이 조합을 최초로 시도했던 사람은 그 조합이 이미 식상해져 완전히 새로운 조합을 하게 됩니다. 머리를 빡빡깍고 양복에 한복바지를 입고, 와인과 철학책을 든다고 할까요.
후배는 이런 사람이 가장 최전선에 있는 힙스터라고 말합니다. 이 후배는 평소 꽤 독특한 조합으로 옷을 입었는데, 자신은 최전선에 있는 힙스터들의 조합을 다소 완화시켜 입는다고 합니다. 주변에는 이런 친구들이 꽤나 있는데 자신들이 패션 트랜드를 주도한다는 나름의 자존감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패션이 대중적인 트랜드로 연결된다고 하더군요. 재밌는 점은 최선전에 있는 힙스터입니다. 이들은 패션 트랜드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본인의 행위가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별로 관심이 없ㅅ브니다. 주변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은채 오로지 자신이 관심있는 것들을 추구하기만 하죠.
저는 이 이야기가 마치 예술가와 디자이너의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예술과 디자인은 본래 하나의 분야입니다. 예술이 있기에 디자인이 있고, 디자인이 있기에 여러 사람들이 예술과 디자인을 즐길 수 있거든요. 위의 힙스터 흐름대로 예술가와 디자이너 그리고 이와 관련된 사람들의 역할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앞서 제가 말씀드렸던 추상적 형태와 언어적 형태 그리고 색은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시각언어 요소들입니다. 표현과 소통을 추구하는 예술가와 디자이너라면 반드시 이 요소들을 선택하고 조합해야 합니다. 문제는 어떤 요소를 먼저 찾아서 조합하냐 입니다. 세잔은 이런 점에서 최초의 힙스터입니다. 최초와 구와 원기둥, 원뿔과 같은 추상적인 요소를 발견했거든요. 세잔의 해체와 콜라주 방식은 피카소와 마티스에게 이어졌고, 급기야 러시아와 네덜란드의 예술가들에 의해 극단적인 형태로 추상화됩니다. 이런 예술가들을 아방가르드, 즉 전위적인 예술가들이라 불렸습니다.
이 예술가들중 일부가 바우하우스에 모입니다. 바우하우스에서 디자인 개념이 비롯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바우하우스 예술가들은 추상적인 요소들을 콜라주해 글꼴과 의자와 같은 보편적인 생활양식과 소통방법을 찾아냅니다. 의미요소를 완전히 제거한 추상적 요소들을 활용했기에 과거의 어떤 문명과 단절된 완전히 새로운 양식이었죠. 게다가 단순하고 보편적인 양식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이념, 공장식 대량생산이라는 새로운 생산방식과도 부합했습니다. 바우하우스의 양식은 자본가들에게 주목받게 됩니다. 자본가들은 추상적인 요소들을 활용해 새로운 스타일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 스타일이 트랜드를 형성하면서 대중소비자들과 사용자들은 자연스럽게 이 양식에 적응하게 되었죠. 그리고 문화비평가들은 대중화된 새로운 양식을 분석하고 비판하게 됩니다.
이런 흐름은 패션과 예술/디자인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역사학에서 최초로 요소를 발견하는 사람은 고고학자입니다. 이들은 유적지를 섬세하게 살펴 고고학적인 가치가 있는 요소들을 발견하죠. 이 요소들이 학계에 보고되면 관련 역사학자들이 주목합니다. 역사학자들은 요소들을 재해석해 하나의 역사 스토리를 만들어내죠. 마치 디자이너가 예술적 요소를 재해석해 스토리를 만들어 내듯이요. 이렇게 만들어진 스토리는 출판사 편집자에 의해 책으로 만들어집니다. 이 책이 서점에 나오면 역사에 관심있는 독자들이 읽겠죠. 주목할만한 내용이라면 비평가들이 이 현상에 주목할 것입니다. 이렇듯 패션과 예술/디자인의 흐름을 역사학에 적용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역사학만이 아니라 생물학, 경제학 등 대부분의 분야에는 이런 흐름이 있습니다.
