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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언어 2강-2

윤여경| 2021.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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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추상화 될수록 자의적 해석이 자유로워지는 시각경로




1) 이미지의 공감각(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감각과 지각, 생각을 근거로 스콧 맥클라우드가 구성한 '그림삼각형' '문자삼각형' 도식 덕분에 사실적(구상적) 이미지와 추상적 이미지 그리고 개별적 이미지와 보편적 이미지 흐름에 대해 어느정도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나아가 보편적 이미지가 더욱 추상화 되면 소리를 이미지화 할 수 있는 문자로 나아갑니다. 이 문자를 갖고 개념을 담고 있는 단어와 문장을 표현할 수 있죠. 이제부터는 이를 좀 더 면밀히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두개의 추상적인 이미지를 보이시죠. 둘의 차이가 느껴지시나요? 세모와 원이라는 선입견에서 알 수 있듯 시각적인 차이가 분명합니다. 그럼 기존 선입견을 제거하기 위해 다른 이름을 붙혀보죠. 둘 중 하나의 이름이 "샥"입니다. 누구의 이름일까요? 아마 세모란 의견이 많을 것입니다. 가끔은 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 다른 이름을 붙혀보죠. "응"은 누구의 이름일까요? 이 또한 원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입니다. 아주 가끔 세모를 말하는 사람도 있죠. 그럼 "샥"과 "응"이 있습니다. 누구의 이름일까요?라고 물으면 거의 모두가 "샥"은 세모, "응"은 원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첫 질문에서 사람들은 샥과 세모, 응과 원의 연결성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질문이 거듭되면서 이 연결성이 더욱 강화됩니다. 결국 저항하던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대세를 따르게 되죠. 이렇듯 시각적 차이가 있는 세모와 원은 청각적 차이도 갖고 있습니다. 이를 청각이미지라고 말합니다. "샥"이라는 소리는 세모처럼 날씬한 청각이미지를 갖고 있죠. 마찬가지로 "응"이라는 소리는 원처럼 둥글둥글한 청각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미지는 단순히 시각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소리와 맛 심지어 촉각에서도 이미지가 느껴집니다. 미각이미지의 경우 세모는 다소 매운맛이 느껴지고 상대적으로 원은 달콤한 맛이 느껴집니다. 촉각은 더욱 분명하죠. 세모는 날카롭고 뾰족한 이미지가 연상되고, 원은 부드럽고 폭신한 이미지가 연상됩니다.
사실 시각, 청각, 미각, 촉각 등은 말에 있는 임의적 구분일 뿐입니다. 눈과 귀, 입과 손(피부)를 중심으로 감각법주가 생긴것이죠. 하지만 이 말초적 감각들이 뇌의 중추신경에 이르면 모두 지각적 판단으로 종합됩니다. 이 과정에서 감각들의 분명한 경계가 상실되죠. 그래서 어떤 이미지이든 공감각적 느낌을 갖기 마련입니다.
시각적 이미지를 다루는 디자이너라면 이런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내가 사용하는 이미지가 단지 시각적 자극만이 아니라 청각과 미각, 촉각을 자극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해야죠. 그러면 시각적 이미지에 대한 이해가 풍부해지죠. 이는 사운드 디자이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다루는 소리가 어떤 청각이미지를 연상시키고 그 이미지는 다른 감각들과 연동되어 있죠. 물론 요리사나 맛사지사도 마찬가지죠.



2) 예술가와 디자이너는 왜 추상화를 추구했을까

앞서 살펴보았듯 얼굴사진에 비해 세모와 원, 네모 등은 추상적 이미지입니다. 사실적인 사진이 시각경로로 감각적 유사성에 의해 추상화되면서 많은 정보들이 생략되었고 결국 알듯말듯한 세모와 원 같은 추상적 이미지만 남았죠. 정보들이 상실되면서 기존 얼굴이 갖고 있던 다양한 감각이미지들이 동시에 사라졌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세모와 원에는 공감각적인 지각적 차이가 존재합니다. 여기서 더 추상화가 되면 '선'이 됩니다. 정보가 더 상실되기에 감각이미지들도 사라지겠죠. 더 추상화되면 '점'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아무런 감각이미지가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점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공허한 느낌만 더해집니다.

