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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언어 2강-3

윤여경| 2021.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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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시각+언어=시각기호='문자의 형성'


1) 소통이 잘되는 기호와 소통이 안되는 기호

앞서 design의 어원과 짜임뜻을 살펴 디자인은 기호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그럼 왜 사람들은 기호에 의미를 부여할까요? 이 질문을 쉽게 고치면 "왜 사람들은 말을 할까요?"와 같습니다. 그러면 대답이 쉽죠. 바로 소통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말을 하고 듣고, 글을 읽고 씁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알리고, 남의 생각을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와 '너'는 '우리'가 되죠.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이렇게 하는 이유는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험한 세상, 아무래도 혼자 살기 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것이 유리하니까요.

그런데 대화를 할때 혹은 글을 읽을때 소통이 잘 되는 경우가 있고, 잘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물론 외국어나 생소한 용어 등은 처음 접하는 말이기에 이해하기 어려워서 소통이 안됩니다. 그런데 전혀 생소하지 않은 용어조차 소통이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래 그림을 한번 보시죠.



왼쪽에는 "으르렁"이라고 써 있고 오른쪽에는 "돼지"라고 써있습니다. 여러분은 "으르렁"에서 무슨 그림이 연상되나요? "돼지"에서는 무슨 그림이 연상되나요? 아마 돼지의 경우 비슷한 그림들이 연상될 것입니다. 반면 으르렁은 사자가 나올지 호랑이가 나올지 헷갈리겠죠. 어떤 사람은 늑대나 개 혹은 엄마나 선생님을 연상할 수도 있습니다. 으르렁이 연상시키는 이미지 예측가능성은 돼지보다 떨어집니다. 아무래도 으르렁은 돼지보다 소통이 덜된다고 볼 수 있겠죠.

그런데 아래 그림처럼 이미지를 모두 보여주는 경우는 어떨까요? 그럼 "아하!" 하면서 "으르렁"의 의미가 확실하게 들어올 것입니다. 돼지야 대부분 돼지 모습을 예측했기에 굳이 "아하!"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렇듯 소통을 높이려면 글만이 아니라 이미지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글만 가득한 책을 싫어하는 이유입니다. 무의식중에 무언가 그림이 있어야 내용이 더 잘 이해될 것 같은 느낌이 있거든요.



실제로 아이들이 말을 배우는 낱말카드에는 그림과 글이 항상 함께 다닙니다. 처음 책을 읽는 아이들은 그림이 대부분인 동화책을 읽고, 차차 나이가 들면 만화책으로 넘어가죠. 그러다가 개념을 이해하는 10세가 넘어가면 글로만 된 책을 읽습니다. 때론 완전히 개념적인 기하학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은 말을 배워가면서 천천히 그림에서 문자의 세계로 넘어가죠.




