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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언어 4강-2

윤여경| 2021.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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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형태와 색의 공감각



1) 추상체와 간상체
한국말에는 이것과 저것이 있습니다. 눈앞에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것인 '저것'입니다. 저것은 이것에 비해 흐릿합니다. 손가락을 눈앞에 놓고 집중해서 보세요. 그러면 손가락이 또렷하게 보입니다. 이것입니다. 눈을 고정한채 손가락을 옆으로 약간 옮기면 손가락이 흐릿해지는 순간 그 뒤에 있는 대상이 또렷하게 보입니다. 이것이 손가락에서 다른 것으로 바뀐 것입니다.
우리의 망막세포는 크게 추상체와 간상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추상체세포는 주로 가운데에 몰려 있고, 간상체세포는 주로 바깥쪽에 있습니다. 둘의 역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추상체는 또렷히 보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을 보는 것이죠. 반면 간상체는 흐릿한 것을 보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 주변의 노든 것들은 간상체에 의해 보입니다. 우리 눈은 눈앞에 또렷히 보이는 것 외에 180도 안에 있는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손가락을 들어서 집중해 보세요. 그러면 손가락의 색과 자세한 형태가 선명하게 보일 것입니다. 손가락에 눈을 고정한 채 주변이 어떻게 보이나요? 흐릿하게 보입니다. 색은 느껴지지만 사실 색이 느껴진다기 보다는 색을 기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간상체에는 색을 감각하는 세포가 없으니까요. 눈을 고정하고 손가락을 옆으로 옮겨보세요. 그러면 손가락이 시야에서 사라지면서 다른 대상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손가락이 정면에서 약 15도 정도 벗어나면서 손가락은 살짝 사라졌다가 뿌연 단계로 들어갑니다. 추상체에서 벗어나 간상체 인식으로 넘어간 것이죠.
추상체에는 빛을 감지하는 색채세포가 가득합니다. 주로 RGB(빨강, 녹색, 파랑)로 분류되어 인식되고 뇌에서 이 색들을 조합하죠. 더불어 대상의 형태를 섬세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반명 간상체는 주로 움직임과 경계를 감지합니다. 어떤 대상이 움직이면 그 대상의 경계가 인식되죠. 120도 정도 옆에 어떤 사람이 앉아 있으면 대강 흐릿하게 그 대상을 배경에 뭍혀서 인식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일어나서 움직이면 그 사람의 경계가 배경에서 분리되어 움직임이 인식되죠. 이 인식을 위해 추상체처럼 디테일한 색과 세밀한 형태를 파악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상이 어디로 움직이는지만 알면 되죠.
이렇듯 우리 눈은 형태와 색을 구분해서 인식합니다. 물론 집중되는 추상체 부분은 색과 형태가 동시에 인식됩니다. 하지만 집중하지 않는 간상체 부분은 색을 굳이 인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배경과 대상을 분리하는 것으로 충분하죠. 이를 미술에서는 배경과 전경이라고 말합니다. 그림을 그릴때 전경은 다소 선명하고, 배경은 다소 흐릿하게 표현하죠.



그림을 그릴때 맨 처음 배우는 것이 '소묘'입니다. 아이들에게 연필을 쥐어주면 어떤 대상의 경계를 그리게 됩니다. 사람을 그리면 머리는 크고 몸은 단순한 선으로 처리됩니다. 대상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대강 비슷합니다. 아이는 중요한 것은 크고 상세하게 표현하기에 그리을 보면 아이가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알 수 있죠. 이는 전문적인 소묘와도 연결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의 보면 그가 사람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빈치는 종종 해부도 했기에 그가 신체의 어떤 부분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대상과의 유사성은 아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게 묘사하죠.
