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대학을 다닌 분들이라면 아마 ‘존 버거(John Berger)’라는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저 역시 1학년 때 거의 모든 수업의 참고도서 목록에 존 버거의 책이 있었습니다. 그중 몇몇 책은 한국어 번역본이 없기도 했고, 그나마 한국어로 번역된 책도 반도 읽지 못하고 덮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언젠가 읽어야 하는데’ 라는 마음의 짐만 안긴 채 책장에 고이 꽂혀있었는데요. 지난 2017년 1월 2일, 존 버거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다시 책을 꺼냈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 <본다는 것의 의미(about looking)> 등의 많은 책을 남긴 존 버거는 미술비평가 외에도 사회비평가, 사진이론가, 소설가, 다큐멘터리 작가까지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미술비평을 시작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 예술과 인문, 사회 전반에 걸쳐 통찰력 있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왔습니다.
1972년, 버거의 저서<다른 방식으로 보기> 출간에 앞서 같은 내용으로 제작된 BBC 강의시리즈는 방영 후 미술 비평계가 급변할 정도의 큰 파장을 몰고 왔다고 합니다. 작품의 양식이나 형식을 분석하던 전통적인 서양미술의 해석방법을 뒤집고, 정치, 사회적인 시각을 도입한 혁명적 관점으로 현재까지도 일부 보수적인 학계에서는 버거의 책을 금기시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19세기 말 유럽 부르주아 문화의 이면을 드러낸 장편 소설 <지(G)>로 비평가가 아닌 소설가로서 맨부커상까지 받았던 존 버거의 대표 저서 <다른 방식으로 보기> 속 문장들로 그가 제시했던 새로운 관점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버거는 미술작품을 보는 기존 방식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 책을 시작합니다. 미적 가치, 진실, 작가의 천재성, 형식, 취향 등 우리가 기존에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일반적인 기준들은 사실 미술 작품을 신비화하여 알 수 없는 것으로 만들려는 의도를 가진 특정 지배계급에 의해 학습된 것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미술 작품을 대할 때 능동적인 주체가 되어 바라보려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또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p.10
“하나의 이미지라는 것은 재창조되거나 재생산된 시각이다.”
-p.12
“과거의 미술은, 특권을 지닌 소수가 지배계급의 역할을 정당화할 수 있는
어떤 역사를 새로 꾸며내려고 하기 때문에 신비화하는 것이다.”
-p.14
미술관에서 과감한 포즈의 여성 누드화를 감상하는 것과 야한 잡지 또는 영화에서 여성의 나체를 보는 것의 상황은 전혀 다릅니다. 미술관에서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여성의 나체 그림을 아주 태연하게 오랫동안 바라볼 수 있는데요. 그 이유는 미술관의 그림은 ‘예술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 작품을 외설적으로 보는 것은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되곤 합니다.
존 버거는 이러한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주었는데요. 유럽 유화의 한 범주인 누드화에서 여자들을 일종의 구경거리로 보이게 하는 몇몇 기준과 관습을 다양한 그림을 예시로 들어 언급합니다.
“여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주어진 한정된 공간에서, 남자들의 보호, 관리 아래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자들의 사회적 존재는 이렇게 제한된 공간 안에서
보호, 관리를 받으며 그 여자들 나름으로 살아남으려고 머리 쓰고, 애쓴 결과로
이룩된 것이다.”
-p.54
“남자들은 행동하고 여자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남자는 여자를 본다.
여자는 남자가 보는 그녀 자신을 관찰한다. 대부분의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의
관계는 이런 식으로 결정된다. 여자 자신 속의 감시자는 남성이다.
그리고 감시당하는 것은 여성이다. 그리하여 여자는 그녀 자신을 대상으로 바꿔 놓는다.
특히 시선의 대상으로.”
-p.56
“벌거벗은 몸(naked)이 누드(nude)가 되려면 특별한 대상으로 보여져야만 한다.
(특별한 대상으로 보는 것은 대상으로서의 그 몸을 이용하도록 자극한다)
벌거벗은 몸은 있는 그대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누드는 타인에게 보여지기 위한
특별한 목적에서 전시되는 것이다. (중략) 누드는 절대로 벌거벗은 몸이 될 수
없는 운명이다. 누드는 복장의 한 형식이다.”
-p.64
이 그림은 피렌체의 대공작이 프랑스 왕에게 보낸 선물이었다고 합니다. 여인에게 입을 맞추는 소년은 큐피드고, 여인은 비너스인데요. 버거는 이 그림에서 비너스의 자세는 두 사람의 입맞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녀의 육체 각 부분은 그림을 보는 남자의 눈에 잘 보이도록 배치되었으며, 그림을 보는 남자의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그려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자들은 남자들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여성성이 남성성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이상적인’ 관객이 항상 남자로 가정되고 여자의 이미지는
그 남자를 기분 좋게 해 주기 위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말에 의심이 든다면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해 보면 된다. 이 책에서 전통적인
누드화를 아무 작품이나 하나 고른 다음, 그림 속 여자를 남자로 바꾸어 보자.