그림에는 구와 점이 함께 있고, 선, 면, 입체가 그려져 있습니다. 구는 세잔의 사과를 연상하시면 됩니다. 구만 봐도 어떤 무게감이 느껴져 다양한 감각이미지를 연상시킵니다. 이 구가 입체가 되면 무게감이 확 사라지면서 마치 기하학과 같은 독특한 느낌을 줍니다. 마티스와 피카소는 색과 형태를 이런 느낌으로 해체했습니다. 그리고 몬드리안 같은 네덜란드 데스틸과 말레비치 같은 러시아 구성주의 예술가들은 면까지 이릅니다.
바우하우스 교사였던 칸딘스키가 쓴 바우하우스 총서의 제목이 <점, 선, 면>입니다. 칸딘스키는 구성주의와 데스틸이 추구했던 면을 가장 추상적인 영역이 선과 점까지 이른 것이죠. 그럼 왜 칸딘스키는 대상을 점과 선까지 해체했을까요?

design의 짜임을 살피면 de와 sign이 합성된 말입니다. de는 아래로, 반대로 등의 뜻이 있고, sign은 표시, 기호, 부호 등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design은 "기존 기호의 의미를 해체하고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는 의미입니다. 디자인역사에서는 design의 어원으로 disegno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이탈리아 말로 '머리로 하는 작업'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dessin이라는 말과 함께 쓰였는데 데생은 '손으로 하는 작업'으로 소묘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disegno는 데생을 하기 전에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하는 계획이라 할 수 있죠. 사실 계획은 '생각'이라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design인은 기존의 기호를 분해 혹은 해체해 새로운 형태 혹은 의미를 만드는 생각 과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실적 이미지는 기존의 감각과 지각, 생각이 너무 강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de+sign을 하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가령 '윤여경'의 얼굴 사진이 있다고 상상해 보죠. 그럼 이 얼굴사진을 놓고 피자나 컵이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윤여경에 토핑이 많을수록 맛있다"라는 말은 아무래도 이상하죠. 그런데 이 구상적 얼굴을 세모나 동그라미로 추상화시켜면 어떨까요? 윤여경, 얼굴 등의 의미가 상실되었기에 세모나 동그라미를 '피자'나 '컵'이라 말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 세모에 토핑이 많을수록 맛있다"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그 세모가 "피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수업을 시작하면서 저는 문장의 구성을 이야기하며 subject와 object 그리고 verb를 언급했습니다. 이 말들은 주어나 목적어, 동사가 아니라 곧이말, 맞이말, 지님말로 번역해야 한다고 말했죠. sign(기호)의 의미를 해체한다는 것은 대상의 의미를 제거하는 일입니다. 의미를 제거하려면 반드시 추상화 과정이 필요합니다. 곧이말은 "이것은 곧 무엇이다"라며 말하는 사람이 정하는 주제입니다. 곧이말(subject)을 "윤여경의 얼굴"이라 정한다면 따라오는 맞이말(object)과 지님말(verb)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맞이말에 토핑, 지님말에 맛있다를 쓰기가 어색하죠. 반면 주제를 "세모"로 정하면 맞이말과 지님말을 정하는데 있어 자유로워집니다. 어떤 말을 갖다 붙혀도 세모와 유사한 것들을 연상시키게 되니까요. 그런데 세모조차 어떤 감각적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조차 부담스러우면 선과 점까지 가야죠.

이렇듯 구상적 이미지는 주제에 따라 강한 논리가 있기에 마음껏 de+sign할 수 없습니다. 반면 추상적 이미지로 갈수록 주제에 따른 논리가 없기에 마음껏 de+sign을 할 수 있죠. 그래서 칸딘스키와 같은 혁명적 예술가들은 기존 이미지들이 갖고 있는 감각적 선입견을 제거하기 위해 극단의 추상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추상들에 마음껏 의미를 부여하면서 실험들을 할 수 있었죠.