중요한 것은 색입니다. 소묘에는 색이 없습니다. 색은 일종의 면입니다. 소묘는 주로 선을 사용하기에 대상을 묘사함에 있어 의도적으로 색을 배제한 것이죠. 물론 밝음과 어둠을 구분하기 위해 여러 선을 겹쳐서 표현하기는 하지만 이를 색이라 말하긴 어렵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어떤 대상을 인식함에 있어 선으로 이루어진 형태와 면으로 이루어진 색을 구분해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앞서 기호학을 설명하면서 사람은 안과 밖의 관계를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삼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소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대상의 안쪽과 바깥쪽을 구분해 경계를 인식합니다. 그 경계를 이어서 연결하면 연결된 안쪽은 전경인 사람이 되고, 바깥쪽은 배경이 됩니다. 섬세한 소묘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경계냐 작은 경계냐 차이기 있을 뿐이죠. 흐릿한 경계는 주로 간상체가 인식하고, 자세한 경계는 추상체가 인식합니다. 덕분에 사람은 누구나 소묘를 할 수 있고, 감상할 수 있죠. 추상체를 활성화해 큰 경계를 찾고 내부를 상세하게 묘사하면 멋진 소묘 그림이 완성됩니다. 그림을 보면 그림을 그린 사람이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알 수 있죠. 다만 아이의 그림은 아이 자신의 개별적인 인식경험이라면 다빈치의 그림은 보편적인 공통경험에 가깝습니다. 이렇듯 전문가는 공공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그림의 공공성이 뛰어날수록 탁월성을 인정받죠.



사람은 소묘로 섬세하게 경계를 구분할 수 있지만 실제 빛은 경계가 있을까요? 그림자를 보면 경계가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림자는 빛 자체의 경계는 아니죠. 빛은 반드시 대상과 만나야만 경계가 생깁니다. 이 경계는 선처럼 또렸하지 않습니다. 그림에 있는 마크 로스코의 색면처럼 경계가 모호하죠. 또한 색의 경계에서 배경과 전경을 구분하기도 어렵습니다. 모두 추상체가 작동하도 있기때문이죠. 결국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둘 사이의 대비가 전부입니다.
형태와 색은 겉과 속의 판단과 연결됩니다. 사람들은 겉은 선으로 형성된 형태, 속은 색으로 칠해진 속성으로 구분했습니다. 색을 먼저 칠하고 소묘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대상을 묘사할때 소묘로 먼저 그리고 나중에 색으로 칠합니다. 형태가 대상을 배경과 전경으로 구분하고, 색은 전경 혹은 배경의 맥락을 고려해 속성 및 관계를 표현하죠. 이렇듯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형태와 색을 구분해서 접근하지만 감상하는 사람은 굳이 형태와 색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둘은 늘 함께 다니죠. 형태가 곧 색이고, 색이 곧 형태로 느껴지죠. 그래서 우리는 형태를 인식할때 늘 색이 연상되고, 색을 인식할때 형태 또한 연상됩니다. 마치 세모에서 따가움과 매운 맛이 동시에 느껴지고, 색에서 소리와 열이 동시에 느껴지듯이요. 즉 감각은 자유롭지 않습니다. 감각은 사람이 구분해 놓은 공공성의 범주를 정확히 따르지 않죠. 다음 사진에서 이 사실이 증명됩니다.




2) 흑백인가 컬러인가
안과 밖의 경계를 나누는 형태는 경계를, 대비로 느껴지는 색은 관계를 인식하게 해 줍니다. 우리는 형태와 색을 동시에 인식하기에 경계와 관계가 동시에 인식됩니다. 전경과 배경이 경게로 구분되고, 전경들간의 관계, 배경들간의 관계가 구분되죠. 감각은 추상체와 간상체처럼 이 둘을 따로따로 구분하지만 우리의 지각은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감각은 기억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재구성되어 지각됩니다.