2) 기표(겉보기)+기의(속들이) = 겉보기 기호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에서 문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자세히 다뤄보죠. 시각은 감각이고, 언어는 의미에 해당됩니다. 문자는 시각적 감각에 의미를 담을 수 있는 매체인 셈이죠. 과거 인간은 시각적 감각을 그대로 표현한 그림에 의미를 담았다면 현대인은 말소리를 그대로 담을 수 있는 새로운 문자 매체를 갖고 있습니다. 전자를 표의문자라고 말하고, 후자를 표음문자라고 말합니다. 표의문자란 말 그대로 의미(意)을 표현한 문자이고 표음문자란 음(音)을 표현한 문자입니다.
문자가 만들어지는 이 과정을 다루려면 먼저 기호을 이해해야 합니다. '기호학'이라고 말하면 왠지 엄청 어렵게 느껴집니다. 소통을 연구하는 학문인데 용어들만 들어도 거리감이 느껴지고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용어가 어렵다보니 디자인 공부할때 선생님들도 '기호학'을 잘 언급하지 않습니다. 얘기를 하더라도 몇몇 학자의 이름과 잘 알려진 몇개의 개념만 나열될 뿐 정작 속뜻을 제대로 다루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당연히 기호학 이론을 디자인에 잘 적용시키지도 못하죠. 하지만 문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하는 장벽이기에 지나칠 수 없습니다. 최대한 어렵지 않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기호학에서 기호는 sign이나 symbol의 번역어입니다. 이 중 symbol은 기호보다는 상징에 가까운 의미입니다. 물론 번역어로서 상징과 기호는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만, 상징은 시각적 이미지적에 한정된 느낌이 있고, 기호는 시각적 이미지만이 아니라 청각적 이미지인 문자와 말 등 공감각적 이미지 전반을 가르킵니다. 그래서 저는 기호은 표시를 의미하는 'sign'에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기호(sign)을 만들려면 겉으로 보여지는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ed)가 있습니다. 유식한 사람들은 기호학의 원조인 프랑스발음으로 '시니피앙' '시니피에'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시니피앙'의 한자번역어는 '기표記標'이고 '시니피에'의 한자번역어는 '기의記意'입니다. 한자나 영어의 짜임뜻을 보면 기호적 의미가 부여된 명사적 상태가 '기표'이고, 기호적 의미가 부여되는 동사적 과정이 '기의'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기호는 겉으로 드러나 보여진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기표와 유사합니다. 그런데 기표는 의미가 없는 추상적인 심벌상태이라면 기호는 의미가 부여된 기표입니다.

언어철학자 레이코스와 존슨의 <몸의 철학>은 신경언어학을 다룹니다. 이들은 사람은 신체적 특성이 반영된 몇가지 범주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 범주는 크게 세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먼저 위아래입니다. 데카르트가 삼각형에서 정신은 위에 있고, 신체는 아래에 있다고 생각한 이유는 머리가 위에 있고, 팔다리가 아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발보행을 시작한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이죠. 두번째는 앞뒤입니다. 우리의 눈을 앞을 보고 있습니다. 좌우 180도까지 상황파악이 가능하죠. 소나 말의 경우는 눈이 옆에 달려있어 360도 대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과 소는 모두 코와 입이 앞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체적 특성상 앞뒤 관념을 갖게 됩니다. 눈이 앞에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다른 동물보다 더 앞뒤 관념이 강하겠죠. 마지막으로는 안과 밖입니다. 생명체는 외부와 구분되는 몸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몸 내부와 외부의 상황을 고려합니다. 제가 수업을 시작하면서 사람은 내부의 상태는 장신경계가 외부의 상태는 말초신경계가 정보수집을 당담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신경들은 중추로 모여 함께 고려됩니다. 물론 중추 신경계는 종합된 상황을 잘 판단해 각각의 신경계에 정보를 전달하겠죠.

이렇듯 사람은 안과 밖을 중요시 여깁니다. 그래서 대상을 보고 판단할때도 이 범주를 적용합니다. 안과 밖을 조금 작은 범주로 나누면 속과 겉입니다. 이때 겉은 말초신경으로 감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속은 내 몸이 아닌 이상 감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짐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속에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되면 그것을 자극하면 속이 겉으로 드러나 보여집니다. 가령 사람들은 우리안에 '슬픔'이라는 속성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그 슬픔은 평소에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속에 들어있는 슬픔을 보려면 반드시 외부의 자극이 필요합니다. 안타까운 상황이나 영화, 드라마 등을 볼때 비로소 슬픔이 겉으로 드러나죠. 이때 겉으로 드러나 감각된 것이 기표인데 이 기표가 슬픔으로 여겨지면 그것은 기호가 된다. 눈물은 슬픔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기호죠.