머릿속에서 생각만 해도 좋고 직접 그려 봐도 좋다. 그리고 그런 전환이 얼마나
폭력적인 것인지를 살펴보기 바란다. 이미지 자체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관객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 관념에 대한 폭력 말이다.”
-p.77
버거의 또 다른 ‘새롭게 보기’는 수많은 서양의 유화 작품들이 자신이 소유한 것들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려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시기든 예술은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버거는 특히 다른 시각예술에 비해 ‘유화’에 국한하여 설명하였는데요. 그 이유는 유화 기법은 이전의 템페라 기법이나 프레스코 기법으로는 힘들었던 묘사를 보이는 것 그대로 재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화 시대 이전의 작품들 역시 부를 찬양했다. 그러나 여기서 부는 고정된
또는 신성한 사회적 질서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유화는 새로운 종류의 부를 찬양
했다. 이 새로운 종류의 부는 매우 역동적이면서 금전적 구매력의 제한만을 받을
뿐이다. 그리하여 그림은 금전적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바람직하고 탐나는
물건인가 하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어야만 했다. 이렇게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들의
‘매력’은 소유자가 직접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만족감을 시각적으로
줄 수 있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p.106
위 그림에 대해 존 버거는 “두 사람은 지주이며, 땅 주인으로서의 자세나 표정에서 이미 배경이 되는 자연을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라고 말해 이러한 해석에 격분한 로렌스 고잉 교수는 “이 그림은 철학적 즐거움에 빠진 인물들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고, 더럽혀지지 않는 원형 그대로의 대자연에서 느끼는 진정한 빛이 주는 즐거움을 표현하고 있다”고 말했는데요. 이에 버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론 앤드루스 부부가 오염되지 않은 대자연에서 철학적인 즐거움을 느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와 동시에 그들이 자신들의 소유지에
대해 뿌듯함을 느끼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중략) ‘더럽혀지지 않은 원형
그대로의 자연’을 즐기려면 그 땅을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우리가
‘자연적’이라고 부르는 것의 정의와 관련해서는 엄격한 재산권의 제한이 있었다.
(중략)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앤드루스 부부가 자신들의 땅을 보며 느꼈던
즐거움 중에, 지주로서 자신들의 모습을 확인하는 즐거움이 있었고, 그 즐거움은
자신들의 땅을 실제처럼 보이게 했던 유화의 능력 덕분에 더욱 커졌다는 점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배우고 있는 문화사에서는 그런 해석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처럼 취급되고 있기 때문에 그 점을 더욱더 분명하게 지적할 필요가 있다.”
-p.127
마지막으로 버거는 오늘날의 광고와 유화작품과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소유한 것을 과시하기 위해 "당신이 소유한 것들이 곧 당신"이라는 유화의 형식과 보는 사람의 소유욕을 불러일으키며 "당신이 소비하는 것이 곧 당신"이라고 말하는 광고는 참 많이 닮았으면서도 다릅니다.
"광고는 굉장히 많은 부분을 유화라는 언어형식에 의존하고 있다.
그것은 같은 것에 대해 같은 목소리로 얘기한다."
-p.157
"광고는 소비사회의 문화다. 광고는 이미지를 통해 바로 이 소비사회가 스스로에
대해 갖는 신념을 선전한다. 이 이미지들이 유화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유화란 무엇보다도 사유재산에 대한 찬양이었다.
그것은 당신이 소유한 것들이 곧 당신이라는 원리에서 나온 미술 형식이다."
-p.161
이처럼 시각 예술 분야를 정치, 사회적 관점, 인종, 젠더 문제 등으로 분석한 존 버거의 관점은 미술 비평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버거는 영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맨부커상을 받은 후 상금의 절반을 흑인운동단체인 블랙팬서에 기부하고, 나머지 절반은 유럽 이민노동자 문제를 주제로 한 <제7의 인간(A Seventh Man)>을 출간하였다고 하는데요.
그동안 단순히 수많은 미술비평가 중의 한 명으로만 생각했던 존 버거가 2012년 한국어 번역본의 첫 페이지에 한국 독자들을 위해 남긴 메시지를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자들을 위해 새 눈에 대해 너절한 글을 쓰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 "계속 싸워나가시기 바랍니다!" -p.5 한국의 독자들에 보내는 글 中
수많은 이미지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는 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다른 방식으로 보기' 위해 싸워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존 버거에 대한 다큐멘터리와 전시를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잘 가요, 존 버거
<다큐멘터리 “퀸시의 사계절 존 버거의 4개의 초상>
2016. 틸다 스윈튼 제작
<특별전 “그의 책 속으로 돌아간 존 버거”>
2017. 1. 6. - 1. 22. 서울 종로구 청운동 류가헌 갤러리
참고: <다른 방식으로 보기>, 한겨레, 중앙선데이, 연합뉴스, 매일경제
이미지 출처:awestruck wanderer, theguardian, 열화당, wikipedia, isatrends, newyorker