위에 보이는 사진을 보십시오. 칼라사진일까요? 흑백사진일까요? 언듯 보기에는 칼라사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죠. 사실 이 사진은 흑백 사진에 격자로 된 빛을 쏜 것입니다. 이 사진에는 입자로서의 색 구분이 없습니다. 흑백의 명암 구분만 있을 뿐이죠. 그런데 빛이 반사되면서 우리 눈에 총천연색 칼라로 변한 것입니다. 입자로서의 색이 없는데, 파동으로서의 색이 있는 것이죠. 분명 추상체를 자극이 없는 흑백사진인데 빛이 한번 더 덮어 씌워지면서 흑백이 칼러 사진으로 변한 상황이랄까요.
저도 왜 이 흑백사진이 칼러로 보이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물리학적 색 비밀의 규명이 아니라 물리적 기준을 통한 색 활용이 목적이니 이유를 명확하게 알 필요는 없습니다. 일단 중요한 것은 우리의 뇌가 흑백사진을 칼라사진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죠. 더 중요한 것은 칼러가 일관되지 않고, 다양하냐는 것입니다. 이 현상은 우리가 망막을 통해 색을 감각하는 것과 뇌를 통해 색을 지각하는 것이 다르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확대된 사진을 보면 더 확실하게 이 사진이 흑백이라를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사진은 가로선 빛이 반사되고 있습니다. 이 또한 흑백사진인데 칼러로 보이죠. 뒤에 보이는 숲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색이 선명합니다. 나무들은 배경이면서 흑백사진인데 가장 강렬하게 칼러로 보입니다. 신기하죠? 이 현상은 앞서 말한 추상체와 간상체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을거 같습니다. 우리 눈은 배경과 전경을 구분합니다. 사람들 뒤에 있는 숲은 아무래도 배경으로 인식되겠죠. 배경은 망막 주변의 간상체로 감각하게 됩니다. 아무래도 추상체는 계속 전경에 있는 사람에게 집중되려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배경을 감각하는 간상체에는 색채인식 신경세포가 별로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간상체로 보는 대상을 컬러로 여기는 이유는 우리 뇌가 기존 기억을 불러와 색을 입힌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사진의 경우가 정확히 그렇습니다. 오히려 전경의 대상보다 훨씬 더 칼러로 느껴지죠. 아무래도 전경은 추상체가 집중해서 보기에 다소 덜 칼러로 보이게 됩니다.
우리의 망막 세포는 눈에 보여지는 대상을 뇌가 지각합니다. 뇌가 지각한 정보는 형태만 혹은 색만 가지고 구성되지 않습니다. 여러 정보를 동시에 고려하죠. 형태와 색만이 아니라 움직임, 방향, 크기, 거리, 의도 등등 많은 조건을 따져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뇌가 그렇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시각정보는 주로 후배엽이라 불리는 뇌에서 처리됩니다. 후배엽은 뒤통수 아래쪽에 있습니다. 이 영역의 뇌는 다소 경계는 흐리지만 확실하게 분업화 되어 있습니다. 뇌과학자들은 감각의 역할에 따라 약 10개의 영역으로 분리해서 분석합니다. 앞서 우리가 열심히 살펴보았던 형태인식은 V1~3까지의 영역이 관할하고, 색인식은 V4영역이 담당합니다. 움직임의 경우 V5영역이 담당합니다.
이 영역들은 가깝게 인접해 있습니다. 긴밀하게 서로 정보를 주고 받죠. 형태경계에 따라 색관계가 부여되고, 때론 색관계에 맞추어 형태경계를 재구성합니다. 어떻게 보려하느냐에게 따라 우선순위가 달라지죠. 움직임을 먼저 보려하면 또 맥락이 달라집니다. 이렇듯 우리의 색인식은 망막이 주는 정보에만 의지하지 않습니다. 감각인식된 색과 형태 그리고 움직임은 기억과 의지, 주변맥락을 고려해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되죠. 때문에 같은 것을 보고도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심지어 한 사람의 기억조차 때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즉 기억은 객관적으로 믿을 바가 못되죠.