3) 자의적 해석이 자유로운 추상

한때 잠깐 인도의 차크라 분류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사람을 7가지 특성으로 분류해 범주구분을 합니다. 보시다시피 그 이름들이 생소합니다. 저는 여기에 점선면입체 등의 추상적 이미지를 배치해 보았습니다. "점은 스와디스타나" "입체는 비슛다" 이렇게요. 어떠신가요? 어색한가요? 별로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 점은 감각적 선입견이 없는 극단의 추상적 이미지이기에 무엇을 갖다 붙혀도 상관없으니까요. 실제로 인터넷으로 '차크라'를 검색하면 저처럼 추상적 이미지들을 배치한 그림이 여럿 나옵니다. 여러분들이 그 이미지에 저항감이 없는 이유는 그 이미지들이 대부분 추상적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알고 있는 이미지, 가령 사과나 자동차가 스와디스타나나 비슛다에 매칭되어 그려져 있다면 이상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런데 점이나 정사면체 등이 그려져 있으면 크게 상관 하지 않고 "그런가 보다" 하죠.
디자이너에게 추상이란 아주 편리한 이미지입니다. 대상을 추상화시키면 디자이너의 자율성이 높아지거든요. 추상의 의미는 형태를 추출한다는 의미인데, 추상이 진행될수록 정보가 유실되기에 기존 형태 및 의미와 멀어집니다. 그만큼 디자이너의 자율성이 높아지죠. 그래서 칸딘스키와 같은 디자이너들은 마티스나 피카소와 달리 마음껏 새로운 실험을 거듭할 수 있었습니다. 마티스와 피카소의 자신만의 예술적 개성을 뽐낼 수 있었지만, 바우하우스 예술가들은 기존 생활양식과 다른 새로운 생활양식을 낳았죠. 모두 추상화 정도의 차이죠. 바우하우스 예술가들은 점, 선 등 추상을 극단적으로 밀고 갔기에 개성을 초월한 시대적 보편성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추상은 '모름'입니다. 쉽게 말해 아무거나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추상의 유용한 기능입니다. 그래서 추상화시키면 개별적 개성이 사라지고 저절로 보편성이 높아집니다. 그런데 추상과 보편성은 의도가 조금 다릅니다. 앞선 스콧 맥클라우드의 시각경로에서 보았듯 구상에서 추상으로 갈수록 의미가 상실되지만, 언어경로에서 개별에서 보편으로 갈수록 의미를 중첩됩니다. 분명 추상이든 보편이든 세모나 원, 네모, 선, 점 같은 이미지인데 추상은 의미가 없고, 보편은 의미가 많으니 상당히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인류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극복해 냅니다. 다음 챕터에서 설명하겠습니다.




(3) 언어 경로 ; 그림에서 문자로 - 아이콘에서 문자로 넘어가며 보편성이 확대된다.


1) 사실적 경험

시각경로의 구상에서 추상화의 과정을 살펴보았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언어경로의 개별성과 보편성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언어경로는 기본적으로 '언어'이기에 말하는 화자가 곧이말(subject)를 정하면 맞이말과 지님말의 논리적 관계가 어느정도 제약을 받게 됩니다. 이 제약은 보편화의 정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앞선 챕터에서 추상화된 이미지와 보편화된 이미지가 유사하기에 아이러니한 상황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추상화든 보편화든 이미지가 단순해지면 문장의 논리는 자유로워집니다. 하지만 언어경로의 자유로움은 시각경로에 비하면 엄청나게 낮습니다. 같은 추상적 심벌일지라도요. 시각경로는 단순화(추상화) 될때 형태적 유사성 외에는 의미가 없지만 언어경로는 단순화(보편화) 되더라도 늘 의미를 내포하려는 성질 때문이죠. 하지만 이미지를 다루는 디자이너나 독자들은 이 두 경로의 차이를 인지하기 어렵습니다. 안어경로에서는 아이러니한 인지부조화 살황은 다른 방식으로 극복됩니다.
언어경로는 시각경로와 달리 점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지각삼각형을 떠올려보죠. 그림삼각형은 사실성이 높아질수록 좌측 꼭지점이 좌측으로 넓어집니다. 요즘은 가상현실이 언급되는 세상이니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그림삼각형은 100년전과 비교도 안될 정도로 클 것입니다. 문자삼각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측꼭지점도 우측으로 계속 넓어집니다. 언어학이 등장하고 약 백년이 지났으니 언어에 대한 인식도 크게 성장했을 것입니다. 이렇듯 언어경로는 시각경로에 비해 이야기가 풍성합니다. 그래서 아주 많은 이야기가 기다립니다.