하나 더 짚고 넘어가면 가끔 '기호(sign)'와 '상징(symbol)'이 헷갈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두 용어는 기표에 의미가 부여된다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상징은 사실적 그림이나 아이콘, 추상적인 도형처럼 시각적 매체에 의미를 부여한 것입니다. 반면 기호는 청각과 미각, 촉각 등 다양한 감각적 매체를 포괄합니다. 쉽게말해 상징은 '시각기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봉영 샘은 이런 기표와 기의의 특성을 반영해 기표와 기의를 한국말로 번역합니다. 기표는 겉으로 드러난 것을 보는 것이기에 '겉보기'이고, 기의는 속에 들어있는 것이기에 '속들이'가 됩니다. 서양사람들에게 '보기'는 시각적 의미가 강합니다. 반면 한국사람에서 '보기'의 경우 단순히 시각적인 이미지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들어본다' '맛본다' '생각해 본다' 등 다른 감각과 생각을 포괄합니다. 그래서 '겉보기'는 단순한 시각적 자극만이 아니라 모든 감각자극과 생각자극을 포괄하는 말입니다. '속들이'는 대상이나 사건안에 속속들이 들어있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이 '속들이=기의'는 속에 들어있는한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앞서 슬픔의 예시에서 보았듯 이 속들이=기의는 반드시 외부의 자극이 필요합니다. 자극에 의해 겉보기=기표로 드러나야만 할 수 있는 특성입니다.

이 속들이가 겉보기로 드러난 시각적 상태는 크게 4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공감각적인 경험적 이미지, 즉 사진이나 영상, 가상현실 등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앞서 이런 이미지들은 겉보기=기표와 속들이=기의가 1:1로 매칭되기에 자의적 해석이 어려운 상태라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이미지를 기호학에선 '시그널=신호' '인덱스'라 말합니다. 사실적 사진에서 정보요소들이 생략되어 보편화된 이미지는 아이콘화 된 그림입니다. '아이콘'은 대표적인 겉보기=기표입니다. 아이콘이 되면 자의적 해석이 높아집니다. 여기서 더 자의적 해석이 높아지려면 기존의 의미를 고려하지 않고 과감하게 정보요소들을 생략한 점선면과 같은 '추상적인 심벌'이 되어야 합니다. 시각경로의 끝에 해당되는 이미지죠. 추상적인 심벌 겉보기들은 자의적 해석이 완전히 자유롭습니다. 이 자유로움을 활용해 세종은 문자를 만들었습니다.

겉보기=기표와 속들이=기의에 대응하는 용어들이 많이 있습니다. 감각과 지각, 양태와 속성, 형식과 내용 등 모호한 한자어 용어들도 대부분 겉과 속의 문제로 여기셔도 무방합니다. 한국말로는 꼴과 일, 느낌과 의미 등이 겉과 속을 나누는 말입니다. 이 겉보기=기표와 속들이=기의가 조합되어 기호가 만들어집니다. 이때 소통과 불통의 여부가 결정됩니다. 앞서 '돼지'의 경우는 겉보기와 속들이가 별로 구분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돼지'라는 말은 '돼지'라는 글자만 써있어도 겉보기와 속들이가 전혀 충돌하지 않기에 소통이 어렵지 않습니다. 반면 '으르렁'의 경우는 속들이를 표현한 겉보기 청각이미지입니다. 이 청각이미지는 '호랑이 사자 늑대 엄마' 등과 같은 다양한 시각이미지를 연상시킵니다. 속들이와 겉보기가 바로 연결되지 않기에 아무래도 즉각적인 소통이 어렵겠죠. 소통의 정확도를 높히려면 앞서 보여주었듯 그림과 문자가 병기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3) 표의문자에서 표음문자로(그림에서 글로)

'으르렁'은 '돼지'에 비해 소통이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으르렁이 나쁜 말이란 뜻은 아닙니다. 소통이 어렵다는 말은 그만큼 말하는 사람의 자의성이 높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앞서 자의성이 높다는 것은 추상화된 심벌이나 보편화된 아이콘의 특징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의적 해석의 여지가 많은 으르렁은 언어=말이기에 보편성이 높은 단어라 할 수 있습니다.
으르렁은 청각이미지입니다. 우리가 '으르렁'을 공간적으로 기록하고 읽을 수 있는 것은 소리를 기록할 수 있는 표음문자가 발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림으로는 으르렁이란 느낌을 정확히 표현하기 어렵죠. 그래서 시각이미지인 그림기반의 표의문자에서는 정확하게 으르렁을 의미하는 문자가 없습니다.