올리버 색스의 <화성의 인류학자>에는 색에 민감했던 화가가 자동차 사고로 색감각을 잃어버린 사례가 나옵니다. 팬톤 칼라를 통채로 외울 정도로 색을 잘 인식했던 사람인데 어느날 눈을 떠보니 모든 것인 흑백으로 보이는 것이죠. 우리는 이 사람의 V4영역에 이상이 생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아무리 기억이 지각대상에 색을 부여한다고 해도, 색을 지각하는 영역에 이상이 생겨 10%의 색정보가 없으면 기억도 소용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형태와 색의 공감각에서 살펴보았듯 시각정보와 청각정보도 딱히 구분되지 않습니다. 사실 후각, 미각, 촉각 등 모든 감각정보가 함께 고려되죠. 거기에 무려 90%나 되는 기억정보가 감각정보를 통제합니다. 물론 의지를 같고 감각정보만에 충실하려고 노력할 수 있지만 기억정보를 아예 무시하는 것 불가능합니다. 무의식적인 기억이 의식을 이미 지배하고 있는 상태니까요.
후배엽에서 처리된 시각정보는 다른 감각정보와 함께 뇌 중간의 베르니케 영역으로 전달됩니다. 이 영역에서 감각정보들이 종합되죠. 그리고 종합된 감각정보를 언어정보로 바꿉니다. 즉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죠. 만약 실어증 환자가 있다고 해보죠. 이 환자는 두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서 말을 못하는 경우, 상황은 이해하는데 말을 구성할 줄 몰라서 말을 못하는 경우입니다. 전자의 상황은 베르니케 영역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감각정보들과 기억정보는 문제가 없는데 이를 종합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상황이랄까요. 그래서 상황을 지각하더라도 언어로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죠. 얼마나 답답할까요.
후자의 경우는 다소 앞쪽에 있는 브로카 영역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는 모든 감각과 지각, 이해되는 생각까지 정상입니다. 그런데 이를 다시 언어로 정리해 종합하는 능력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베르크케 영역에 문제가 있는 사람과 브로카 영역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모두 같은 실어증이지만 원인이 완전히 반대죠.
언어는 감각 및 지각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지각된 상태로도 충분히 자신의 느낌을 표현할수 있습니다. 침팬치에게 그림도구를 주고 그림을 그릴 것을 암시하면 그림을 그립니다. 어느정도 그림이 완성되었다 싶으면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백지의 도화지를 주면 다시 그림을 그립니다. 이 침팬치의 그림은 상당한 가격에 경매에서 거래되었습니다. 즉 사람이 아닌 영장류도 자신의 지각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습니다. 화가가 될 자격이 충분하죠. 아마 개와 같은 포유류도 자신의 미적 감각을 재현할 것입니다. 고양이의 경우 끊임없이 혀로 자신을 꾸미니까요. 진화론에 보면 새들도 자신들의 둥지를 열심히 꾸밉니다. 새 둥지에 꽃을 꽂는다거나 반짝이는 예쁜 구슬을 가져다놓으면 새는 그 장식을 느끼게 됩니다. 별로다 싶으면 바깥으로 치워버리죠. 이를 통해 새도 나름의 미적지각이 있고 이를 재현하고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감각적 모방과 지각적 재현은 신경계를 가진 모든 동물이 공통적으로 갖춘 능력이지만 언어적인 생각은 사람만의 고유영역입니다. 사람은 언어적 소통을 통해 최고 포식자의 지위를 획득했습니다. 사람보다 힘이 세고 덩치가 큰 동물은 모두 정복했습니다. 집단의 힘이죠. 역설적으로 이 집단성 때문에 코로나19와 같은 작은 바이러스에 취약하지만요. 신경계를 가진 동물들은 감각정보를 지각정보로 전환해 이를 생각정보로 이해하는 베르니케 영역까지는 사람과 유사합니다. 물론 영장류쪽으로 갈수록 더 고도화되어 있죠. 영장류 중에 사람과 가장 가까운 동물은 침팬치입니다. 침팬치와 사람의 유전적 차이는 불과 2%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죠. 침팬치들은 천만명이나 되는 집단으로 절대 모이지 않으니까요.