제 얼굴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저에 대한 많은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생김만이 아니라 어떤 성격도 느껴지죠. 저를 경험한 사람들은 사진을 본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를 경험적 언어라 말해보죠. 이 경험적 언어는 많은 가질수록 자유로움이 떨어집니다. 경험이 높아질수록 신경패턴이 복잡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컵"이라는 단어를 말할때 이 단어는 단순히 "컵모양"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컵을 들고, 마시고, 따르고, 쏟고, 떨어뜨리고, 던지고, 깨지고 등등 컵과 관련된 수많은 정보가 거대한 공감각적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 이미지들은 모두 신경패턴으로 연결되어 있죠. 컵에 대한 보편적 정보만이 아니라 좋아하는 컵의 브랜드라든지, 컵과 관련된 일화라든지 등 개인적인 추억도 정보로 연결되어 있죠. 그래서 컵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면 사람들마다 각기 다른 이미지를 연상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물론 공통분모도 있을 것이고요.
경험적 언어는 이토록 복잡합니다. 그래서 사진같은 정교한 이미지는 정보구성의 자율성이 크게 제약됩니다. 마치 화살표나 신호등 처럼 언어가 지시하는 것이 분명하죠. 그래서 저는 사진과 영상 등 구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는 구상적인 이미지를 화살표나 신호등을 의미하는 시그널이나 인덱스와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시그널은 보여지는 모습과 의미하는 것이 거의 1:1로 매칭됩니다. 물론 얼굴사진의 경우 의미와 1:1로 매칭하지는 않지만 정보구성의 자율성이 크게 떨어진다는 점에서 다른 그림에 비해 비교적 시그널과 인덱스에 가까운 이미지입니다.




2) 아이콘

아이콘은 그림삼각형 언어경로에서 사실적 얼굴에서 단순화된 얼굴 그림입니다. 그림이 점점 단순화되어 최종적으로는 이 그림처럼 원과 점 두개, 선 한개로 표현됩니다. 이 얼굴은 시각경로처럼 사실적 얼굴에 비해 요소들이 생략되면서 감각적이미지가 많이 상실되었지만 '얼굴'이라는 의미 요소는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점이 시각경로와 다른 점이죠. 시각경로의 추상화는 의미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형태적 유사성만을 따져 단순화 되었습니다. 반면 언어경로는 말하는 사람이 '얼굴'을 곧이말(subject)로 삼고 단순화 시켰습니다. 그래서 눈과 입이라는 맞이말(object)는 유지되었고, 전체적인 인상 '웃고 있음'이라는 지님말(verb)도 유지했습니다. 즉 말하는 사람의 사실적 얼굴을 해석한 의미를 중심으로 그림이 단순화되었죠.
또 하나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시각경로의 추상화는 의미가 상실되었습니다. 반면 언어경로의 보편화는 의미가 중첩되어 있습니다. 물론 기존 사실적 얼굴의 요소들이 사라지면서 많은 의미정보가 상실되었습니다. 하지만 얼굴이라는 느낌이 유지되면서 한 사람의 얼굴이 아닌 모든 사람의 얼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추상화'가 아니라 '보편화'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언어에서 개별과 보편은 사과와 과일의 차이입니다. 사과는 과일류에 속합니다. 그래서 사과는 과일에 비해 개별성이 강합니다. 반면 과일은 사과에 비해 보편성이 강합니다. 과일과 식물의 경우 식물은 과일에 비해 보편성이 높죠. 이렇듯 보편화된다는 것은 더 큰 범주로 이동한 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보편적 아이콘과 추상화된 이미지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이미지 모두 자율성이 높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추상화된 세모나 원은 디자이너가 의미를 부여하기 편합니다. 보편화된 아이콘도 마찬가지로 디자이너가 의미를 부여하기 편합니다. 스콧 맥클라우드도 <만화의 이해>에서 이런 아이콘은 특징을 상당한 분량으로 설명하고 강조합니다. 만화가들은 아이콘화된 주인공을 통해 독자의 감정이입을 유도합니다. 만약 순정만화처럼 주인공이 여성적 이미지가 강하면 아무래도 남성들은 주인공 캐릭터에 감정이입이 어렵습니다. 이런 특징을 언어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말하는 화자가 사실적 얼굴이 아니라 아이콘을 곧임말로 삼으면 그 뒤에 따라오는 맞이말과 지님말을 구성하기 더욱 편합니다. 가령 "윤여경은 바보다"라고 말하면 듣는 윤여경이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되죠. 하지만 "사람은 바보다"라고 말하면 특정인을 지칭한것 보다 확실히 마음이 편하죠.