사실 표음문자도 표의문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문자는 그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인류 최초의 문자로 여겨지는 수메르 문자와 이집트 문자는 모두 그림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현재의 이모티콘이나 픽토그램처럼요. 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초기 상형문자는 말뜻 그대로 대상의 상태와 모양을 그린 문자입니다. 일종의 아이콘이었죠. 이렇듯 최초의 문자는 모두 표의문자였습니다.
표음문자는 주로 상업을 하던 페니키아인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본래 이집트와 수메르 문자에서도 상황에 따라 음을 표현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가령 사람이름의 경우 그 사람을 자세히 그릴 수 없어 기록이 곤란했습니다. 주로 기록은 파라오나 황제의 치적을 남기기 위해 하는 행위인데 파라오와 황제의 이름을 적을 수 없으면 아주 곤란하죠.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은 그림이 지칭하는 대상의 첫음절을 가져와 소리로 사용하곤 하였습니다. 소리로 사용된 그림은 둥근원으로 묶어 "이것은 모양이 아닌 소리로 읽으세요"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이집트와 수메르의 표의문자도 한자처럼 익히려면 수백, 수천자를 외워야 했습니다. 속도가 중요한 상인들에게 버거운 일이었죠. 하지만 무역을 하는 입장에서 기록을 포기할 수는 없었죠. 페니키아 상인들은 둥근원으로 표기되는 방식을 전면으로 확대합니다. 문자전체를 표음문자로 전환합니다. 이 과정에서 수백 글자 중 소리 표현이 가능한 문자 약 30여자 정도로 줄였습니다. 덕분에 배우기가 아주 수월해졌죠. 페니키아 상인들은 지중해를 기반으로 활동했기에 많은 나라에서 이 방식을 차용합니다. 그리스와 로마인들은 페니키아 문자를 20여자로 더 줄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현재의 알파벳이 만들어졌습니다.

위 그림을 보면 그림문자가 어떻게 바뀌는지 그 과정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림이 문자로 바뀌면서 모양이 점점 추상화됩니다. 그림이 지시하는 의미가 중요하지 않으니 당연한 결과죠. 앞서 얼굴 아이콘에서 원으로 바뀔때처럼요. 본래의 의미가 완전히 상실되어야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럴때 추상화가 반드시 요구되죠. 얼굴 아이콘이 원으로 추상화된 덕분에 원은 한글 '이응'으로 여겨질 수 있었죠. 위 그림에서도 그런 변화가 보입니다. 아이콘 모양이 면과 선으로 추상화되어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A의 경우 본래 소를 표현한 아이콘이었습니다. 추상화되면 현재의 A모양이 되었죠. 지금 A에서 소를 연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그럴 필요도 없고요. 다른 문자들도 보면 B는 집모양이었고, D는 물고기, O는 눈모양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표음문자의 발명은 초기 표의문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죠.

표음문자의 편리성은 급격히 확산되었습니다. 인도로, 몽골로, 한반도로, 일본까지 전해집니다. 그렇게 인류는 소리를 표기하는 표음문자 체계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토대로 세종이 한글을 발명할 수 있었던 것이죠. 말은 곧 생각입니다. 즉 말=생각이 사람의 속들이(기의)하고 볼 수 있죠. 이 속들이를 시각적인 겉보기(기표)로 표현하려면 추상화된 심벌이 적합합니다. 아무래도 아이콘이나 사진은 기존의 선입견이 강해 표현의 한계가 있으니까요. 세종은 한국사람의 속들이인 말소리를 분석해 홀소리와 닿소리로 분류하고 이를 시각적으로 추상화된 점과 선, 면이라는 추상적 겉보기 기호에 연결시켰습니다. 청각이미지를 시각이미지와 연결해 한국말 속들이를 표현할 수 있는 겉보기 문자매체 '한글'을 만든 것이죠.