이 흐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크게 두가지입니다. 첫번째는 시각과 언어의 문제입니다. 전위 예술가와 예술가, 디자이너는 모두 시각 등 경험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경험 그 자체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재해석하는 사람들이라고 할까요. 이들의 다소 동물적인 감각을 갖고 '새김 바탕치기'를 합니다. 그렇기에 결과물들이 주로 감각을 즉각적으로 자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생산자와 사용자, 비평가들은 언어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감각경험이 지각적으로 재현된 것을 갖고 말을 만드는 '여김 바탕치기'를 한다고 할까요. 생산자들이 모든 디자인을 상품으로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생산자들은 대량생산을 하기에 초기 투자에 아주 예민합니다. 그렇게 걸러져 생산된 상품은 소비자(사용자)에 의해 다시 선택되어야 합니다. 소비자는 만원짜리 물건도 아주 신중하게 고르니까요. 시장에서 성공한 상품 등 생활양식은 다시 비평가들의 말과 글에 의해 재평가됩니다.
예술가와 디자이너가 경험을 지각으로 연결시키는 사람들이라면 생산자와 사용자, 비평가들은 경험과 지각을 연결시키기 보다는 생각과 지각을 연결시키는 사람들입니다. 전자가 언어 놀이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후자는 언어 바탕을 만드는 사람들이죠. 이들의 순환이 한 사회의 언어 바탕을 형성시키고, 집단적 소통을 풍성하게 만들죠.


두번째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시각언어에 있어 역할이 있다는 점입니다. 언어놀이와 언어바탕을 형성하는 그룹이 따로 있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언어적 바탕은 여러 주체들이 함께함으로써 만들어집니다. 그 언어를 바탕으로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감에 있어 다양한 역할이 있다는 점을 반드시 주목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우리사회의 정신적 질병으로 여겨지는 '자폐증'에 주목합니다.
최초로 자폐증을 발견하고 이 증상에 주목한 사람은 20세기 초 빈의 신경증 의사 아스퍼거입니다. 아스퍼거는 감각이 예민하고 언어적 소통이 어려운 어린아이들의 증상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이 아이들 각자가 보통의 아이들과 다른 방식으로 감각하고, 소통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때론 이 방식이 특정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아스퍼거는 이런 아이들을 '꼬마 교수님'이라 부르며, 이 특별한 아이들을 위한 개별적 교육이 필요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자폐증을 '아스퍼거 증후군'이라고 말합니다.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살아온 템플 그랜딘은 유명한 동물학자이자 축사디자이너입니다. 그녀는 아스퍼거 증후군의 대표적인 특징인 언어적 장벽을 극복하고 책까지 집필합니다. 그 책의 제목이 <나는 그림으로 생각한다>입니다. 책의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아스퍼거 증후군은 말이나 글보다 '그림'이 익숙합니다. 여김 바탕치기보다 새김 바탕치기에 능한 사람들이죠. 그녀의 책을 읽으면 새김 바탕치기의 특별한 능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언듯 본 이미지를 정확히 기억하고, 그걸 또 정확하게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아래에 있는 그림은 그 사례중 하나입니다.
아래에는 두개의 말 그림이 있습니다. 하나는 4만년전 쇼베 동굴에 그려진 동굴벽화이고, 다른 하나는 나디아라는 아스퍼거 증후군 아이가 그린 말 그립입니다. 그녀는 생후 20개월이 지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보통 아이들은 20개월이 지나도 그림을 거의 그리지 못합니다. 그리더라고 아주 어설프게 그리죠. 하지만 나디아는 자신이 본 여러말의 특징을 정확히 포착하고 표현했습니다. 심지어 움직임까지 잘 표현했죠. 특별한 기억능력과 표현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석기 시대에는 문자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글로 기록할 수 없었죠. 그렇기에 저는 구석기 시대에는 그림으로 기록을 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이들은 무엇을 기록하려 했던걸까?" 이런 관점에서 구석기 동굴을 벽화들을 보면 아주 흥미롭습니다. 기록을 하려면 이야기구성 능력과 함께 비상한 기억력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림을 잘 그려야했겠죠. 이 세가지 조건 중 아스퍼거 증후군은 2가지를 충족합니다. 아스퍼거 증후군은 기억력이 아주 뛰어납니다. 그리고 경험을 이미지적 패턴으로 구성하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이미지의 중요한 경계를 정확히 포착해서 표현하죠. 이는 언어적 선입견이 별로 없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뇌기억을 연구하는 신경학자 에릭 켄델은 구석기 동굴의 그림과 나디아의 그림을 비교하면서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을지 가설을 제기합니다. 불을 피워놓고 그림을 그렸더라 하더라도 어두운 동굴에서 정확하게 말을 표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에릭 켄델은 구석기 동굴의 그림을 그린 사람들이 아스퍼거 증후군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합니다.