3) 추상적 심벌(O)과 문자(ㅇ)

언어를 분석한 기호학에서 추상화된 도형을 '심벌'이라고 말합니다. 이를 '상징'이라고 번역해서 이미지를 다루는 디자이너들이 많이 오해합니다. 심벌=상징은 그 자체로 기호입니다. 모든 것이 상징이 될 수 있죠. 사실적 얼굴도 아이콘도 추상적인 도형도 상징이 되죠. 그래서 상징을 추상적 도형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한 혼란을 줍니다. 그럼 왜 디자이너들은 심벌을 추상적인 도형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그것은 앞서 설명한대로 추상화된 도형이 사실적 이미지에 비해 의미를 부여하기 편하기 때문입니다. 상징화가 높다고 할까요. 그래서 편리상 혹은 무의식중에 추상적 도형을 심벌이라 부르게 된 것을 아닐까 합니다.

스콧 맥클라우스 도식에서 그림삼각형에서 언어경로의 끝은 아이콘입니다. 여기서 더 단순화되면 얼굴이라는 곧이말(subject)가 상실되기에 더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아마 피카소도 그랬을것입니다. 아무리 추상화 시켜도 '얼굴'이라는 의미는 고수해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구성주의자들을 과감하게 그 틀을 깨버렸습니다. 과감하게 얼굴이라는 의미를 버렸죠. 그리고 이 추상적 심벌에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고 시도했습니다. 덕분에 의미를 알수 없는 독특한 추상미술의 세계가 열렸죠. 더불어 과거의 의미적 요소들(장식들)이 사라지면서 더욱 보편화된 새로운 생활양식이 만들어졌고요.



그런데 바우하우스보다 500년 앞선 15세기초 더욱 과감한 실험과 시도가 진행되었습니다. 세종은 추상화된 아무 의미없는 형태에 소리를 담아 문자를 만들었습니다. 의미없는 형태를 소리에 연결짓다니! 앞서 시각경로에서 제가 시각이미지와 청각이미지 등 감각이미지들은 서로 공감각적인 효과를 일으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세종은 이를 간파했고 시각이미지와 청각이미지를 연결해 문자를 만들었습니다. 굉장한 아이디어죠! 그렇게 탄생한 문자체계가 바로 '한글'입니다. 한글의 자소를 보면 점과 선, 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장 극단적으로 단순화된 추상적 형태입니다. 더 독특한 점은 추상화 정도에 따라 문자체계가 구분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세종은 한국말 소리의 특징을 크게 두개로 분류했습니다. 바로 모음과 자음입니다. 모음은 한국말로 '홀소리'입니다. '홀'이라고 발음하면 입안에 닿는 부분이 하나도 없습니다. 반면 자음은 '닿소리'입니다. '닿'이라고 발음하면 바로 혀가 입천장에 닿습니다. 그래서 '홀소리' '닿소리'입니다. 세종은 분리된 소리체계에 추상화된 요소들을 분류해 적용합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한글의 모음자소들은 'ㅏ, ㅓ, ㅗ, ㅜ'이고, 자음자소들은 'ㄱ, ㄴ ㅁ, ㅅ, ㅇ'입니다. 보시다시피 점과 직선은 '홀소리 체계'를, 굽은 선과 면은 '닿소리 체계'를 표현합니다.