사람과 침팬치가 다른 이유는 머리 앞쪽의 뇌 영역인 전두엽때문입니다. 사람의 전두엽은 침팬치보다 약 40% 더 큽니다. 이 전두엽에 브로카영역이 있습니다. 덕분에 지각적으로 이해된 생각을 다시 언어적으로 소통할 수 있죠. 언어적 소통은 다시 언어적 이해를 낳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의 베르니케 영역은 단순히 지각적 이해만이 아니라 언어적 이해까지 가능해지죠. 앞서 불교의 오온 '색성향미촉(안이비설신)'에 '법(의)'를 보탰던 것처럼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른 언어적 바탕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뇌과학자들은 대뇌피질을 '인간의 뇌'라고 은유합니다. 이 말은 대뇌피질은 사람만의 고유한 영역으로 여긴 것이죠.



3) 새김 바탕치기와 여김 바탕치기 뇌 영역
빛 상황이 완전히 다르더라도 빨간색 사과가 계속 빨간색으로 보이는 이유는 뇌가 색의 항상성을 유지시켜 주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기억 덕분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람은 '빨간색'이라는 언어적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떤 대상을 경험할때 감각들을 종합해 하나의 이미지로 환원합니다. 경험이 그림(이미지)로 전환되는 것은 '새김 바탕치기'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새김 바탕치기는 거의 무의식중에 이루어지죠. 사람의 경우도 "나는 귀가 들린다" "나는 소리가 들린다"는 무의식 중에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나는 소리를 듣는다"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는 의지를 같고 소리에 집중하는 상황입니다.



사람은 새김 바탕치기를 무의식과 의식, 두 경우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은 언어적인 '여김 바탕치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놀이를 통해 새롭게 형성된 언어바탕을 이미 갖추고 있기에 의식적인 감각지각이 가능합니다. 덕분에 지각을 넘어 생각=언어적으로 상황을 이해하고, 다시 이 상황을 분해하고 재조립해 생각=언어적으로 상황을 재구성할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앞서 우리가 시각언어에서 이 흐름을 충분히 다루었습니다. 이 흐름이 있기에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이 대상을 해체하고 콜라주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죠.
언어는 빨간색 사과과 계속 빨간색으로 보이는 '색항상성'만이 아니라 보는 각도와 운동에 따른 급격한 변화를 제어할 수 있는 '지각항등성'을 유지시켜 줍니다. 언어를 통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가령 여러분이 아주 혼란스런 명동거리에 있다고 상상해보죠. 그 혼잡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대화도 잘하고 구경도 잘합니다. 거의 대부분이 아무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때론 그 혼잡 상황을 즐깁니다. 사람들이 명동이라는 거리를 언어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그 혼잡한 상황을 통제할 수 있죠. 모두 뇌가 우리 지각과 생각의 항상성을 유지시켜주는 덕분이죠.
색 항상성과 지각 항등성은 베르니케 영역에서 담당합니다. 이 영역이 새김 바탕치기가 일어나는 영역이죠. 그리고 언어적 항상성을 유지시켜 주는 뇌 영역은 브로카입니다. 이 영역에서 여김 바탕치기가 일어납니다. 두 영역은 모두 언어와 긴밀합니다. 이 영역들 덕분에 우리가 시끄럽고 혼잡한 술집에서도 웃고 떠들며 즐겁게 놀 수 있는 것이죠.



형태와 색이 어떻게 언어와 연관되어 있는지 뇌 구성을 통해 알아보았습니다. 이제 위 그림을 보시면 어떻게 느껴지시나요? 어떤 형태가 보이나요? 여기는 사막인가요, 바다인가요? 바다라면 무언가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나요? 배가 보이시나요? 이 그림은 19세기 영국의 화가 윌리엄 터너의 말년에 그려졌습니다. 제목은 "터너, 눈보라 : 얕은 바다에서 신호를 보내며 유도등에 따라 항구를 떠나가는 증기선. 나는 에어리얼 호가 하위치 항을 떠나던 밤의 폭풍우 속에 있었다" 이 그림에서 제일 흥미로운 점은 긴 제목입니다. 터너는 그림을 그려놓고 사람들이 이 그림을 이해하지 못할까 걱정했는지 이 자세하게 그림에 대해 설명합니다. 아니면 사람들이 다양하게 해석하는게 싫었을지도 모르죠.