이런 점에서 한글은 우리문화의 유산을 넘어 인류문화의 자산입니다. 인류문명의 자산은 누가 만들었냐를 따져 소유물로 삼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퀴나 문자처럼 보편화 될 가능성이 높은 기술은 저절로 확장되어 문화가 되고 문명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바퀴는 갖고 누가 만들었냐를 따지지 않듯이 언젠가 알파벳이 한계에 부딪처 한글이 인류의 보편문자로 될 가능성을 아예 없지 않습니다.




4) 표의문자와 표음문자의 장단점

표의문자는 그림삼각형에서 보편화된 그림언어의 극단입니다. 한자 '하늘 천'자는 사람이 정면을 바라보며 두 팔과 두 다리를 벌리고 당당하게 서 있는 '큰 대'자의 머리쪽에 선이 하나 그려진 모습입니다. 이 선은 모자를 의미하기도 하고 하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형태와 인식의 인과관계를 섬세하게 따져 유사하게 다듬어온 그림이죠. 문자이기에 아무래도 쓰기(그리기) 편하게 추상적 선으로 간략화 되어 있습니다.

반면 말은 어떤 원형적인 소리를 근거로 만들어집니다. 형태와 인식의 관계를 넘어 상황적인 맥락이 포함되죠. 그래서 소리로 구성된 말은 시각적인 그림보다 더 복잡합니다. 복잡한 만큼 보편성도 아주 높죠. 표음문자는 추상의 세게로 진입해 소리를 표현할 수 있도록 발명된 인간의 기술입니다. 이를 통해 눈으로 보이는 형태만이 아니라 보편적인 말소리도 기록할 수 있었죠. 표음문자 또한 쓰기 편하게 추상적인 선과 면으로 간략화 되어 있습니다. 언듯 보기엔 간략화 정도가 한자와 비슷하지만 '하늘'과 'sky'의 자소는 그림이 아닙니다. 의미가 전혀 없는 추상적 심벌로 조합되어 있기에 한자에 비해 훨씬 추상적인 형태입니다.

표음문자가 발명되고 문자와 그림을 더불어 사용하면서 의미의 정확도를 훨씬 높힐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표음문자로 표기된 말을 읽으려면 해당 언어를 반드시 알아야 했죠. 반면 그림으로 된 표의문자는 언어를 몰라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1만년전 라스코 동굴에 머리는 새이고 몸은 사람인 그림이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문자라면 우리는 이 문자의 정확한 의미는 모르더라도 대강 무엇을 말하려는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점에서 표의문자와 표음문자의 장단점을 따져볼수 있을 것입니다.




표의문자는 나름대로 유용성이 있습니다. 모양을 기반으로 하기에 금방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한국사람이 인도에 여행을 가서 화장실에 가려합니다. 만약 '화장실'이 '힌두어'로 표기되어 있다는 우리는 절대 화장실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찾았다해도 '여자'와 '남자'의 표기를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알파벳이나 한글로 표기되어 있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힌두어를 모르는 이상 읽어봐야 소용없으니까요.

그런데 다행이도 현대인은 이 문제로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화장실을 의미하는 아이콘이 있습니다. 현대인은 대부분 화장실, 비상구를 의미하는 아이콘을 공유합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 어느 문명에서든 화장실을 쉽게 인식할 수 있죠. 이것이 바로 표의문자의 가치입니다. 중국문명은 기원전 3세기부터 제국을 운영했습니다. 동시에 여러나라를 다스려야 했기 때문에 표음문자보다는 표의문자가 편리했을 것입니다. 안그러면 다스리는 국가의 언어를 강제로 가르쳐야 했겠죠. 만약 그랬다면 엄청난 저항에 부딪쳤을 것입니다. 한국이 식민지시절 한국말 말살정책에 크게 저항했듯이요. 통치국가 입장에선 곤란한 상황이죠. 게다가 중국문명은 통치민족이나 국가가 계속 변화합니다.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등 거대 제국을 다스린 국가들은 모두 다른 나라들입니다. 만약 하나의 언어를 고집했다면 중국문명의 사람들은 200~300년마다 새로운 언어를 익혀야 했을 것입니다. 표의문자 덕분에 이런 곤란한 상황을 피할 수가 있었죠.