이것은 정말 엄청난 일입니다. 알파벳의 경우 언어학자들이 자소들에서 모음과 자음 구분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모음과 자음 체계가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게다가 자소들의 모양도 점과 선, 면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i, j'의 경우 점과 선으로 구성되고, 'a, o, q' 등은 선과 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오래전에 알파벳은 그림문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많이 추상화되었지만 여전히 그림의 특징이 남아 있습니다. 반면 한글은 소리체계와 형태가 완전히 새롭게 디자인된 문자입니다. 애초에 점선면과 같은 추상적인 심벌 적용했기에 그림의 특징이라곤 전혀 없죠. 칸딘스키가 추상화된 시각요소들로 음표와 같은 특수문자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어쩌면 그들이 꿈꾸던 보편양식는 언어적 문자체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세종대왕은 이들의 시도를 500년이나 앞서 성취한 것이죠. 그것도 단순한 음표가 아닌 알파벳보다 뛰어난 문자형식으로요. '한글'은 정말 인류 역사에서 보기 드문 엄청난 업적이자 디자인입니다.






4) 그림과 글의 해체와 조합

문자는 추상화된 심벌과 같은 형태입니다. 자소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한글은 자소마다 성리학적 의미를 갖고 있지만 그것은 체계상 자소들의 관계에 있어 형성된 의미이지 형태 그 자체로 어떤 의미를 가르키진 않습니다. 표음문자의 특징이 그렇습니다. 'A'가 그 자체로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ㄱ'도 그자체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자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추상화된 심벌과 같은 경우입니다. 그래서 문자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습니다.
단어는 문자가 조합된 형태입니다. 소리의 흐름에 맞게 문자들이 조합되죠. 알파벳의 경우 선형적으로 조합되고, 한글의 경우 '닿소리(자음)-홀소리(모음)-닿소리'가 하나의 음절로 조합됩니다. 아주 효율적인 조합이죠. 이 또한 세종의 업적입니다. 이렇게 조합되면 의미가 생성됩니다. 그림의 요소들이 많아질수록 의미가 더해지듯 문자의 요소들이 많아질수록 의미가 더해집니다.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고 문단이 될수록 의미는 더욱 분명해지고 풍성해지죠. 추상적인 심벌로 보편성이 극대화되었다면 문자가 되고 단어, 문장이 되면서 보편성이 서서히 후퇴해 개별성이 높아지는 것이죠.

그림에서 보시듯 우측에 점선면과 문자화된 요소들은 별로 연관성이 없습니다. 단순한 형태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위에는 그림이고 아래는 문자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죠. 이 그림과 문자가 조합되면서 보편화된 얼굴이 되고 '얼굴'이란 단어가 형성됩니다. 그렇지만 이 연결 또한 자의적이죠. 얼굴사진과 진지한 글꼴(명조체)로 쓰여진 단어가 매칭되면 둘의 연결성은 상당히 높아집니다. 얼굴사진과 이름은 가장 큰 특징은 곧이말과 맞이말, 지님말의 자의적 연결이 어렵다는 점입니다. 아무래도 사진과 단어 모두 구체적인 대상을 지칭하기에 관련된 대상과 일어나는 상황이 한정적입니다.

그러나 ‘얼굴 사진’과 ‘얼굴 단어’는 상당한 의미적 차이가 있습니다. 사진은 사진이 찍힐 당시 그 시공간의 윤여경 얼굴입니다. 반면 '얼굴'은 윤여경만이 아니라 사람 전체, 나아가 얼굴을 갖고 있는 모든 사물을 포함합니다. 즉 문자로 된 단어는 사진이나 아이콘에 비해 보편성이 엄청나게 높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림과 말의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에 스콧 맥클라우드 도식에 의문이 생깁니다. 도식에 의하면 가장 사실적인 이미지가 좌측 끝에 있고, 가장 보편적인 이미지가 우측 끝에 있습니다. 우측으로 더 이동해 추상화된 심벌형태가 문자가 되고 이 문자들이 조합되면 단어가 됩니다. 그런데 우측 끝의 단어는 다시 왼쪽의 사실적 이미지처럼 구상화 되는 느낌입니다. 'ㅇ'과 같은 문자는 아무 의미가 없지만 '얼굴'로 조합되면서 구체적인 의미를 연상시키니까요. 문자삼각형은 그림삼각형과 연결되어 있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입니다. 그림삼각형이 시각이미지의 세계라면 문자삼각형은 청각이미지의 세계입니다. 다른 매카니즘으로 움직이죠. 하지만 그 흐름은 똑같습니다. 그림삼각형처럼 개별에서 보편으로 의미가 중첩되면 확장됩니다.