바다에서 눈보라가 치면 전경과 배경을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강한 움직임 때문에 색채적 대비가 모호해서 강한 대비가 불가능해지죠. 그래서 터너의 그림처럼 모든 것이 뒤엉키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다보니 바다는 바다 같지 않고, 하늘과 구름은 구분이 안되고, 배도 알 수 없게 그려집니다. 터너가 보았던 것을 모방하고, 기억한 것을 재현하면 사람들이 전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리죠. 위 그림처럼요. 그래서 터너는 제목(언어)를 적극 활용합니다. 제목이 거의 설명에 가깝죠. 우리는 이 그림의 긴 제목을 통해 터너의 감각과 지각 그리고 생각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제목 덕분에 감각과 지각, 생각이 하나로 어우려져 소통되는 것이죠.
이 그림은 인상파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이미 영국에선 고전회화가 많이 식상해진 상황이었죠. 그래서 새로운 기법이 많이 등장합니다. 미술사가들은 기법들을 숨가쁘게 따라가며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등등의 이름을 붙혔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미술사를 읽을때 19세기부터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그냥 '인상파'라는 강렬한 이름만 잔상으로 남아 있을 뿐이죠.
만약 터너가 이 그림의 제목을 상세하게 말하지 않았다고 어땠을까요? 그냥 '눈보라' 혹은 20세기 예술가들처럼 '무제'라고 말했다고 어땠을까요? 그럼 사람들은 이 그림을 마음껏 상상했을 것입니다. 또 미술사가들이 19~20세기 미술들을 분류하지 않고 그냥 그림만 주욱 보여주었다면 어땠을까요? 어떤 선입견도 같지 않고 그냥 물끄러미 그 작품들을 감상한다면 어떨까요?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그림은 즐기는 것이라 말하지만 사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림을 즐길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의 어떤 정보가 있어야 그 정보를 기반으로 그림을 이해할 수 있죠. 그 최소한의 정보가 바로 '언어'입니다. '무제'는 '이름 없음'이지만 나름대로 그 이유가 있습니다. 앞서 추상은 모름이고 아무거나 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술가들이 감상자들에게 그런 자유를 준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이 자유를 맘껏 즐기지 못합니다. 오히려 터너처럼 미술사가들처럼 상세하게 설명해주기를 바라죠. 예술의 자유를 즐기는 사람은 오로지 작가 자신 뿐입니다.
그럼 예술은 상세히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게 좋을까요?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어느정도 정보를 알고 나면 조용히 작품을 즐기고 싶어지죠. 미술사를 이해하고, 추상의 역할을 알고 있으며, 예술과 디자인의 언어적 흐름을 파악한다면 터너의 그림을 충분히 즐길 수 있습니다. 긴 제목을 보면 피식 웃음이 나올 수 있습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설명할 필요까지야"라고 읖조리면서요.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이 이미 이 경지에 오셨을 것이라 믿습니다. 이미 시각언어, 그림과 글, 언어놀이와 언어적 바탕을 알고 계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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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경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디자인 저술가, 이론가, 교육자다. 저서로는 『런던에서 온 윌리엄 모리스』(지콜론북, 2014), 『역사는 디자인된다』(민음사, 2017), 『아빠 디자인이 뭐예요』(이숲, 2020)가 있으며 『디자인평론』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국민대학교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하고 그린디자인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경향신문 정보 그래픽 디자이너, 국민대학교 디자인 대학원 겸임 교수로 재직한다. 2017년부터 디자인대안학교 디학(designerschool.net)을 운영하며, 한국말 공부 모임 ‘묻따풀 학당’에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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