표의문자는 나름대로 효율적입니다만 단점도 많습니다. 무엇보다 표의문자는 익히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제 경우 매일 하루 1시간씩 꼬박 3년을 넘겨야 3000자 정도를 외울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은 한자를 거의 사용하지 않기에 금방 잊어먹더군요. 외우고 1년여가 지나지 500자도 정도밖에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렇듯 한자는 익히기도 유지하기도 어려운 문자입니다. 그래서 권력자들이 정보를 독점할 수 있었고 민중들을 누르기에 아주 편리했죠. 이래저래 제국을 통치하는 세력으로서는 유용한 문자입니다.

또 하나의 단점은 '보편성'입니다. 인류역사에서 유일하게 남은 표의문자는 한자입니다. 그런에 수만자의 이르는 한자는 대부분 시각적 감각인 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일어나는 상황이나 맥락을 표현하려면 문자들을 조합해야만 합니다. 아무리 잘 조합해도 보편성에 한계가 있습니다. 이는 일종의 추상성의 한계라 말할 수 있습니다. 추상성이 떨어지니 당연히 문자 해석에 있어서도 자의적인 해석이 제약됩니다. 가령 '으르렁'의 경우 한글이나 알파벳으로 표기하기에는 쉽습니다. 표음문자는 말소리를 그대로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표의문자의 경우 으르렁을 시각적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거의 불가능하죠. 저는 언론사에서 인포그래픽을 만들고 있습니다. 종종 어떤 상황을 단순한 그래픽 아이콘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곤란한 상황이 많습니다. 재판의 경우 '의사봉'을 그리고, 산업의 경우 '톱니바퀴'로 대체해 표현합니다. '경제' '사회' '정치' '국가' 같은 단어는 표현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어떤 하나의 특징을 담아낼 수 없거든요. 사실 재판=의사봉, 산업=톱니바퀴도 이상한 연결조합이기는 합니다.

표의문자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말의 제약입니다. 표음문자는 말소리를 그대로 표현하기에 말이 제약되지 않습니다. 반면 표의문자는 말의 의미를 그림으로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분명한 꼴이나 대체되는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으면 문자로 기록하기 어렵습니다. 자연스레 그런 말들은 기록되지 않게 되죠. 그러면서 말의 입지가 좁아집니다. 말의 입지가 좁아진다는 것은 생각의 틀이 작아진다는 의미입니다. 참나무, 나무, 식물, 생명, 우주, 신 등 말의 보편성이 늘어날수록 생각의 폭도 늘어납니다. 표음문자는 이것들을 모두 자유롭게 말하고 기록할 수 있습니다. 반면 표의문자는 특정한 꼴을 지칭할 수 없는 생명이나 우주, 신의 경우에는 기록이 곤란해지죠. 당연히 생각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요.

물론 표음문자도 장단점이 있습니다. 장점은 앞서 충분히 언급했습니다. 단점은 표의문자처럼 즉각적으로 인식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표의문자는 그림삼각형 언어경로의 끝이라 즉각적인 의미 인식이 가능합니다. 반면 표음문자는 말을 모르면 즉각적 인식이 불가능하죠. 샤를 미나르의 유명한 인포그래픽이 있습니다. 이 인포그래픽은 나폴레옹 군대가 알프스를 넘어 러시아로 진격하는 그림입니다. 글이 없어도 그림만으로 즉각적으로 상황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겐 그 위에 써있는 프랑스어 설명이 더 어렵죠. 그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려면 적어도 몇개월동안 프랑스어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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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경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디자인 저술가, 이론가, 교육자다. 저서로는 『런던에서 온 윌리엄 모리스』(지콜론북, 2014), 『역사는 디자인된다』(민음사, 2017), 『아빠 디자인이 뭐예요』(이숲, 2020)가 있으며 『디자인평론』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국민대학교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하고 그린디자인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경향신문 정보 그래픽 디자이너, 국민대학교 디자인 대학원 겸임 교수로 재직한다. 2017년부터 디자인대안학교 디학(designerschool.net)을 운영하며, 한국말 공부 모임 ‘묻따풀 학당’에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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