발달심리학자 레프 비고츠키는 <생각과 말>에서 단어의 성장을 강조합니다. '단어'는 최초에 형성된 의미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의미가 변화되고 확장됩니다. 변화와 확장에 실패하면 결국 그 단어는 사라지죠. 반면 변화하고 확장되는 단어는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시공간적 맥락에 따라 계속 달라지니까요. 한 사람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아기 윤여경과 현재의 윤여경은 너무나 다른 의미입니다. '윤여경'이란 단어의 의미 확장성을 볼 때 보편성의 크기를 가늠하기 쉽지 않습니다. 제 이름은 결국 저 하기 나름이죠. 어쨌든 '윤여경 얼굴'은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개별 윤여경 사진보다 보편화 된 단어는 '얼굴'입니다. '얼굴'에서 '생명' '우주'로 갈수록 보편성이 높아집니다. 이 단어들은 그림으로 그리기 어렵습니다. 오로지 문자로 표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문자삼각형의 세계는 형태의 구상과 추상화 정도가 아니라 소리의 차이로 의미가 구분되기에 형태 차이를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문자는 청각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발명된 매체지만 큰 틀에서 볼 때 문자도 결국 시각이미지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디자인에서 문자를 이미지로서 다루는 영역이 따로 있습니다. 이를 '타이포그래피'라고 말합니다.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우리가 은근히 수많은 글자들에 둘러쌓여 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거리를 돌아다니면 더욱 그렇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림풍경과 글자풍경이 공존하죠. 그래서 타이포그래피은 그래픽디자인에서 거대한 독립분야로 인정받습니다. 그만큼 중요시 여긴다는 것이죠.

타이포그래피는 크게 두가지로 구분됩니다.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와 '매크로 타이포그래피'입니다.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는 자간과 행간 등 텍스트를 잘 읽히도록 정리하는 과정입니다. 매크로 타이포그래는 글자의 의미가 잘 전달될 수 있도록 글자를 디자인합니다. 간판이나 포스터의 메인 제목 등에 여기에 해당되죠. 매크로라는 말이 암시하듯 주로 큰 글자들을 다루죠.
이때 개별적인 단어는 곧바로 이미지가 연상되기에 글자를 이미지화시키기데 제약을 받습니다. 앞서 언급한 돼지를 디자인할때 돼지가 토끼처럼 보이면 곤란하겠죠. 반면 생명 같은 보편적인 단어는 특정 이미지가 연상되지 않기 때문에 별로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생명' 글자가 돼지처럼 보여도 되고, 토끼처럼 보여도 되죠. 거꾸로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으면 디자인이 더 편할수도 있고, 없으면 더 어려울수도 있습니다. 그건 디자인하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죠. 이처럼 디자이너는 글자를 청각이미지가 아닌 시각이미지로 여깁니다. 즉 타이포그래피은 청각이미지에 시각이미지를 부여하는 de+sign이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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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경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디자인 저술가, 이론가, 교육자다. 저서로는 『런던에서 온 윌리엄 모리스』(지콜론북, 2014), 『역사는 디자인된다』(민음사, 2017), 『아빠 디자인이 뭐예요』(이숲, 2020)가 있으며 『디자인평론』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국민대학교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하고 그린디자인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경향신문 정보 그래픽 디자이너, 국민대학교 디자인 대학원 겸임 교수로 재직한다. 2017년부터 디자인대안학교 디학(designerschool.net)을 운영하며, 한국말 공부 모임 ‘묻따풀 학당’에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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