에릭 켄델의 추정은 현대의 사회에 시사하는 점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 아스퍼거 증후군은 그 역할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합니다. 단순하게 정신병으로 분류되죠. 하지만 아스퍼거는 100명의 아스퍼거 증후군 아이들이 있다면 100개의 아스퍼거 증후군이 있다고 말합니다. 즉 각각 모두 다른 증상을 갖는다는 의미죠. 이런 사람들에게 단순한 일을 맡기고, 보호하려고만 하는 것이 적절할까요. 구석기 시대에 이들의 비상한 기억력과 표현력을 살려 역할을 주었듯 우리 사회에서도 이들이 능력이 기여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지 않을까요.


이런 저의 생각을 증명해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몇년전 광고에 어떤 흑인이 등장해 흰 캔버스에 서울 풍경을 단숨에 그리는 사람이 소개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헬리콥터를 타고 서울을 한번 구경하면, 그것을 그대로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앞서 아스퍼거 증후군의 2가지 탁월한 특징, 비상한 기억력과 정확한 표현력을 두루 갖추고 있죠. 이 사람의 이름은 스티븐 월트셔입니다. 월트셔의 부모와 선생님은 일찍이 월트셔의 재능을 발견하고 미술교육을 시켰습니다. 사실 워낙 재능이 뛰어나 따로 교육할 필요가 없었죠. 맘껏 표현할 수 있는 환경만 조성해 주면 되었습니다. 월트셔는 좋은 후원자와 선생님을 만나 자신의 재능을 맘껏 펼칠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사례는 안면실인증이자 난독증을 가진 척 클로스입니다. 척 클로스는 타일을 콜라주해 자신의 초상화나 다른 사람의 초상을 만드는 예술가입니다. 척 클로스는 얼굴을 인식하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를 예술적 감수성으로 승화시킨 사례입니다. 직접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타일이라는 소재와 간접적 접근법을 택한 것이죠. 덕분에 완전히 새로운 느낌의 표현이 가능해졌습니다.
두 사례는 예술가들이 어떤 존재인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정상적으로 만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스퍼거 증후군이나 실어증, 안면실인증, 난독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그 자체로 존중하지 못하고 '환자'나 '문제있는 사람'으로 취급하죠. 하지만 때론 이들은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그 능력이 사회에 유용성이 있는 경우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아스퍼거 증후군의 경우 약 10%가 월트셔처럼 우리 사회에서도 인정될만한 능력으로 여겨집니다. 이들을 서번트라고 말하죠.
저는 이 서번트들이 시각언어에 있어 경험에서 새로운 요소를 발견해 지각적으로 재현하는 새김 바탕치기에 능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월트셔나 척 클로스 같은 예술가들은 이 시대 가장 전위적인 힙스터 예술가라고 할 수 있죠. 이 사람들의 뇌는 분명 보통 사람들의 뇌와 다른 구성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들도 역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보는 감각세상은 보통의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감각세상입니다. 마치 천체망원경으로 먼 우주를 보고, 전자현미경으로 바이러스를 보듯, 이들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소중한 존재들이죠.
그림은 경험을 말로 만들어주는 중간단계로서 인류의 가장 원시적인 소통능력입니다. 그래서 심리학자 니콜라는 험프리는 "그림을 그리는 데에는 굳이 진화한 현대적 마음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앞서 저는 언어놀이와 언어바탕을 거론하면서 '말/글'이 '意/法'의 기억이 되어 감각을 통제하는 선입견을 제공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진화한 현대적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시각은 한정적입니다. 반면 지금 소개한 사람들은 난독증과 같은 언어적 문제를 안고 있기에 오히려 순수한 새김 바탕치기가 가능한 사람들이입니다. 이분들이 약간의 추상적 능력만 갖추게 된다면 굉장한 언어놀이가 가능할 지도 모르죠. 이런 점에서 저는 언어바탕에 있어 이런 사람들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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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경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디자인 저술가, 이론가, 교육자다. 저서로는 『런던에서 온 윌리엄 모리스』(지콜론북, 2014), 『역사는 디자인된다』(민음사, 2017), 『아빠 디자인이 뭐예요』(이숲, 2020)가 있으며 『디자인평론』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국민대학교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하고 그린디자인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경향신문 정보 그래픽 디자이너, 국민대학교 디자인 대학원 겸임 교수로 재직한다. 2017년부터 디자인대안학교 디학(designerschool.net)을 운영하며, 한국말 공부 모임 ‘묻따풀 학당’에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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